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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11화 (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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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는 아니었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핏자국이 연해지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태유준은 한숨을 내쉰 다음 원혁을 쳐다봤다. 그는 마치 쇼핑하듯 선반을 둘러보며 큰 식칼과 가위, 과도를 챙기는 중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태유준의 질문에 원혁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태유준에게 포장된 과도와 식칼, 가위를 던지듯 품에 안겼다.

“이, 이걸 저더러 챙기란 겁니까?”

“맘에 안 들면 도마 챙기든가. 아까 보니까 잘 죽이던데. 우리 총알 별로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런 거 보이면 재깍재깍 잘 챙겨 놔야 해.”

할 말이 없었다. 태유준은 얌전히 무기를 받아 들고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 가게에 들어오면서 벗어 둔 배낭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기를 배낭에 쑤셔 넣은 다음 그는 일단 작은 사이즈 생수를 여러 개 챙겼다.

그다음으로는 아까 둘러보던 레토르트 선반으로 이동했다. 아까 눈여겨본 5분 카레와 짜장, 물을 부어서 불려 먹는 건조 죽, 건빵을 챙겨 우선 자기 가방에 집어넣었다. 참치 통조림은 작은 것으로 예닐곱 개를 챙겨 넣었다. 그러자 홀쭉했던 배낭이 빵빵해졌다.

이제는 사람들을 위한 식량을 본격적으로 챙길 차례였다. 식자재 마트답게 큼직한 종이 상자를 접어 둔 것이 구석에 여러 개 처박혀 있었다. 테이프 없이도 상자 밑면을 요령껏 접으면 힘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군에서 배운 팁이었다.

벙커 안의 사람은 거의 백여 명에 육박한다. 그들이 단 며칠만이라도 버티려면 최대한 상자를 많이 접어 차로 옮기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유준은 빠른 속도로 상자부터 접었다. 레토르트 코너를 한 바퀴 돈 다음 훈제 오리, 말린 오징어와 육포 코너, 견과류와 뻥튀기 코너 순서로 돌면 되겠다 싶었다. 가게 벽면에 걸린 시계를 살피니 벌써 새벽 5시였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둘러야겠다.

태유준은 쪼그려 앉았던 자세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때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숟가락도 챙겨야겠구나. 그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거야.

그 생각에 그는 일회용품 코너로 발길을 향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지금 있는 레토르트 코너에서 가게 입구 쪽을 빙 돌아 좌측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가게 문을 지나가던 때, 그는 보았다.

“…!”

새벽빛이 어슴푸레해 볼 수 있었다. 유리창 너머 시장 골목에 좀비 수십 명이 비척이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이라니. 태유준의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뛰었다. 그 바람에 너무 긴장한 탓일까. 그가 상자를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가게 앞문 가까이에 있던 좀비 한 마리가 모가지를 꺾어 태유준을 바라봤다. 텅 빈 안구였지만 마치 눈이라도 마주친 착각이 들었다.

“헉.”

태유준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군용 배낭에 식칼과 과도를 쓸어 담고 있던 원혁이 물었다.

“왜 그래.”

“차, 창밖에 좀비가…. 움직이고 있어요. 수십 마리!”

“뭐?!”

그들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좀비들이 문을 박차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뚜두둑, 뚜둑. 목 관절을 꺾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흡사 인간의 흔적을 쫓는 듯 굴던 좀비는 곧장 태유준과 원혁의 냄새를 맡고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꿰에엑!”

좀비 떼가 들이닥쳤다. 태유준과 원혁은 좀비들을 피해 뒤돌았다. 하지만 그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젠장.”

원혁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조리용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외쳤다. 중국 요리에 많이 쓰이는 큼직하고 네모난 칼이 살벌하게 빛났다.

“도망칠 만한 루트를 찾아봐! 분명히 뒷문이 있을 거야!”

그 말에 태유준은 죽도록 뛰었다. 선반을 빙 돌아 다시 상자를 접던 곳까지 뛰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떨어졌다.

살아야 했다.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지금도 열린 문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는 좀비들을 피해 도망가려면, 반드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곳은 규모가 큰 마트. 출입문이 하나뿐일 리 없다…!

“헉.”

구석에 쇠로 된 큰 문이 보였다. 가게 직원들이나 납품업자들이 드나드는 문 같았다.

“여기! 종이 상자 쌓인 곳 옆에 문이 있어요!”

태유준이 고래고래 외쳤다. 원혁은 중식 칼을 휘두르며 좀비들의 얼굴을 반파하고, 그들의 목에 칼날을 꽂아 넣는 중이었다. 연이어 한 좀비의 배를 발로 차자 좀비가 넘어지면서 뒤에 서 있던 좀비를 쳤다.

그 바람에 도미노처럼 몇몇 좀비가 쓰러지면서 전열이 흐트러졌다. 문으로 들어오려던 다른 좀비는 아예 가게로 진입하지도 못하고 튕겨 나가 버렸다.

“끄에엑!”

