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에필로그 (1)
그로부터 긴 것 같으면서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레오나드의 러트일을 흐지부지 보내 버린 이후 약 반년이 지난 날이며, 평소보다는 좀 더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바로 오늘이 채이와 레오나드가 정식 혼례식을 진행하는 날이란 뜻이었다.
“채이 님, 오늘도 멋지세요! 어쩜 이리 동안이실까?”
“꾸미는 맛이 있다니까.”
“제국 제일 미남과 결혼하게 된 소감이 어떠세요?”
“얘도 참. 당연한 걸 묻네. 아주 좋겠지!”
시종들과 에녹이 꺄르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채이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앞머리를 반쯤 넘겨 평소보다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이 결혼이지…. 아무리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일반적인 연회 때와 다른 준비를 한들 채이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혼인가.’
애초에 두 사람은 아직 각인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각인부터 하고, 혼례식을 올리고, 공식적인 합방으로 이어지는 게 전통 방식인데 말이다. 채이도 그런 풍습을 따라가고자 했고. 한데 레오나드가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가엾은 얼굴로 결혼 의지를 호소해 대서 이렇게 혼례식부터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격식이 없고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지만, 이미 레오나드의 행보가 이례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기 때문에 랭커스터 가에서는 이 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채이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일부 장로들도 채이가 오메가로 재발현하고부터는 물고 늘어질 건더기가 없어 아주 조용했다.
뭐, 어쨌든.
체감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채이는 오늘 들뜬 상태이기는 했다. 페르난데와 벤냑스, 실비에트와 실비에트의 가족들은 물론 레오나드가 특별히 채이의 옛 지인들도 초청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주점 사람들을 아주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어제부터 기사들을 직접 보내, 올 수 있는 사람은 정중히 모셔 오라 해 두었다고 하니 오늘 오전이 지나기 전까지 올 수 있는 지인들은 모두 모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일개 평민들을 귀족의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이었기에 이 또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채이.”
시종들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데 마침 채이를 찾아온 레오나드가 방 안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다. 채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처럼 웃고 말았다. 레오나드는 그 어느 때보다 한껏 들떠 있었다. 어째서일까. 저 등 뒤로 없는 꼬리가 붕붕붕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
“오늘 너무 멋있고 예쁘다, 채이.”
쪼르르 다가온 레오나드가 채이의 이마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아까도 봐 놓고 오랜만에 본 것처럼 반가워하는 모습이 어쩔 수 없이 귀엽게 느껴지는 건, 분명 평생 가도 벗겨지지 않을 콩깍지 때문이리라. 채이는 레오나드의 허리춤을 토닥이며 물었다.
“이렇게 자주 들락날락거려도 되는 거야?”
“안 되죠. 원래 알파 님은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에녹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은근히 레오나드에게 눈치를 주는 말이기도 했다. 레오나드가 채이의 재발현 이후 훨씬 더 유해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전보다 용감해진 에녹이었다. 실제로 레오나드는 채이의 눈 흘김에 멋쩍은 얼굴로만 서 있다가 변명을 덧붙였다.
“말할 것도 있어서 잠시 들렀던 거야.”
“뭔데.”
“채이의 지인들 방금 저택에 도착했대.”
“아.”
그렇다고 하니 얼른 마중을 나가 봐야겠다. 오랜만에 그들을 보려니까 마음이 살짝 떨리기도 했다. 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오나드와 에녹이 함께 따라나섰다. 아쉽지만 레오나드는 먼저 이동해야 했기에 한 번 더 가벼운 버드 키스를 남긴 후 떠났고, 채이는 오닉스 저택 쪽으로 올라오는 지인들을 도중 만나게 되었다.
“채이! 어머, 어떡해. 너무 오랜만이에요!”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 건 요렌테였고 그 옆에서 어색한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주점의 주인장이다. 다소 위축된 채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채이를 발견하고 화색이 도는 주점의 단골 아저씨들도 있었다.
“아이고, 예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네!”
“채이… 아니. 이제는 채이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공자님의 ‘그거’ 된 거잖아? 그럼 채이 님이지.”
아저씨들은 예전처럼 하하하 웃으며 대화하다가 돌연 옆에 있는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편안하게 그들과 대화하려면, 기사들과 에녹에게는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화하게 잠시 자리 좀 비워 줄래?”
“앗, 알겠어요. 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다시 올게요.”
