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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102화 (102/105)
  • 102화

    그이는 바로 델리온이었다. 레오나드가 채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에 어찌 되었나 슬쩍 확인하러 오닉스 저택까지 들른 것이었다. 다만 채이와 이렇게 맞닥뜨리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기에 복도로 올라가다 말고 당황하여 주춤 멈춰 서고 말았다.

    채이도 갑자기 거기서 델리온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다. 단번에 서로가 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여 채이도 델리온도 이 상황에서는 어떤 반응을 하면 좋으려나, 생각하고 있을 무렵… 에녹이 가장 먼저 행동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아주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채이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복도를 지나가면서 델리온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이고 떠나 버린 에녹이다. 졸지에 남은 두 사람은 오히려 더 어색해져 있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결국 채이가 먼저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질문까지 받아 버렸는데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인지라, 델리온은 머쓱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채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갔다. 동시에 채이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페로몬의 향을 감지하고 일이 잘 풀렸음을 깨달았으나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음. 레오나드의 상태를 확인만 좀 하려고 잠시….”

    “아. 지금 자고 있어요. 일 때문에 피곤했나 봅니다.”

    일 때문이 아니었을 텐데.

    델리온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아 냈다.

    “괜찮다면… 다행이군.”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려니 너무도 상황이 어색했다. 일단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어야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채이는 좀 더 말을 붙이고자 했다. 이럴 때는 역시, 사사로운 대화를 해야겠지. 그러나 생각과 달리 채이의 입에서는 평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것이 나오고 말았다.

    “어릴 때도 그런 다정한 관심이 필요했을 겁니다. 레오는.”

    뾰족한 말이 되어서.

    “…….”

    델리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면목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탓일까. 쌓아 두었던 둑이 넘어지면서 불쑥 차올랐던 울컥함이 조금 사그라졌다.

    짧고도 길게 느껴지는 침묵.

    잠시 후 떳떳하지 못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던 델리온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분명 그 말이 맞을 거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태도였다.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죄책감이 비치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게 바로 인정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지라 채이는 더욱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뒤늦게 후회하실 거면 왜 그러셨나요.”

    채이의 물음에 델리온은 이번에도 오랫동안 침묵했다. 채이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나 델리온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웃어른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잠시 뒤 델리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 일을 후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나도 안다. 경멸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거.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던 게야.”

    채이가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하자 델리온도 마치 거기에 이끌린 것처럼 어디 가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랭커스터 가의 규율은 무척이나 낡았지. 하지만 자식들은 그러한 규율로부터 벗어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러도록 엄격하게 교육받기 때문이야. 그리고 승계 싸움에서 패배한 ‘실패자’들은 대부분 승리한 후계자의 손에 죽어 전리품으로서 희생되었다. 혹은 동정을 사서 내쫓기거나, 평생을 본가에 충실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방계가 되었지.”

    잠깐의 침묵 후 다시 델리온의 말은 이어졌다.

    “그런 악습에 변화가 생겼던 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전대 가주… 내 아버지 때부터였다. 아마 날이 갈수록 방계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전대 가주는 나와 형제들에게 ‘후계 싸움 때문에 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권을 줬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어.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게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나도 형제들의 시체 더미를 밟고 이 자리에 올라섰다. 실패자에 대한 배척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것이었지.”

    그때 땅만 내려다보고 있던 델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어리던 레오나드를 내쫓았다. 9살이 되도록 발현도 하지 못한 아이가 같은 핏줄로 태어났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언젠가는 내 발목을 잡을 거라고 생각해서. 베넷은… 나 때문에, 그리고 랭커스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

    담담하게 과거의 모든 걸 토로하는 그의 눈에 미안함을 닮은 감정이 감돈다. 그는 레오나드를 ‘처분하겠다’ 말했을 때 눈물을 꾹 참던 베넷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업보로 레오나드와 말 한마디 살갑게 섞지 못하는 베넷이, 델리온은 안타깝고 또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내쫓았던 아이가… 장성하여 돌아왔을 때는 솔직히 섬뜩했었다. 마치 내 목 앞에다 칼을 둔 것만 같더군.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려 들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가. 그런 주제에 한다는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아나?”

    델리온이 입꼬리 끝을 슬쩍 올리며 쓰게 웃었다.

