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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차 안이라 도망칠 곳이 없었다. 거의 태유준을 덮치듯 몸을 드리운 그가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웠다. 달칵. 안전벨트가 완벽하게 결착된 것을 확인하고 원혁이 싱긋 웃었다.
“안전이 제일이야.”
“제 손으로 맬 수 있었는데요.”
“아, 맞네. 몰랐어.”
원혁이 시치미를 뗐다. 태유준은 원혁을 흘겼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집적거리고 싶어서잖아.’
태유준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태유준은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신학교 방향을 한 번 쳐다봤다. 건물은 여느 때와 같이 깊은 어둠 속에 가라앉듯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태유준이 몇 년을 보낸 곳이었다. 언젠가 성직자가 되기 위해 힘든 수련도 버티던 곳. 부지의 한쪽 구석에는 보육원이 있었다. 태유준의 시선이 보육원 건물에 가 닿았다.
태유준은 바로 이 수도원에 딸린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얼굴이 곱고 행동거지가 얌전하다는 이유로 그는 입양 가는 데 성공했다. 재력과 교양은 넘치고 자식은 없는 집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부부는 맹목적일 정도로 신앙이 깊었던 까닭에 굳이 수도원 부속 보육원에서 아이를 입양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태유준이 인형처럼 예쁘장한 장난감이 되어 주길 바랐다. 기상 시간부터 취침까지 태유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간섭하던 그들은, 교우 관계와 학업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도 태유준은 부모가 생겼다고 기뻐했다. 나에게 가족이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친구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얌전히 그들이 하는 말을 따랐다.
하지만 얄팍한 행복은 양달에 말린 도자기처럼 파삭 깨어졌다.
양부모가 태유준을 불길한 아이로 여기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들은 태유준이 자신들이 정해 주는 음식만 먹기를 원했다. 영양소는 완벽한 비율로 섭취해야 했고, 맛은 자극적이면 안 됐다. 그런 건 타락한 사람들이나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다듬어지고 정제된 음식들만 식탁에 올라왔으니 중학생이 맛있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태유준은 언젠가 친구 집에서 먹어 봤던 라면 맛을 잊지 못해, 몰래 주방에서 그것을 끓였다.
배가 고팠던 유준은 라면 봉지를 뜯으면서 물이 빨리 끓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물이 보글보글 끓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상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올려놓은 냄비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물이었는데? 태유준은 당황했다. 전원 버튼은 꺼져 있었다. 태유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뭐지?
잠시 숨을 고른 태유준은 끓고 있는 물을 버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로 냄비에 물을 담아 인덕션에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물은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그때 태유준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심상치 않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유준은 그때 전율했다. 아무것도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인형 같은 삶에, 처음으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 영문이야 알 수 없지만, 특별하고 별난 힘이 생겼다는 사실에 그는 흥분했다.
혹시 다른 것도 되지 않을까? 두려움과 호기심이 맞서 싸웠지만 호기심의 승리였다. 유준은 다양한 사물과 환경에서 실험을 해 봤다. 유준은 물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생각만으로 불을 꺼트릴 수 있었다. 이때는 몰래 라이터를 구해 와서 집 뒤뜰에서 실험했었다.
자그마한 불씨가 점점 커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불이 꺼지는 상상을 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내친김에 라이터를 손에 쥐고 공중에 띄우는 상상을 했다. 그랬더니 라이터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유준은 너무 놀라 앉은 자리에서 넘어질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능력을 지닌 자신이 너무나 신기하고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짜릿했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고 싶었다.
그날도 태유준은 공책을 허공에 띄우고, 컵에서 쏟아진 물을 거꾸로 쓸어 담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던 태유준의 양모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유준은 당황해서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양모는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악마의 능력이다!’
‘어, 어머니… 그게 아니라.’
‘부정한 힘이 깃든 게야. 이 아이는 악마의 아이야!’
양부모는 태유준을 나무라고, 혼내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악마의 힘이 깃들었으니 기도로 치유해야 한다며 태유준이 꼼짝 않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도록 시켰다. 외출은커녕 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24시간을 감시당하며 울고 또 기도했다.
태유준은 답답했다. 자신의 능력은 특별한 것이라고 믿었는데 양부모의 눈에는 없어져야 할 사악한 힘에 불과했다. 그렇게 몇 년간 사춘기 소년은 속박당하고 통제당하며 살았다. 태유준은 아주 가끔씩 양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마다 능력을 시험해 보았다. 물건들이 허공을 둥둥 날아다니게 하면 조금은 특별한 아이가 된 것 같아 위로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태유준은 양부모가 아직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 방에서 물건을 띄워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전날 밤까지 있던 능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사악한 힘이다, 악마의 술수다 온갖 소리를 들어도 이 능력 역시 태유준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고, 이제 그 능력마저 잃었지만 태유준이 잃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족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양부모는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딱 성인이 되는 시점까지만 입양을 유지하고, 태유준이 성인이 되던 날 자립을 핑계로 집에서 쫓아냈다.
