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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지만 가로막혀 있으니 어쩔 수 없군요.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태유준이 말했다. 원혁도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었다. 곧 동이 터 오를 시간이란 점이었다.
“좋아. 일단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그나저나 오늘 밤을 날 곳을 찾는 게 급선무인 것 같은데. 차에서 자다가는 좀비 아침밥 되기 딱 좋겠어.”
이대로 길바닥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는 없었다. 표지판에는 가까운 벙커로 가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곳이 제일 안전할 것 같았다. 뉴스에서 서울 중구 대피소를 알려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태유준이 말을 꺼냈다.
“제가 이 근처 대피소 위치를 알아요.”
“대피소? 벙커를 말하는 건가?”
“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아래요. 거기 지하 벙커가 있습니다.”
“좋아. 일단 거기로 가 보자고.”
두 사람은 다시 차를 몰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 도착했다. 차를 안전하게 숨기기 위해 일부러 자동차들이 어수선하게 주차돼 있는 곳에 트럭을 댔다. 원혁은 권총 두 자루를 빼 한 자루는 자신이 갖고 하나는 태유준에게 건넸다.
“어떻게 쏘는지는 잘 알지? 군대 갔다 왔을 거 아니야.”
“사격은 제법 했습니다. 사람을 쏴 본 적은 없지만요.”
“사람 아니야. 괴물이야. 움직이는 표적이라고 생각하고 방아쇠 당기면 돼.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요?”
“총알이 좀 모자라. 내가 오면서 많이 써 가지고. 그러니까 진짜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일단은 쓰지 말아 봐.”
태유준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주변을 경계하며 차에서 내렸다. 발 하나 디디는 것도 숨을 꾹 참고 조심히 행할 만큼 태유준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후우, 후우. 얕게 숨을 쉬며 태유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살금살금 동상 발치로 갔다. 그곳에는 피와 정체불명의 땟국물로 오염된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S-03 세종대왕상 지하 벙커(서울 중구)]
-뒤돌아 50미터 간 다음, 방공호 문을 열어 주십시오.
-방공호 암호는 광복절 날짜입니다.
두 사람은 안내문을 꼼꼼하게 읽은 다음 방공호를 찾았다. 낡은 시멘트 담에 동굴 같은 방공호 입구가 보였다. 약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른 키만 한 문이 나왔다. 강철 재질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여기 있군. 도어 록.”
원혁이 허리 높이에 달린 도어 록을 찾아냈다. ‘0815*’을 입력하자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쪽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약 10여 미터 어두운 굴속을 걷자, 자동 센서등이 켜졌다. 갑작스레 빛에 노출되어 태유준은 눈이 부셨다.
[S-03 세종대왕상 벙커(서울 중구)]
-긴급 대피소입니다. 노약자와 장애인 먼저 입장 가능합니다.
-이 문의 비밀번호는 서울 올림픽 개최 연도입니다.
-지하 2층이 벙커입니다.
‘1988*’을 누르니 문이 좌우로 열렸다. 태유준과 원혁은 서로를 쳐다보고 눈을 맞춘 다음 차례로 발을 내디뎠다.
지하 2층이 나올 때까지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조명도 없고 비상등만 켜 있어 어두컴컴했다.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다가 쇠로 된 문이 보였다.
[광화문 지하 박물관: 휴관 매주 월요일]
벽에 붙은 글씨를 읽어 보니 이곳은 원래 도심 속 지하 박물관인 듯싶었다. 비상시에 이런 곳이나 학교 체육관이 긴급 대피소로 쓰인다는 것은 태유준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목적으로 오게 될 줄이야. 그것도 ‘좀비’들에 쫓겨서.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거기, 지금 도착한 거요?”
지하 2층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인기척과 함께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에 찌든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 예. 두 명 왔습니다.”
곧이어 꽉 끼는 티셔츠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민머리에 선글라스를 얹고 있었는데, 딱 봐도 양아치나 깡패로 보였다.
“더럽게도 늦게 왔네. 들어오슈!”
남자가 문 안쪽으로 손짓을 했다. 태유준은 마치 불청객을 맞이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와 원혁은 희미하게 불을 밝힌 내부로 들어갔다.
문화재가 진열된 공간과 작은 전시실을 여럿 지나고 나서 널찍한 실내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약 10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니. 태유준은 새삼 놀랐다. 뉴스에 나온 곳이니만큼 이미 피신해 온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시민들은 곳곳에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거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태유준과 원혁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모두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샅샅이 관찰하는 눈빛으로 태유준과 원혁을 훑었다.
