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Behind story
맑은 영혼이 하나 있었다. 올곧고 단단한 정신과 깨끗한 색채를 가진 인간의 영혼…. ‘신’은 그 영혼에게 관심이 생겼다. 전 차원 어디를 둘러봐도 그만큼 맑은 영혼을 가진 인간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런 ‘특별한’ 영혼은 세계수가 하나 가지고 있고, 그 외에도 엘프나 드래곤 따위의 자연과 가까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마련이거늘. 어째서 그 맑은 영혼이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수 있었는지는 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이치대로 굴러가지 않고 그렇기에 흥미로운 것인지라, 신에게 있어서는 이 또한 지루하게 긴 영생에 찾아온 하나의 재미였다.
[오늘은 또 무얼 하고 있으려나.]
그날도 신은 언제나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그 피조물을 관찰했다. 한데, 이게 웬걸. 짧은 삶을 사는 인간이기 때문인지 태어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그 영혼은 이전에 보았던 것과 벌써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환생을 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첫 번째 생에선 속세에서 벗어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제로 더할 나위 없는 깨끗한 삶을 살더니, 두 번째 생은 한 제국을… 친애하는 황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손에 피를 묻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저런 삶을 살아서야 기껏 탄생한 인간의 맑은 영혼에 때가 묻는 것은 시간문제. 신은 걱정스러웠다. 인간은 무척이나 섬세한 피조물이고 그만큼 때가 잘 타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인간은 맑은 영혼으로 태어나기도 힘들뿐더러 유지하기도 힘든 것이고, 저 아까운 영혼도 조만간 더러워지리라 보았다.
하지만 신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손에 수많은 이의 피를 묻히더라도… 사랑했던 황제에게 배신당하는 순간까지도 그 영혼은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드 황제 폐하. 당신이 주는 벌이라면 그게 뭐든 달게 받겠습니다.
저 흔들리지도 않는 올곧은 영혼. 어떻게 저토록 인간이 단단할 수 있는 걸까? 신은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이 점점 그 영혼에게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흥밋거리로 잠깐씩 관찰하던 게 이제는 한시도 그 영혼에게서 눈을 떼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 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영혼을 아주 사랑하고 있었다.
[…아.]
그렇게 맑은 영혼의 두 번째 삶은 감옥에서 끝을 맺었다. 차라리 사랑하던 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길 바랐지만 그 바람조차 이루지 못한 채… 그렇게 말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지막이었다.
신은 통탄스러웠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총 세 번만 환생하기에. 세 번의 삶을 거쳐 죽음과 생을 윤회하고 나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 소멸해 버린다. 즉, 저 영혼에게는 이제 한 번의 환생만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할진대 귀한 두 번째 삶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힘들게 지내다가 끝냈으니 지켜보던 신의 마음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신은 그 어떤 도움도 되어 주지 못했다. 인간들은 ‘신 정도 되면 만능이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신은 오히려 방관자에 가까웠기에. 각자의 운명과 삶의 흐름은 신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이다. 하여 신은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하는 존재였고, 세상에 간섭하는 건 소멸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중죄였다.
머잖아 구천을 떠돌던 맑은 영혼이 다시금 세상에 정착했다.
[이번이 저 아이의 마지막 삶….]
그가 마지막으로 환생한 세계는 지구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름은 ‘권채이’.
신은 그 맑은 영혼이… ‘권채이’가 이번만큼은 마지막 삶답게 행복한 일들을 다 누리다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의 바람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필 권채이가 아직 어리던 시절 그곳에선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변종 바이러스까지 퍼져 인간은 혹독하게 강해져야만 하는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딱하구나.]
아이의 마지막 생은 시작부터 지옥이었다. 아이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기까지 했으니까. 아이의 부모는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괴물처럼 기괴하고 거대해진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짐승에게 반항할 새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권채이는 그 전에 ‘버려졌다’.
권채이의 부모라는 인간들은 방해되는 제 아이를 버리기 위해, 쇠로 만든 상자에 잠들어 있던 아이를 넣고 자물쇠를 걸어 둔 다음 도망갔던 것이다. 그나마 튼튼한 상자에 넣어 두고 떠난 것은 부모로서의 마지막 죄책감이었다.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건 분명 그 죗값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권채이는 튼튼한 상자 안에 가두어진 덕에 괴물들로부터 안전했다. 괴물들이 꺼내 달라, 살려 달라, 소리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시탐탐 상자를 노리긴 했지만 다행히 상자가 부서지기 전에 군인들이 먼저 발견했다. ‘인간 병기’로서 한계까지 훈련받은 특수 군인들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채 나타나 괴물들을 처리하고 상자에 갇혀 울던 아이를 구조해 냈다.
-여기서 소리가 난다! 빨리 열어 봐.
-아직 어린애야… 세상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보호해서 데려간다. 이봐! 이쪽!
