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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8화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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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조금 갈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 자체가 목적이 된 이 현실에서, 이처럼 강한 자가 타인을 위해 망설임 없이 싸워 준다는 건 큰 도움이 됐다.

“흠… 알겠습니다.”

“얼굴도 닦아 줘. 나 가방에 물티슈 있어.”

“네, 네. 알겠습니다.”

태유준은 원혁이 내미는 가방을 받아 들어 물티슈를 꺼냈다. 그런 다음 몸을 숙여 원혁의 얼굴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자 남자답게 직선을 그리는 얼굴이 꽤나 잘생겨 보였다.

이마에 난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강인한 얼굴 윤곽 때문일까. 그에게는 재벌 도련님의 분위기보다는 야성적인 수컷 냄새가 풍겼다.

꿀꺽, 태유준은 침을 삼키고 원혁의 얼굴에 물티슈를 가져다 댔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 흉터가 있는 이마를 지나 남자다운 선을 그리는 짙은 눈썹,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 아래 잘생긴 콧등을 살살 닦아 냈다. 뺨을 문지르는 동안 얇은 천 조각 아래로 단단한 근육과 뼈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의 얼굴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느껴 보기는 또 처음이네. 태유준은 피식 웃었다.

“아, 손길 좋다. 부드러워.”

“조용히 계세요. 방해돼요.”

“좋은 걸 좋다고도 말 못 해? 아니 근데, 기분 탓인가. 신부님이 나 만져 주니까 두통이 다 나은 것 같아. 성스러운 힘인 걸까?”

“그런 건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동안 어느새 원혁은 잠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곤히 새근새근 숨을 쉬면서.

오늘 처음 만난 사람 무릎 베고 잠이 와? 심지어 낯선 벙커에서. 태유준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태평하네. 나는 이렇게나 답답한데.

태유준은 숨을 쉴 때마다 호흡이 딸리는 기분이었다. 숨이 아니라 심정이 그랬다. 너무나 많은 상념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육체는 꽤나 솔직해서 벽에 기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노곤해졌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지만 원혁과 몸을 붙이고 있어 느껴지는 미미한 온기도 노곤함에 한몫했다.

너무 졸려. 나도 조금만 잘까….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파르르, 긴 속눈썹이 떨리며 눈꺼풀이 닫혔다.

꿈속에서 그는 평화롭게 수도원 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날씨는 맑았고 햇살을 머금은 나뭇잎은 푸르렀다.

그의 양옆에는 베드로와 안토니오, 그리고 세실리아 수녀가 있었다. 다들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특히나 안토니오는 특유의 푸근한 웃음으로 좌중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요한. 오늘은 참 행복한 날인 것 같아.’

‘어째서요?’

‘모든 것이 평화로우니까. 잔잔한 호수가 따로 없어.’

안토니오가 활짝 웃었다. 태유준도 따라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 수도원의 평화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아주 안온하고 완벽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요한.’

‘네?’

‘네가 날 죽여 버렸네?’

태유준의 심장이 덜컥, 추락했다. 태유준은 벌벌 떨며 안토니오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괴물로 변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네가, 네가 날 죽였어!’

그러면서 꾸웨엑, 역겨운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안토니오가 태유준의 목덜미를 물려는 순간, 그는 번쩍 눈을 떴다.

“헉.”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습기 눅눅한 공기와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아. 꿈이었구나.

마치 꿈이 현실이고 지금이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변하는 건 없었다. 태유준은 이 공간 전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너무나 어두컴컴했기에. 한 줄기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랬다.

“신부님, 깼어?”

그때 누워 있는 시야에 원혁이 들어왔다. 그는 방금 씻고 왔는지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셔츠로 갈아입고서 타이를 푼 상태였다.

“신부님이 날 잘 재워 줘서 그런가. 머리가 하나도 안 아프네. 이런 일은 웬만해서 잘 없는데.”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된 두통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원혁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 돌아가신 어머니 또한 끔찍한 두통을 안고 살았으며, 결국은 뇌 질환으로 숨을 거뒀다.

원혁은 솔직히 말해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자주 CT 검사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의사들의 진단은 똑같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성 두통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하지만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마음을 어떻게 편히 가진단 말인가.

그러니 다안탁스를 껌처럼 씹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은 다안탁스 열 알을 퍼부은 것보다도 머리가 상쾌했다. 한 일이라고는 태유준과 같이 잠든 것뿐인데도.

“푹 자서 피곤이 풀렸나 보네요.”

“신부님도 죽은 듯이 잘 자더라.”

“피곤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체력 소모가 컸을 테니까.”

“네….”

“그런데 신부님 옷. 계속 입고 있기에는 피가 너무 튀었는데.”

원혁이 맨투맨 티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태유준은 그제서야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쏜 괴물 피. 여기 흠뻑 젖었어. 알고 있었어?”

원혁이 손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지저분해진 곳을 정확히 알려 주었다. 태유준은 그제야 곰팡내 섞인 공기 속에서 피비린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실은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묻히고 있는 이 역겨운 냄새를.

“…갈아입어야겠네요.”

“화장실에 물 잘 나와. 복도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면 돼. 간단하게 씻을 만하니까 세수하고 싶으면 하고 와. 닳기 직전이지만 비누도 있더라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건은 있어?”

