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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로제에 시달리던 신학도들은 밤이 깊자 하나둘 안심하고 잠잘 준비를 했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고 있기 때문에 태유준은 오늘 밤 잘 수 없었다.
“오늘 당번은 요한이구나.”
“네, 안토니오 형제님.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편하게 주무세요.”
예비 사제들이 이층 침대로 속속 올라갔다. 방 안의 인원은 총 열 명. 불침번인 태유준을 제외하고는 아홉 명이었다. 모든 사람이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하고 태유준은 불을 껐다. 창밖에는 차 지나다니는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지극히 조용했다.
침묵과 어둠 속에 가만히 있자 태유준은 공허하고 쓸쓸했다. 배도 살짝 고팠다. 시일이 지나면서 한 사람당 배급되는 식량이 급격하게 줄어든 탓이었다. 육체도 마음도 허하다 보니 할 일은 생각뿐이었다.
만약에 밖에 나가야 한다면 밤에 나가야겠다. 태유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실은 장 박사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 여의도 근처에 위치한 개인 연구소에서 지낸다. 이곳 명동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편이다. 차로 가려고 해도 강북을 쭉 가로지른 다음, 마포 대교를 건너야 했으니 말이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더라도 태유준은 장 박사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밤새 창밖의 괴물을 의식한 탓인지 태유준은 너무나 피곤했다. 베드로에게 당번을 넘겨주고 한숨 잤다. 다시 일어나 보니 느지막한 오후였다.
꿈속에서 난폭한 좀비들이 그를 덮쳤다. 너무나 피곤하고 끔찍한 꿈이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라틴어로 세 번이나 외웠다. 똑같은 기도도 라틴어로 하면 더 경건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 주는 신비한 힘이 깃든 듯했다.
기도를 마친 태유준은 몸을 씻었다. 비록 얼음장 같은 찬물이지만 씻을 수 있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물이 있는 곳에 고립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저녁 배식 시간이 되었다. 태유준은 식사를 배급받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따가웠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노려보듯 시선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제님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흠.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이게 뭐지. 태유준은 저를 둘러싸고 선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일전에 빵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던 2인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팔짱을 꼈다.
“요한. 지난밤에 도둑질했지?”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빵 개수가 안 맞아. 계산을 해 보니 네가 불침번일 때 빵이 사라진 것 같던데.”
듣던 중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밤새 귀신 같은 괴물이 쳐들어오지 못하게끔 불침번을 섰는데, 훔치긴 뭘 훔쳤단 말인가. 태유준은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웃지 마. 지금 도둑질해 놓고 웃음이 나와?”
“도둑질이라뇨. 전 주님께 맹세코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증명해 봐.”
2인조 중 키가 크고 퉁퉁한 쪽이 시비조로 말했다.
“안 훔쳤는데 뭘 증명한단 말입니까?”
“결백하다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아니면 넌 앞으로 식량 배급에서 제외한다.”
“다짜고짜 죄를 뒤집어씌우더니 식량을 끊겠다고요? 일부러 누명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닙니까?”
태유준이 보기에 이 상황은 몹시도 수상쩍었다. 첫날부터 빵에 집착하던 그들이었다. 혹시 그때 갈등을 빚었다고 나한테 앙심을 품기라도 한 것인가.
“누명은 무슨. 너, 앞으로 열외다. 아무도 요한에게 빵을 주지 마!”
“알겠습니다.”
다들 짠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안토니오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2인조를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이 안에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사제를 길러 내기 위한 곳이다. 그런데도 선한 자가 아니라 강자가 지배하다니. 태유준은 이들의 작태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요한은 절대 식사 자리에 끼워 주지 말라고. 응?”
“네!”
남자는 흡사 장군이 졸병을 부리듯 위엄을 떨었다. 태유준은 피식 웃으며 젖은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질리네.”
“뭐라고?”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둘러싸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자들이 지겨워졌다. 그는 밤새 생각한 바를 실천에 옮길 때가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됐다고요. 이딴 식으로 사느니, 나가고 말죠.”
“미쳤어?!”
남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로서는 겁을 주면 태유준이 겁을 먹고 납작 엎드릴 줄 알고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맞받아치며 기숙사를 나가겠다니 놀랍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바깥에 나갈 배짱을 부리다니, 제정신인가?
“바, 바깥에 나간다고?”
“예. 어차피 저는 여기 길게 머무를 생각도 없었습니다. 갈 데가 있어서요.”
“미쳤어? 밖에는 좀비가 드글드글해!”
“압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거지 같은 곳에서 빵 한 조각 못 얻어먹고 무력하게 있느니, 나가서 제 갈 길을 가는 게 낫죠. 당장 오늘 밤에 나가겠습니다.”
어차피 장 박사를 찾아 언젠가는 이 기숙사를 나서고 싶었다. 그런 마당에 오히려 등을 떠밀어 주니 태유준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미 악으로 물든 공간에 더 이상 머물기도 싫었다.
비록 만반의 준비는 갖추지 못하겠지만 기왕 몸을 움직이기로 했으니 빠릿하게 굴자.
태유준은 망설임 없이 자기 몫의 캐비닛으로 향했다. 생활복을 벗은 다음 청바지 위에 하얀 맨투맨 티를 입었다. 그리고 검은 수단을 옷걸이에서 빼냈다. 이 상황에서 신성한 사제복이 다 무슨 필요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태유준은 이 옷을 꼭 가지고 나가고 싶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의 아들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기도하며 수단을 잘 갠 다음 가방에 챙겨 넣었다.