그때까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신은 안도했다. 인간의 추악한 일면에 잠시 혀를 내둘렀지만 인간에게는 분명, 일면식 없는 사이에서도 발휘될 수 있는 따스한 온정이 있었다. 그렇게 권채이는 군인들의 손에 거두어졌고 대충 아이의 사정을 알게 된 군인들은 그를 가엾게 여겼다.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들 인간 맞아?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요즘에는 흔한 일이잖아. 전쟁이 끝나 가면 뭐 해, 빌어먹을 변이 바이러스 때문에… 지금도 비안전 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일 거라고. 자기 몸 하나 간수 못 하는데 아이를 챙길 여력이 어디 있었겠어. 생각 못 할 것도 아니지.
-뭐?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착한 소리만 한다고 다가 아니란 걸 알아 둬. 너 그거 기만이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권채이를 구조해 낸 인물 중 두 명이 의견 차이로 싸움이 났다. 그러는 동안 이번 파견 조의 리더인 한 사내가 권채이와 눈높이를 맞춰 쭈그려 앉았다.
-너 이름이 뭐지?
-…권채이요.
-그래. 채이는…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니.
-…….
아이에게는 제법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신은 분노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들이 저 아이가 타락하게끔, 저 맑은 영혼에 때가 묻게끔 만들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번에도 괜한 걱정이었다. 아이는… 많은 상처를 안아 왔을 그 영혼은 그럼에도 단단하고 맑았다.
-미워요. 그래도… 원망하진 않으려고요.
이후 아이는 군에 들어가기를 본인이 스스로 선택했다. 어린 나이일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견디고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훌륭한 인간 병기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정부는 몇 년 동안 그를 국경 최전선에 세워 두었다. 백신이 만들어지고 널리 쓰여 안전 구역이 점점 커지고, 그렇게 예전의 삶을 조금씩 되찾아 갈 때까지 그의 고군분투는 계속되었다.
-채이야. 자 봐, 눈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다. 눈을 단단하게 뭉쳐서!
-너무 큰 거 아닙니까? 크기는 적당한 게 잘 날아갈 텐데.
-푸하하! 야, 그치! 채이야! 거봐, 내가 뭐라고 했냐. 넌 너무 무식하게 만든다고 했잖아. 그렇게 크게 만든다고 맨날 쓸데없이 힘쓰니까 얼굴에다 얻어맞지.
-아씨 이것들이….
그 과정에서 그는 소중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가 그 소중한 선후배와 친했던 동료를 몇이나 눈앞에서 잃어 갔는지 전부 셀 수도 없다.
-권채이. 넌 꼭 살아라.
-조금이라도 젊은 놈이 더 오래 살아야지.
소중한 것을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악착같이 구르며 한창때인 20대를 전부 흘려보냈다. 신은 마치 꺾고 부러트려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를 보는 듯하여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그의 치열했던 노력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30대 후반에 이르는 나이가 되어서야 국가 유공자로서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상을 만끽했다. 그의 번듯한 외모는 여럿의 눈길을 사로잡았기에 인기도 얻었다. 본인이 그런 ‘평범한’ 삶을 지내 본 적이 없어서 즐기는 법도 잘 모르고 눈치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제는 정말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는 거겠지?]
신은 권채이의 평안한 일상에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찝찝했다. 그의 마지막 운명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영 불안한 탓이었다. 지금까지 잘 가다 시궁창에 빠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한 생명체의 미래를 사사로운 목적으로 엿보면 안 됐다. 그러나 신은 결국 호기심과 불안을 떨쳐 내지 못하고 권채이가 겪게 될 미래의 죽음을 엿보았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드디어 한 달이 넘는 제대로 된 휴가를 받게 되어 ‘존재하기만 하는’ 수준이던 자신의 작은 집으로 돌아간 날… 그로부터 며칠 뒤, 제동 장치가 고장 나 멈추지 않는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다가 자신이 대신 깔려서 고통받다 맞는 죽음이라니.
그런 허무한 죽음이라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신은 처음으로 무능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인간에게 정을 주고 만 자기 자신이 가엾게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으며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신이 세상에 사사로이 간섭하는 건 중죄라 했던가.]
그렇다면 그 죄를 달게 받으리라.
[강제로 간섭하면 내 격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오겠지.]
그렇다면 소멸까지도 각오할 것이다.
[기왕 소멸할 거라면 저지를 수 있는 건 다 저지르고 갈까.]
세상 아래 생명체들은 세 번 이상의 삶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신은 자신이 사랑한 영혼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아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 영혼이 두 번째 삶에서 한 번만 더 만나 보길 바랐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미래 지식과 기연을 그에게 심어 주어 혹시 모를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기로 했다.
신은 권채이가 휴가를 받아 자신의 집으로 내려간 당일, 인간의 껍데기를 입은 채 그를 찾아갔다. 어차피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자신에 대한 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에게 ‘친구’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오랜만이다, 권채이.”
그 살가운 인사에 처음에는 누구인가 싶은 얼굴로 쳐다보던 권채이는 이내 신을 ‘친구’라고 인지했다.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관계였지만 그걸로도 족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처음이자 마지막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있잖아.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