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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은 뒤돌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운데 거구의 원혁이 똑바로 걸어 나와 음식물이 놓인 테이블까지 걸어오자 자연스럽게 민머리가 그를 쳐다봤다.
“넌 또 뭐야. 그룹에 끼고 싶어? 덩치는 쓸 만하네.”
“그딴 거 안 껴.”
“뭐?”
퍽. 원혁이 민머리의 콧등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남자의 양쪽 콧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태유준은 기가 막혔다. 생각을 고쳐 준다는 게 저런 뜻이었다니. 유준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말릴 틈도 없이 이미 상황은 원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 이 새끼가…!”
민머리가 되는대로 두툼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원혁은 그 주먹을 가벼운 깃털이라도 되는 듯 간단하게 막아 세웠다.
“으, 으윽…!”
남자가 악을 쓰며 원혁에게 완력을 행사했으나 원혁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민머리의 두피에 핏줄이 돋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졸개들은 잔뜩 쫄아 붙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야! 너 불만 있냐?! 우리끼리 세운 규칙에 불만 있냐고!”
“어.”
“있으면 어쩔 건데! 여기 있는 식량 골고루 나눠 먹다가는 다 같이 한날한시에 뒤져! 구조대 온다고 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 119는 전화도 안 받지! 뉴스 틀어 보면 닥치고 벙커에 처박혀만 있으래.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아야지!”
민머리가 악다구니를 썼다. 태유준은 지금 남자가 내뱉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적자생존. 나는 힘이 세고 강하니까 나와 같은 무리들이 살아남는 게 정당하다는 이기적 발상. 토악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생각이었다.
“살아남을 사람을 네가 뭔데 정해.”
“내가 여기 대장이니까!”
“지랄하네.”
원혁이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민머리의 손목을 비틀었다.
“아악!”
기습을 당한 민머리는 비명을 지르며 제 손목을 감싸 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아파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민머리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여기 물자는 한정돼 있다고!”
태유준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룹 3의 노약자들은 지금도 앓는 소리를 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잔인하고 금수 같은 놈들. 바깥에 있는 괴물보다 더한 존재들을 보며 태유준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정되지 않게 하면 됩니다.”
태유준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힘이 있는 소리였다. 좌중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에게 쏠렸다.
“뭐… 뭐라고? 무슨 수로. 설마 식량을 재분배하잔 소리는 아니겠지?!”
민머리와 졸개들이 당황해 물었다. 태유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물자는 그룹 1, 당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빼앗는다면 나 역시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겠죠. 그러니 제가 나가서 모두가 먹을 식량을 넉넉히 가져오겠습니다. 그걸 공평하게 나눕시다.”
그룹 2, 그룹 3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떻게요. 나가시려고요?”
“그래야죠. 나가서 식량을 구해 오겠습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아, 제발.”
김은진이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룹 3 소속인 그녀는 사태 이후 단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렸다.
“하, 잘났네. 잘났어. 그래, 거기 너. 알아서 해 봐라!”
민머리와 졸개들은 허세를 부리며 배식을 시작했다. 그룹 1과 그룹 2 사람들이 그들 앞으로 줄을 서는 동안 원혁이 태유준 옆으로 다가왔다.
“신부님. 나 어땠어?”
“대단히 용감하시더군요.”
“근데 신부님, 식량 어쩌고 하던데 대책은 있어?”
“네. 있습니다.”
“설마 우리 고구마 나눠 줄 건 아니지? 그건 신부님이랑 나만 오붓하게 구워 먹을 건데.”
“…그거 가지고 수십 명 먹일 수 없단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여기서 가까운 을지로에 방산 시장이 있어요. 그곳에 대형 식자재 마트가 많습니다. 그리로 가면 분명 식품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잠깐. 거기까지는 어떻게 가는데?”
원혁의 물음에 태유준은 잠시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차 키 좀 빌려주십시오, 형제님.”
원혁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내 트럭을 빌리겠다니, 안 돼. 신부님 도망가면 난 어떡해. 우리 동행하기로 했잖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에요. 부탁드립니다.”
태유준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원혁 입장에서는 속눈썹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아주 짙고 선명하게 보였다. 살짝 떨리는 입술도, 침을 삼킬 때마다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도 잘 보였다.
“흠흠. 이렇게 성스러운 우리 신부님께서 애원하니까 마음이 좀 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바깥에는 좀비가 너무 많아. 미친 듯이 위험하다고.”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형제님.”
“글쎄. 신부님이 나한테 보상을 해 주면 몰라도….”
원혁이 짐짓 튕기는 시늉을 했다.