그러니 수도원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바로잡아 준 것이 바로 장준식 박사였다. 그는 태유준의 가톨릭 대부이자, 보육원 아이들을 후원해 주는 봉사자였다. 장준식은 입양을 가고 나서도 태유준과 연락을 끊지 않았었고, 소년과 성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파양 소식이라니. 깜짝 놀란 그는 갖은 노력을 동원해서 길거리를 방황하던 태유준을 찾아냈다. 태유준은 그때 호되게 혼이 나든가, 아니면 양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장 박사도 자신에게 윽박지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장 박사는 아무 말 없이 태유준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춥지 않냐고, 감기는 걸리지 않았냐고 물어봐 주었다.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을 퍼부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외롭게 살아온 태유준의 마음을 열었다.
태유준은 눈 내리는 거리에서 펑펑 울었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겸허하게 지난날의 아픔을 씻어 내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러니 장 박사는 태유준에게 아버지, 아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무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태유준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어둠이 깔린 거리를 잠행하듯 달렸다. 갓길을 벗어나 본격적인 도로로 접어들면서 태유준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도심이 너무 어두웠다. 불이 들어온 간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시커먼 빌딩의 숲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파트, 상가 구분할 것 없이 모조리 불이 꺼져 있었다. 태유준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빛이 새어 나가면 좀비들이 꼬일까 겁이 나서다. 사람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으리라.
신호등은 고장 나 있었으며 도로 여기저기에 설치된 CCTV는 의미가 없었다. 과속해 봤자 딱지가 날아올 일은 절대 없어 보였다.
차와 사람이 사라진 도시의 거리는 지나치게 적막했다. 도로에는 곳곳에 추돌 사고의 흔적이 보였고, 차창이 산산조각 나 방치된 차량만이 있을 뿐, 주행 중인 차는 단 한 대도 없었다.
넓디넓은 명동과 을지로 대로를 달리는 차가 이 고구마 트럭 한 대뿐이라니. 그 어떤 인기척도 없다니.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은 폐허를 가로지르는 감각에 태유준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한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자세히 보니 도로 곳곳에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좀비들이 신체에 심각한 훼손을 입고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꼭 누가 쓰레기를 내다 버린 듯한 풍경이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저들처럼 죽었다. 나 때문에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혁은 안토니오가 인간이 아닌 좀비라고 했지. 하지만 그가 안토니오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태유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토니오의 영혼은 천국으로 갔을까, 지옥으로 갔을까.
…그는 신의 자녀로서 삶을 마감한 걸까.
물음은 궁극적으로 신을 향했다.
주여,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저희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요. 그래도 저는 간절하게 빌 것입니다. 저희를 이 지옥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 * *
한참을 달리던 차에 제동이 걸렸다.
“여의도 방향 진입 금지라는데?”
원혁이 손을 들어 공중에 걸린 도로 현황판을 가리켰다. 군데군데 금이 간 전광판에는 빨간 글씨로 오늘 날짜, 현 시각과 함께 ‘여의도 방향 진입 금지. 전면 통제 중. 위기 경보 3단계이니 가까운 벙커로 피신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러네요. 무슨 일이죠?”
“일단 더 가 볼게.”
둘은 경고문을 무시하고 계속해 달렸다. 곧 여의도 방향으로 빠질 수 있는 마포 대교가 나왔다. 하지만 다리 입구는 수 겹의 바리케이드로 완벽하게 차단돼 있었다. 철제 구조물까지 쌓여 있는 모습으로 보아 확실하게 길목을 막아 둔 듯했다.
“뉴스 찾아볼게요.”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 태유준이 핸드폰을 꺼내 교통 관련 뉴스를 검색했다.
[오늘 22시부터 강북-강남 간 이동 제한 조치. 강북에서 여의도 및 잠실 방향으로 진입 금지. 역방향 역시 도로 통제. 지금부터 한강 다리를 이용한 모든 이동은 전면 금지 됩니다.]
“엇, 진짜예요. 도로 통제래요. 한강 다리를 건널 수 없다고. 그러니까 여의도도 가로막혀 있는 거예요.”
“뭐? 그럼 어떻게 가.”
“그뿐만이 아니에요. 22시를 기해 위기 단계가 2단계에서 3단계, 그러니까 최고 단계로 상향됐어요. 군인과 경찰, 소방서 출동 불가. 정부의 추가 조치가 있을 때까지 무조건 실내 대기.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벙커에서 구조대 기다릴 것.”
태유준이 뉴스를 읊자 원혁이 혀를 찼다.
“뚫고 갈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 적어도 지금은.”
“네.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막막함이 찾아왔다. 여의도까지 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예 가는 길 자체가 봉쇄됐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유준은 직감할 수 있었다. 반드시 마포 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곳에 가서 장 박사의 연구소 문을 열어 보지 않으면, 일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우선 두 사람의 목표는 마포 대교 건너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