    “‘당신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수고할 생각은 없다’였다. 그리고, 나와 일가족의 목이 붙어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어떤 한 사람 덕분이니 고마워하라고…. 그 어떤 한 사람이 바로 자네였겠지.”

    그건 일전에 채이가 오스카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의 일부였다. 델리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금 본래 하고 있던 주제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레오나드는 우성 알파로 발현해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게 후계자로서의 덕목도 쌓았고… 끝내 실패자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에일런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조차도 레오나드는 규율을 따라가길 거부했다. 그 결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승계 싸움이 되었지.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문득 생각하게 되더군. 내가 했던 일이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 하고 말이야.”

    “…….”

    “그때서야 후회를 느꼈다. 내가 저질렀던 모든 일들… 그리고 레오나드에게 저지르고 만 모든 만행들에 대한 후회를 말이야. 내 선택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내 모든 걸 부정하는 건 역시 괴롭더군. 하지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이제 랭커스터는 그 녀석이 알아서 잘 이끌어 갈 테니.”

    채이도 이렇게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는가. 레오나드는 앞으로 원하는 대로 랭커스터를 바꾸어 갈 것이었다. 거기에 델리온은 없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

    채이 또한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기에 물었다.

    “레오랑 화해는 안 하실 겁니까?”

    그에 델리온은 주저하더니 이마를 짚으며 난색을 표했다. 설마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미 늦었다.”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라 채이는 김새는 듯한 웃음을 뱉어 내고 말았다.

    “에일런이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무슨 말인가?”

    “에일런도 자기가 레오랑 화해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그랬거든요.”

    델리온이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침묵했다. 채이는 그런 델리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그때 제가 에일런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시나요.”라고. 그러자 델리온은 가만히 대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채이를 바라보았다. 채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였습니다.”

    채이를 담은 델리온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는 자기 손을 주물거리며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한때는 가문의 오랜 악습이 만들어 낸 괴물이었으나… 그도 결국 알맹이는 평범하게 서투른 아버지일 뿐이었다.

    “정말 그럴까.”

    “노력한다면요.”

    “…그래. 고맙다.”

    이후로도 중얼거리듯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더 이어 하던 델리온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많이 빼앗아 버린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다’며 저택을 나갔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간 채이는 어딘가 후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곤히 잠든 레오나드의 옆자리를 슬쩍 차지한 채 잠들었던 채이가 일찍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레오나드를 확인했는데 밤새 약간 뒤척인 것 말고는 푹 잠들었던 건지 얌전하게 잘 자고 있었다.

    채이는 레오나드를 좀 더 재우려고 조용히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그사이 깨 버린 레오나드가 채이의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긴 것이다.

    “채이… 어디 또 몰래 가려고.”

    목소리가 아직 잠에 취해서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한다는 소리가 제법 발칙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어 버린 채이는 레오나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다시 자세를 고쳐 누웠다.

    다 크고 나서는 이렇게까지 느슨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레오나드를 보는 기분이 새로웠다. 그만큼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고 있다가 긴장이 풀렸다는 거겠지.

    “너 깨울까 봐 조용히 일어나려고 그랬던 거야.”

    “나… 언제 잠들었어?”

    “어제 페로몬 제어하는 법 얘기하다가 잠들었잖아.”

    “아….”

    그러고 무어라 웅얼거리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키득거리며 웃은 채이가 레오나드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 “조금 더 자.” 하며 등을 토닥여 주자 레오나드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채이는 문득 깨달았다. 레오에게 자신이 ‘그 말’을 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그건 낯부끄러워서 입에 담기 너무 머쓱했지만 그래도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이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

    “으응.”

    채이는 눈을 감은 채 반쯤 자고 있는 레오나드 위로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자 껌벅껌벅 눈을 뜬 레오나드가 채이를 올려다보았다.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라 괜히 웃겼다.

    “한 번만 더.”

    “사랑해.”

    “…한 번만 더.”

    “뭐야. 한 번 더 해 줬잖니.”

    “잠 깨기에는 모자란데.”

    “됐으니까 더 주무세요.”

    부끄러웠던 채이가 그렇게 핀잔을 줄 때였다. 잠이 거의 다 깼는지 장난기가 도는 레오나드의 눈이 예쁘게 반달을 그렸다. 그러더니 아침부터 난데없는 뽀뽀 귀신이 되어 채이를 괴롭히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할 터였다. 앞으로도 계속.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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