태유준은 속으로 원혁을 욕했다. 민머리를 때린 걸로 봐서 자기도 불만이 한가득이다. 그래 놓고는 한발 뺀다는 건,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거다. 아까 민머리를 제압하기 전에도 거래를 하자고 하더니, 이제는 숫제 보상을 원한다고 한다. 태유준은 원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내가 만져 달라고 하면 만져 주기. 어때?”
원혁은 태유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본 다음, 그의 아래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비릿한 웃음을 띤 채였다. 태유준은 순간 당황했다. 만지다니, 어디를?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신부님이 만져 주면 머리 아픈 게 싹 가시면서 기분이 너무 산뜻해진단 말이지. 다안탁스보다 백배는 효과가 좋아.”
“진짜로요?”
“응. 원래는 한 번만 만져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어. 생각해 보니까 신부님이 내 전속 두통약이 되면 어떨까 싶은데. 물론 신부님이 원한다면 머리 말고 다른 데도 만져도 되고.”
원혁이 태유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태유준은 원혁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차도 빌려주고, 앞으로 목숨 걸고 같이 동행해 주고, 저 대머리도 두드려 패 줄게. 신부님은 가끔씩 나 좀 쓰다듬어 주면 돼. 후한 조건이잖아. 안 그래?”
이게 말이 되나. 이 험한 시국에 손 하나로 차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니. 태유준은 솔직히 황당했지만 이 거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거래 완료.”
원혁이 목을 좌우로 뚜둑 꺾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나갈 준비나 하자고. 신부님.”
* * *
두 사람은 밤이 깊을 때까지 기다렸다. 태유준은 간편한 복장을 놔두고 수단으로 갈아입었다. 로만 칼라가 우아한 목선을 감싸고, 차르르 떨어지는 옷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금욕적인 느낌을 더했다. 목에는 묵주 십자가를 걸었다.
원래 신학도들은 서품을 받기 전까지는 수단을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다. 특별한 행사 때나 걸쳐 보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가 지금 이 옷을 굳이 입고 나가는 건 의지의 표상이었다.
내가 그분의 아들임을 잊지 말자.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신과 함께한다.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굳이 이 옷을 입고 나가고 싶었다. 한순간도 신을 잊고 싶지 않았기에 묵주 십자가도 잘 챙겼다.
그룹 3 사람들이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김은진이 애처로운 얼굴로 태유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꼭 살아 돌아오세요.”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사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를 안아 든 30대 여자가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와 여자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을 하고 있었다. 태유준은 그 모습을 보며 더욱 결심을 굳혔다.
“꼭 먹을 것을 구해 오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태유준은 작게 성호를 그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Sed libera nos a malo, Amen.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원혁은 별말 없이 뒤돌아 벙커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두 층 오르고 비밀번호로 도어 록을 풀어 바깥으로 나갔다.
덜컹. 가장 바깥에 있는 문을 열자 한밤의 쌀쌀한 공기가 태유준의 뺨을 스쳤다. 저 멀리 인왕산에 아스라이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어두운 한밤중이라 길에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사람은 기민하게 좌우를 살피며 벙커 입구를 빠져나왔다.
“트럭까지 빨리 뛰자고.”
원혁이 먼저 트럭이 세워진 방향으로 뛰었다. 태유준도 빠르게 달려 트럭 조수석에 올랐다. 둘은 트럭에 조심히 시동을 걸고 천천히 달렸다.
태유준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왜 그렇게 싸움을 잘하십니까. 누가 보면 격투기 선수인 줄 알겠던데.”
태유준은 파이터를 연상케 하는 원혁의 어깨와 팔뚝, 넓다 못해 광활한 그의 가슴 근육을 관찰했다. 자신도 나름 군대도 다녀오고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하건만 차이가 커도 너무 컸다.
“내가 한때 카레이서였다는 말 했지? 레이싱이 안 그래 보이지만 엄청 체력이 좋아야 돼. 운동 미친 듯이 시키거든.”
“정말요?”
“음. 복싱도 하고, 격투기 선수들이 하는 루틴 다 따라 했어. 그때 생긴 근육이 아직까지도 안 빠져.”
“음… 카레이서들이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줄은 몰랐어요. 근육이 많아야 하는구나.”
“그런 의미로 내 배나 한번 만져 봐.”
원혁이 태유준의 손을 잡아다가 제 배 위를 문지르게 했다. 태유준은 식겁해서 손을 빼려 했으나 원혁의 손아귀 힘이 워낙 강해서 별수 없이 배를 만지게 되었다.
“어… 이건 단단한 정도가 아니라 돌인데요.”
“이 정도는 돼야 차 몰다가 벽에 박아도 안 죽지. 시속 340킬로미터로 질주하다가 벽에 충돌하면 충격이 어마어마하거든.”
“그렇겠어요.”
얼굴에 이어서 배도 만졌네. 태유준은 괜한 머쓱함에 손을 슬쩍 뺐다. 이상하게 손끝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