“응. 분수대 쪽에 있을게.”
채이의 뜻을 냉큼 알아차린 에녹이 빠릿빠릿하게 기사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워 주었다. 채이는 그런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주점 지인들과 함께 분수대 쪽으로 내려가며, 그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이어 갔다.
“여기까지 올 때 안 힘들었어요?”
“힘들기는! 마차가 어찌나 안락한지.”
“그런 마차는 살면서 처음 타 봤어.”
“이야. 그렇게 정중하게 대접받는 것도 처음이었지.”
아저씨들이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는 듯, 아까보다 기가 펴진 얼굴로 껄껄 웃었다. 주점 주인장도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함께 웃었다. 벤치가 있는 분수대에 도착한 뒤에는 요렌테가 궁금한 게 많은 눈으로 채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때 그렇게 사라지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편지라도 보내 주셔서 알았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엄청 걱정했을 거예요. 그나저나! 레오나드 공자님하고는 대체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되신 거예요?”
그 눈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음. 그게 좀 복잡한 인연이라….”
채이는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졌다. 한때 자식처럼 키웠던 아이와 이런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건 제 입으로 말하기는 굉장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꼬맹이한테는 관심이 없다’고도 말했었는데… 그보다 나이 차이가 더 많이 나는 레오와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여 낯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채이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자기 딸과 만나 달라 했던 아저씨는 아예 그때 나눈 대화를 까먹은 것도 같았다. 사실 그들이 보기에 그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특히 예쁘고 잘생기고 어린 평민이 신분 높고 나이 많은 귀족의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간혹 있었으니까.
오히려 채이가 나이 어리고, 잘생기고, 견고한 권력과 최고의 직위까지 갖춘 랭커스터 가 아드님의 눈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실의 자리를 꿰찼다는 점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어렵다는 재발현까지 해내지 않았는가. 확실한 신분 상승까지 이루어 냈으니 채이는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다.
“정말 부러워요. 저도 잘생긴 귀족님 한 명만 잡아 봤으면….”
요렌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자기만의 세상 속에 빠져 버렸다. 여전히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 같아서, 채이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생각난 게 있는지 아저씨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채이 님.”
그렇게 꼬박꼬박 ‘님’자를 붙이면서. 채이가 “그냥 예전처럼 채이라고 불러요, 부담스럽네.”라며 말리자 아저씨는 어색하게 웃더니 끊겼던 말을 다시 이었다. 입에 손을 붙이고 소곤소곤 말이다.
“너는 로만 이세프에 대한 이야기 못 들었지?”
“로만? 아… 그 술주정뱅이요?”
생각해 보니 그런 놈도 있었지. 나름대로 추억이다. 물론 좋은 추억은 아니고. 채이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재미있는 소잿거리가 나왔다는 듯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 망나니 녀석 말이야. 갑자기 실종됐다네?”
“실종?”
“맞아! 저도 그 이야기 들었어요. 채이가 랭커스터 가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에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한동안 소문이 무성했죠.”
어느새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온 요렌테도 맞장구를 쳤다. 거기에 주점 주인장은 “실종이 아니라 누군가가 몰래 데리고 가 죽인 거라는 말도 있더라고.”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랑가는 외지인이 많이 드나드는 도시지만 그만큼 토박이는 몇 안 되어서 그들끼리는 모두 안면을 트고 살았기에 변화에 대한 눈치가 빨랐다.
다만 그래 봤자 남의 일이고 나쁜 놈이기도 했다 보니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주점 주인장은 오히려 골칫거리가 사라져 후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놈을 잡아다 족친 거면 원한 살인일 가능성이 높을걸.”
“확실히 원한 살 짓을 많이 하긴 했으니….”
“그놈, 채이한테도 더러운 짓을 하려다가 호되게 당했잖아.”
“음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채이도 그가 어디로 갑자기 사라진 건지 좀 궁금하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흥밋거리는 아니었기에, 로만의 실종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흐지부지 끝나고 있었다.
“채이 님! 슬슬 가셔야 해요!”
마침 에녹이 손을 흔들며 마중을 나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걸 느낀다.
“이만 갑시다.”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난 채이는 뒤따르는 지인들과 함께 혼례식을 치를 그레이트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나드와 랭커스터 가의 가족들, 그리고 페르난데와 벤냑스, 실비에트 가족들까지 모두 거기서 채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