“네. 가방에 한 개 있습니다.”

“칫솔은? 없으면 내 거 빌려줄까?”

“농담 재미없어요.”

태유준은 가방을 뒤져 세면도구와 칫솔, 수건을 꺼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일어난 다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강당을 떠났다.

복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틀자 원혁이 말한 대로 커다란 화장실이 나왔다. 태유준은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틀어 보았다. 벙커에 수도 시설이 잘되어 있는 건지 괜찮은 수압으로 물이 흘러나왔다.

태유준은 안토니오의 피로 얼룩진 맨투맨 티를 벗었다. 그리고 세면대에 물을 가득 받았다. 옷을 찬물에 담그자 조금씩 핏물이 우러나왔다. 태유준은 입술을 깨물며 옷을 빨기 시작했다. 공용으로 설치된 비누를 동원해 거품까지 냈다.

옷에 비누 거품을 묻혀 문지르자 아주 조금씩 핏자국이 흐려졌다.

“하아….”

물에 옷을 담그고 잠깐 방치했다. 마치 소갈비에서 핏물이 빠지듯 자꾸만 우러났다. 이렇게나 많이 젖었나 싶을 정도로 피의 양은 엄청났다. 잠시 후 태유준이 맨투맨 티를 집어 올렸다.

촤악, 물이 떨어지며 아직 미미하게 남아 있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번 더 비누칠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금 비누로 손을 뻗었을 때, 태유준은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묘했다. 단 며칠 사이에 퀭해진 안색, 피로에 찌든 눈빛. 경직된 뺨 근육. 너무나도 낯선 사내가 그 안에 있었다. 분명 자신과 똑같이 생겼으나 며칠 전의 자신과 전혀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유준은 죄지은 사람이라도 된 듯이 고개를 돌려 옷깃을 잡고 다시 한번 거품칠을 했다. 박박 비벼 닦자 천에서 빨간색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올랐다.

태유준은 꽤 오랫동안 세면대에 머물렀다. 마치 이 옷이 깨끗해지면 간밤 있었던 일이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얼룩을 지워 나갔다.

한참의 씨름 끝에 완벽하게 옷을 빨았다. 있는 힘껏 옷을 탈탈 턴 다음, 태유준은 화장실 안을 둘러봤다. 장애인용 화장실에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청소용으로 설치된 호스가 그 안까지 쭉 뻗어 있었다. 남들도 다 저기서 씻는구나 싶었다.

태유준은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물을 틀어 정수리부터 끼얹었다. 지금은 늦가을이므로 찬물로 씻기란 아주 힘들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물이 차갑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뜻한 물이나 찾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비누 조각으로 대강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내린 후 물을 잠갔다. 그런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다시 강당으로 돌아오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람들은 전부 일어나서 세 줄로 서 있었는데 모두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태유준은 빠르게 원혁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분위기 왜 이렇습니까.”

“배식 시간이래.”

세 줄로 선 사람들 앞에는 기다란 탁상이 있었다. 그 위에 올려진 것은 인스턴트 죽, 참치 캔, 그리고 생수 묶음 등이었다.

다 같이 나눠 먹는 게 아닌가? 사람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태유준은 이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난 민머리 남자 패거리에서 정답을 찾았다.

“그룹 1은 참치 캔과 죽, 물 한 병씩 가져가. 그룹 2는 죽만. 그룹 3은 아무것도 없다.”

뭐라고? 태유준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룹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왜 식량을 균등하게 나누지 않는 거야.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아마도 각 그룹을 나타내는 세 줄의 사람들이 별다른 불만이나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끝에 서 있던 그룹 3으로 추측되는 집단은 전부 여자와 노인이었는데 그들은 말없이 한숨만 쉬는 중이었다.

대체 여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태유준은 헛웃음을 지은 다음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여기 처음 와서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룹을 나누는 기준이 뭡니까?”

“아, 신입이네. 우리가 설명이 좀 늦었구만. 식량이 한정된 관계로 우린 공평하게 물자를 나눌 수 없어. 안타깝지만 말이야.”

“기준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성질 급하긴. 각 그룹은 가입 신청을 해서 뽑히는 거야. 그룹 1에 들어오고 싶으면, 네가 쓸 만한 놈이란 걸 증명하면 돼. 이도 저도 아니면 그룹 2. 쓸모없는 버러지면 그룹 3. 크하하.”

민머리 남자와 졸개들이 천박하게 웃었다. 태유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봐요.”

“신부님!”

앞으로 나서려는 태유준을 원혁이 막아섰다.

“어쩌려고.”

“항의해야죠.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급 나누고 소외시켜요? 주님이 가장 미워하는 짓입니다.”

“아니, 좀 진정해 봐. 저쪽은 쪽수가 넷이라고. 신부님 혼자 저 남자들을 다 상대할 수 있어?”

“그건 자신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정의롭지 못합니다.”

원혁은 팔짱을 끼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흠. 신부님, 그러면 말이야. 거래 하나 할래?”

“거래요?”

“내가 쟤네 생각을 고쳐 줄게. 대신에 신부님은 내가 해 달라는 거 하나 해 줘.”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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