“내가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쳐다보는 눈동자가 200개쯤 되니까 부담스럽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혁과 태유준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천천히 걸어 벽면으로 이동했다. 시민들은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적의 가득한 시선이었다.
태유준은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그가 아주 조용히 원혁에게 속삭였다.
“왜들 이러는 걸까요.”
“기존 세력들 사이에 새 사람이 들어와서 그렇겠지. 입이 늘었잖아.”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눈치를 줘요?”
“여긴 새로운 먹거리가 들어오지 못하는 폐쇄된 곳이니까. 아마 정부가 수시로 비축해 놓은 음식과 물자로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을걸. 거기에 남자 두 명이 새로 들어오니 기분이 어떻겠어, 신부님.”
“….”
수도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겨우 빵 한 조각을 두고 사람을 모함하고, 열외를 시키려 들었다. 친하게 지내며 고난을 함께한 자들조차 그렇게 갈라섰는데 생면부지의 이들은 더하겠지.
“일리가 있네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한테 음식을 쥐꼬리만큼만 줘도 서운해할 것 없단 소리야.”
“…그렇죠.”
“우린 나가서 고구마나 먹읍시다.”
“네?”
“트럭에 고구마 있잖아요. 내가 신부님 위해서 특별히 구워 줄게.”
원혁이 실없이 웃었다. 태유준은 긴장이 탁 풀렸다. 뜬금없이 고구마는 또 뭐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났다.
“저기. 지금 오셨어요?”
태유준이 고개를 돌려보니 다크서클이 진하고 얼굴이 파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으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직장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캐주얼했으며 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 제 소개부터 해야겠죠. 전 대학원생 김은진이라고 합니다. 전공 때문에 인근을 답사 중이었는데 사태에 휘말려서… 이곳 벙커에 1등으로 도착했어요.”
“그렇군요. 저는 태유준. 스물셋이고 직업은 신학도생입니다.”
“같이 온 사이.”
원혁은 딱히 그렇다 할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태유준으로서는 원혁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저에게는 꽤 살갑게 치근댔는데 여자 앞에서는 무표정에 개인 정보를 드러내지 않다니. 좀 의외였다.
“사람들이 많이 차갑게 굴 거예요. 시비가 붙을지도 모르고요. 여기는 심심하면 싸움이 일어나거든요. 특히 늦게 온 사람한테 텃세가 장난 아니에요.”
“역시 그렇군요. 식량 문제 때문인가요?”
“네. 제가 도시공학과 출신에 평소 벙커에 관심이 많아서 잘 아는데요, 이런 곳에는 물자가 그리 넉넉하지 못해요. 비축분이라고 해 봤자 보름치 정도뿐이거든요. 그것도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건빵이나 육포 같은 류가 전부죠.”
“생존 식량이네요.”
“그래서 하루에 딱 한 번 배식을 해요. 문제는 저기 저 사람들이 모든 물자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고요.”
김은진이 턱으로 민머리 남자 무리를 가리켰다. 알록달록 꽃무늬부터 현란한 호피 무늬까지 요란한 티셔츠를 맞추어 입은 남자들은 겨드랑이에 일수 가방을 끼고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저 대머리 중심으로 네 명이 뭉쳐 다니는데요. 힘이 세다는 이유로 대장 노릇을 하려 굴어요. 무서워 죽겠어요.”
김은진은 마른 팔뚝을 쓸며 겁에 질린 몸짓을 취해 보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네. 몸조심하세요. 그럼 전 여자 숙소로 가 볼게요.”
그녀의 말로는 남자들이 이곳 강당에서, 여자들은 건너편 전시실에서 따로 잠을 잔다고 한다. 김은진이 나가자 공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태유준은 다리를 쭉 뻗으며 툭툭 허벅지를 쳤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형제님, 그럼 주무시죠.”
“신부님은 안 자?”
“저는 조금 기도하다가 잘 겁니다.”
“그래? 그러면 잠깐 그대로 있어.”
원혁이 잽싸게 태유준의 무릎에 드러누웠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태유준이 인상을 썼다.
“뭐 하는 짓이세요.”
“나 잠들 때까지 이러고 있어.”
“제가 왜요.”
“나 오늘 좀비도 죽이고 신부님 살려 줬는데 이 정도는 해 주라.”
“그건 그렇지만….”
“베게 노릇 좀 해 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