남의 아래에 깔린 좀비가 경련하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태유준이 상황을 살펴보니 몇몇 좀비들은 다른 좀비의 머리통과 등을 밟으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원혁은 좀비와 불과 수십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뛰는 중이었다.

“어서!”

원혁이 과감하게 날아 문 안으로 들어왔다. 좀비가 팔을 뻗어 문 안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원혁은 가차 없이 철문을 닫아 버렸다.

“끼에엑! 꾸아!”

좀비가 귀청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원혁은 문을 약간 열었다가 다시 쾅! 좀비의 손이 부서져라 문을 닫아 버렸다.

“끄악!”

“문을 잠가야 해요!”

태유준은 이를 악물고 잠금쇠를 걸었다. 천만다행으로 아날로그식인지라 대처하기 편했다. 쾅쾅, 문 너머에서 좀비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식하게 몸을 쿵쿵 찧어 가며 문을 부수려는 소리도 들렸다.

“어서 나가자.”

거리로 나온 두 사람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길에는 저 멀리 좀비가 몇 마리 더 있었다. 둘은 재깍 시선을 교환했다.

어차피 지금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모험을 해야 할 때였다. 이곳에서 죽느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했다.

원혁이 바로 옆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혁이 손가락으로 셋, 둘, 하나를 만들어 보였다. 둘은 동시에 냅다 건물 입구로 뛰었다.

“다행히 아무도 안 쫓아 들어온 것 같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2층으로 가자.”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은 다소 낡은 저층 상가 건물이었다. 둘은 우선 안전을 위해 건물 구조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로 했다.

“우선 안에 놈들이 있나 살피자.”

“알겠습니다.”

건물이 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구역을 나누어 1층부터 3층까지를 빠르게 살폈다. 인테리어로 보아 이곳은 성인 토익 학원인 것 같았다.

칠판이 딸린 작은 교실이 몇 개 있었고 휴게실로 보이는 방, 그리고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태유준은 다시 복도 중앙으로 와 원혁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건물을 봉쇄해야겠어.”

1층의 비상구만 제외하면 이 건물에는 중앙 출입문이 하나였다. 원혁은 배낭에서 쇠사슬을 꺼내 문손잡이를 칭칭 동여맸다.

“문제는 비상구야. 비상구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는 길을 봉쇄해야 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십시오. 돕겠습니다.”

원혁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태유준은 뛰다시피 걸어 그의 뒤를 따랐다.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잠시 주위를 살폈다.

“여기도 잘 잠가 둬야겠군.”

원혁은 가져온 배낭에서 또 다른 쇠사슬을 꺼냈다. 절대 누구도 문을 열지 못하게끔 손잡이를 동여맸다.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세요?”

“그러게.”

“원래 갖고 다녀요?”

“전에 빌렸어.”

“누구한테요?”

“주인 없는 철물점에서.”

원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 * *

둘은 휴게실을 캠프 삼아 머무르기로 했다. 간이침대가 마침 두 개 있는 데다가 정수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긴장감이 가시지 않아 침대에 편안히 몸을 뉘일 수는 없었지만 배낭을 벗고 잠시 숨을 돌릴 정도는 됐다.

“우리 트럭은 길 건너에 있어.”

원혁이 창문 커튼을 살짝 젖혀 대로변 건너를 가리켰다. 승용차 사이에 고구마 트럭이 서 있었다.

“하지만 마트에서 식량을 꺼내 오기 전까지는 차가 있어 봤자 무용지물이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하아….”

“일단 잠깐 체력이나 보충하자고. 당장 움직이기는 힘드니까.”

태유준은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시간은 아침 7시. 아직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데이터와 통화 신호는 원활했다. 태유준은 유명 포털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해 봤다. 한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아. 이 상황에서도 바깥소식을 알 수 있구나.

지금도 취재 일선에 나가 있는 기자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고, 또 감사했다. 태유준은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좀비 소요 사태 계속… 정부, 구조 약속했으나 일정은 미정]

기사를 클릭해 보니 화가 난 사람들이 댓글을 잔뜩 달아 둔 상태였다.

[작성자 1: 이래서는 정부를 어떻게 믿냐? 벙커 안인데 여기 아수라장이다. 먹을 것도 물도 없다. 다 같이 죽자는 거다.

작성자 2: 윗댓 왜 이렇게 흥분하심? 난 집에서 대기타고 있음. 하루 빨리 구조되길 바람.

작성자 3: 제 블로그 들러서 자격증 수강 정보 확인하고 가세요.

작성자 4: 이런 기사까지 광고쟁이가 들르다니 말세다. 정부는 빨리 조난자들 구조해!

작성자 5: 그래도 인터넷이랑 전화는 아직까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역시 통신 강국 코리아.]

인터넷 창을 끈 태유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얻을 만한 정보는 없었다. 태유준은 아까 원혁이 한 것처럼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야가 환해지자 더욱 잘 보였다.

이 상가 앞에도 좀비가 수십 명 있었다. 사냥감이 없어서인지 펄쩍펄쩍 뛰어다니진 않았다. 몇몇은 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중이었고, 몇몇은 사냥감을 찾는 것인지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나 잡아먹으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역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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