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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4화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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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유준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원혁은 바로 정색했다.

    “아니. 내 젝라렌을 좀비 떼가 무참히 밟아 으깨서 그래. 튼튼한 차였는데 수십 마리가 지붕에 올라가 쿵쾅거리니 답이 안 나오더군.”

    원혁은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이럴 땐 유감이라고 해야 할까. 태유준은 위로를 꺼내 보려다가 말았다.

    “그래서 길가에 방치된 트럭을 훔쳤지. 짐칸에 고구마가 한 상자 있긴 한데, 혹시 몰라서 안 버렸고. 먹을 게 귀한 세상이니까.”

    “그러셨군요. 어쨌든, 장 박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태유준은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나에 대한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남자. 의도를 알 수 없는 남자. 당연히 경계심이 발동했다.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늘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고, 또 그런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온 태유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는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날을 세울 건 없어. 난 그저 태유준 씨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해서 이 서류를 구한 것뿐이니까.”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장 박사님이 계신 곳을 알 것 같으니까. 난 지금 장 박사님을 찾고 있거든.”

    “…!”

    태유준은 속으로 놀랐다. 남자의 목적은 장 박사를 만나는 데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태유준과 목적이 같았다.

    “장준식 박사가 그쪽의 대부인 걸로 알고 있는데. 친아버지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알아낸 정보들 중에 딱히 거짓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상당히 끈끈한 관계로 보여.”

    “그렇다고 치죠.”

    “최근에 나한테 우편도 보냈잖아. 장 박사를 대신해서. 미국까지.”

    우편이라고 하니 퍼뜩 생각하는 게 있었다. 보름 전쯤 장 박사에게서 소포 상자가 하나 도착했었다. 내용물은 편지와 간식거리였다. 그리고 간식 상자 안에는 과자 대신 아주 조그마한 상자가 마트료시카처럼 들어 있었다. 그것을 뜯어보지 말고 그대로 해외로 보내 달라며 장 박사는 주소를 동봉했었다.

    분명 미국 뉴욕의 주소였다. 하지만 받는 사람 이름은 이 남자, 원혁이 아니라 외국 여자 이름이었는데?

    “줄리 앤더슨한테 보냈지 않아? 내 비서의 아내 이름이야. 나한테 비밀 우편을 보내는 사람들이 가끔 사용하는 명의이기도 하고.”

    “…네. 그 이름이 맞습니다.”

    이미 남자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거짓말해 봤자 딱히 도움될 건 없다는 판단이 들어 태유준은 순순히 인정했다. 소포 발신자에는 가짜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어 넣었으며 주소도 가짜로 꾸며 썼다.

    하지만 수도원 바로 옆에 있는 우체국에서 발송했으니 남자가 역추적을 해 올 만도 했다. 태유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번 내 소개를 할게. 난 제약 회사 오너야. 미국에 있는 ‘노 모어’라고, 우리 두통약 유명한데.”

    “두통약이라고요?”

    “한국에도 수입되는 약이야. 다안탁스. 10분 안에 두통 없애 주는 걸로 유명하지.”

    사람들은 다안탁스가 처음 출시됐을 때 신이 만들어 낸 약이 틀림없다고 찬사를 퍼부었다. 뛰어난 효과를 보건대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직접 제조에 참여한 것 같다고까지 이야기가 나올 만큼, 약의 효과는 뛰어났다. 물론 유준도 그 약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걸 만드는 회사 사장이시라고요?”

    “알아보는 것 같아 기쁘네.”

    원혁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다안탁스’ 로고가 선명했다. 그는 약을 털어 입 안에 넣은 다음 물도 없이 알약을 씹었다.

    “내가 두통이 심해서 우리 약을 달고 살아. 두통약 회사 사장이 두통 환자라니 좀 이상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말이 되는 건가?”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시죠?”

    “미국 사람이라서. 나 존댓말 몰라.”

    “음… 국적이 미국?”

    “어.”

    태유준은 예의범절이라고는 밥 말아 먹은 미국인을 보며 잠시 경멸의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이 약 개발자 중에 한 명이 장준식 박사라서 안면을 트게 됐지.”

    “장 박사님이 두통약을 개발했다고요?”

    태유준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몰랐어?”

    “…몰랐습니다. 워낙에 말씀이 적으셔서.”

    내가 모르는 박사님의 면모가 있었다니. 태유준은 타인에게 듣는 장 박사의 이야기가 낯설고 묘했다.

    “하여튼 나는 소포의 내용물 때문에 장 박사를 만나고자 한국에 들어왔어. 하지만 도저히 연락이 안 되더군. 게다가 며칠 전에는 이 망할 사태가 벌어졌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장 박사의 행방을 알 것 같아 당신을 찾아다녔는데 다행히 수도원 앞에서 한 방에 찾은 거지.”