‘진짜야? 허세 아니야?’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생겨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챙길 물건을 다 챙긴 그는 얼빠진 표정의 동료들을 뒤로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 대신 조리대로 가서 식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건 좀 망설여졌다. 태어나 그 무엇도 해쳐 본 적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 사격을 아주 잘하는 축이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무로 만든 가짜 표적을 맞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밖에서 맞닥뜨릴 것들은 살아 움직이는 좀비다. 바로 얼마 전까지 인간이었을, 그런 생명체.
…그래도 챙겨야지. 챙겨야 후회가 안 남을 거다.
태유준은 행주를 펼쳐 식칼을 둘둘 만 다음 배낭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러고는 복도를 걸어 기숙사 앞문까지 왔다. 안토니오와 2인조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다면 잡진 않아. 대신에 돌아올 생각은 말아라.”
“요한….”
“안토니오 형제님. 평화를 빕니다.”
태유준은 안토니오에게만 인사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태유준을 힘껏 껴안았다. 태유준은 안토니오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서 문을 나섰다. 그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쿵. 문이 닫히며 칭칭 쇠사슬로 자물쇠를 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태유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배낭끈을 꽉 쥐었다.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좀비와 일대일로 붙는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나올 때 말이야 자신 있게 했지만 실은 무서웠다. 남들과 동떨어져 오직 혼자 바깥에 나온다는 것이. 이제부터 완벽한 외톨이가 되어 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두려웠다.
그래도 가야지. 저곳에 더 있을 순 없었다. 만약 있다 해도 며칠 정도 질질 시간을 끌며 2인조에 의해 고립당했을 거다. 그럼 좋은 꼴은 못 봤겠지.
생각을 정리한 그는 기숙사 건물에서 정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솨아아-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대끼며 울었다. 나무에 좀비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태유준은 겁이 나 그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죽여야 하기에 태유준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조심히 걸었다. 좀비들은 깊이 잠들었는지 사방이 고요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정문을 빠져나왔다. 바로 앞이 대로변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자. 그럼 이제 장 박사님 연구소가 있는 여의도로 가야지.
그러나 소유한 것이 없는 신분이라 차나 오토바이 같은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보로 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그보다 중간에 좀비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태유준은 이런저런 것을 고민하며 발길을 옮기려 했다.
“헉.”
그때였다. 시커먼 그림자가 태유준 앞에 드리워졌다. 태유준은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멀대 같은 장신에 치렁치렁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괴물이 제 코앞에 서 있었다.
“사, 사람 살…! 으윽.”
칼을 가방 깊숙한 데 넣지 말고 손에 들고 나올걸. 태유준은 강하게 후회했다.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과 죄의식, 장 박사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죽나요. 그렇다면 신이시여. 저를 천국으로 보내 주세요.
태유준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괴물이 말을 했다.
“쉿.”
그러면서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고장 난 가로등 불빛이 괴물, 아니, 사람을 비췄다. 이마에 사선형의 칼자국이 있고, 인상이 싸늘한 남자였다. 태유준은 짧은 시간 남자를 훑었다. 단단한 체격이 꼭 영화에 나오는 파이터 같았다.
“그쪽 이름, 태유준 맞지?”
남자가 카지노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닌데요.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느낌이 영 수상해 일단 발뺌부터 했다. 하지만 남자는 피식 웃으며 품 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빼 들어 태유준에게 보여 주었다. ‘대한 가톨릭 교적부-세례자 요한(태유준)’. 서류에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비롯한 모든 신상 명세와 더불어 증명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태유준 씨 맞잖아. 이렇게 예쁜 얼굴이 흔한 게 아니거든. 신부님.”
“…누구신데요.”
“내 소개가 늦었네. 원혁이라고 해.”
“예. 원혁 씨. 제가 태유준 맞습니다. 맞는데요. 저를 왜 찾아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이 남자 대체 누군데 날 찾아왔지. 좀비가 가득한 이 시국에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무슨 용무로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유준은 상식적으로 남자가 이해 가지 않았다. 꺼림칙하고 무서웠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그는 원혁을 지나쳐 그대로 대로변으로 나서려 했다. 원혁은 딱히 태유준을 물리적으로 막아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말 한마디는 태유준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장준식 박사.”
그의 목소리는 높지도 않았고 흥분한 티도 없었다. 다만 낮고 뚜렷했다. 태유준은 심장이 철렁했다.
저 남자는 과연 누구이길래 장 박사님의 이름을 꺼낸단 말인가.
“장 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바쁘다면 어쩔 수 없고.”
태유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뭔지는 잘 몰라도 이야기해 보죠.”
“밖은 위험하니 내 차로 가서 이야기 나누지. 밤이 되면 행동이 굼떠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차에서 이야기 듣겠습니다.”
“자, 그럼 저리로 가자고.”
원혁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야기를 진행했다. 태유준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찝찝했으나 어쨌든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런데 차가… 어디 있죠?”
원혁이 이끈 곳은 인근의 갓길이었다. ‘맛 좋은 호박고구마’라는 플래카드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트럭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설마 이 트럭은 아니겠지. 남자의 값비싸 보이는 옷차림과 위압적인 외모로 보건대 최소 외제 차를 끌고 다닐 이미지인데.
태유준은 근처에 세워져 있을 비싼 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원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트럭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타.”
그러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태유준은 남자와 차가 몹시 조화롭지 않다 느끼며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고구마 장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