    원혁은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두통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꼈다. 모계 유전인 두통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원혁을 성가시게 하고는 했다. 우리 회사 제품이지만 잘 듣기는 한다니까. 덕분에 원혁의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졌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좀비 새끼들 뚫고 온 보람이 있네. 3박 4일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태유준은 이제야 일의 전말을 대충 파악했다. 소포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짐작하건대 중요한 기밀을 띠고 있을 것이다. 평소 장 박사의 연구 분야가 특수 의약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제약 회사에 소포를 보낸 행위 자체는 전혀 어색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아주 값어치 있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면? 그렇다면 제약 회사 오너가 외국에서 직접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랬군요.”

    “장 박사, 지금 어디 있어?”

    원혁이 운전대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은 무표정했으나 그 안에는 알파 메일이 지닌 특유의 위압감과 무언의 압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치 불지 않으면 널 해코지라도 하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져 태유준은 긴장이 됐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당신 같은 측근이?”

    “저도 연락이 끊겨서 당황하던 중이었거든요.”

    태유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행방을 안다고 거짓말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야?”

    “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왜 수도원 밖으로 나왔어. 상대적으로 실내가 안전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텐데.”

    “그건….”

    태유준은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답했다.

    “박사님을 찾아가려고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네.”

    원혁은 태유준의 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다가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알겠어. 갈 길 가.”

    “…가라고요?”

    “난 장 박사를 찾고 있고, 태유준 씨는 박사의 위치를 모르니 더 이상 대화는 불필요하지.”

    틀린 말이 없었다. 매정한 태도였지만 남자의 말이 옳았다.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인사 없이 차에서 내렸다. 탁, 조수석 문이 닫히며 그는 다시 고요한 도로 위에 섰다. 11월 밤의 쌀쌀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유준은 트럭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고 여의도 방향을 찾아 한 걸음씩을 내디뎠다. 대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걷기가 좋았으나, 양옆에 골목이 수두룩 빽빽해 공포심을 자아냈다. 언제 골목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껏 경계하며 걷는 바람에 그는 빠르게 나아가지 못했다. 아까 원혁과 나눈 대화들을 곱씹을수록 찝찝함이 커져 생각이 많아졌다.

    외국에서 박사님을 찾아온 사람이라.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은데. 박사님은 대체 저 남자에게 무슨 소포를 보낸 걸까. 지금 연구 중이시라던 신약과 관련이 있는 걸까? 연락이 끊기기 얼마 전, 장 박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과 저 남자의 방문이 관계가 있는 걸까?

    갖가지 생각에 푹 잠겨 있을 때였다. 불현듯 오른쪽 골목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꾸에, 하는 좀비의 소리였다.

    “…!”

    오싹 소름이 끼치며 진땀이 흘렀다. 설마 좀비인가. 오는 동안 한 마리도 못 봤는데.

    태유준은 재빨리 가까이 있던 골목으로 숨었다. 괴물에게 걸리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곧 어기적거리며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유준은 크게 놀라 입을 벌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팔다리를 꺾으며 삐걱삐걱 걷고 있는 좀비는 안토니오였다. 비록 눈알이 없고 이목구비가 흉측하게 변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단, 남들보다 키가 훌쩍 크고 삐쩍 마른 몸. 파르라니 짧게 깎은 머리까지. 그리고 늘 목에 걸고 다니는 묵주 목걸이는 지난 성탄 때 자신이 안토니오에게 선물해 준 것이었다.

    내가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어.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태유준은 안토니오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 괴이한 소음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태유준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안토니오, 아니, 안토니오였던 좀비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킁킁, 사람 냄새를 맡으며 태유준이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안토니오가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태유준은 숨이 막혀 왔다.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저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크아, 꾸아아…!”

    “…안토니오 형제님.”

    “카악! 꾸아!”

    소리를 들은 괴물이 태유준 쪽으로 팔을 휘적였다.

    첫날 낮에 본 괴물들만큼 빠르거나 점프를 하진 않았지만, 안토니오는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팔다리를 기괴하게 꺾었다.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쩍 벌리기도 했다. 그의 입 안은 마치 지옥의 입구같이 시커멨다.

    가방 안에는 식칼이 있었다. 그리고 안토니오는 충분히 느렸다. 얼마 전까지 군에 몸을 담았던 태유준은 매일 체력을 단련해 오고 있었다. 제 예쁘장한 외모를 두고 벌어지는 희롱이 지겨워서였다. 가느다란 몸 선에 걸맞지 않게 태유준은 지구력과 순발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맘만 먹으면 안토니오를 제압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어려웠다.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지금은 좀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빵을 나누어 먹던 소중한 형제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형제님, 저는 형제님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태유준은 기도하듯 뇌까렸다. 괴물이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듯 침을 질질 흘려도, 태유준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도저히 가방 안의 칼을 꺼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는 사람을 죽여서 남는 게 뭐 있을까. 지옥에나 가겠지.

    한쪽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다가올 것이 무엇이든, 그저 받아들이고자 했다. 입에서는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목에 걸린 묵주 십자가를 꼭 쥐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가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안토니오가 내는 기괴한 소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탕. 소리와 함께 태유준의 얼굴과 상의로 끈적한 핏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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