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채이를 움켜쥐려 했던 레오나드의 손이 흠칫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채이에게서 낯설고 짙은 향이 느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바닐라 향과 아주 비슷했는데, 그 향은 채이의 포근한 체향과도 닮아 있었다.
이 향의 정체는 뭘까.
상황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레오나드가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채이는 그런 레오나드에게 어디선가 들고 온 종이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건… 향 종이였다. 그것도, 분홍과 살구가 섞인 색깔로 물들어 있는 향 종이.
“너 어릴 때 샀던 향 종이 말이야. 그때 안 쓰고 남은 게 한 장 있었거든. 아까워서 보관해 두고 있다가 저택으로 올 때 혹시 줄 사람 있을까 싶어서 가져왔던 건데… 설마 내가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음, 어쨌든. 그렇게 됐는데.”
채이가 머쓱한 눈치로 웃었다.
몇 분 전, 발현 현상을 재빠르게 눈치챘던 그는 곧장 방으로 돌아가 보관함 구석에 넣어 둔 채 잊고 있었던 향 종이로 확실히 확인을 한 뒤 방금 막 레오나드를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그간 골머리를 썩게끔 만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된 거니 레오나드도 분명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예상과 달리 레오나드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에 채이는 ‘나만 너무 어린애처럼 들뜨고 말았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때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던 레오나드가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줄 떨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채이로서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던지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레오! 너 왜 그래?”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었던 채이는 얼른 다가가 레오나드를 일으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제게로 뻗어 온 채이의 팔을 그대로 당겨 부드럽게 끌어 내렸다. 절로 허리를 수그리게 된 채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레오나드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었다.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와 함께, 아직 제어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채이의 달콤한 페로몬 향이 울렁거렸다.
“…레오?”
이내 레오나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자 채이는 상당히 걱정스럽다는 눈치로 레오나드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레오나드의 정신을 쏙 빼놓은 원흉이 바로 채이 본인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채이는 레오나드가 ‘잠깐 사라졌던’ 자신 때문에 온갖 극단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몸 안 좋니? 러트 때문에 그래?”
레오나드가 제 팔을 붙든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이질 않길래 채이도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마침 자신이 안정제를 먹어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린 레오나드가 몽롱한 눈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채이. 나… 안정제 먹어 버렸어.”
“응? 그래?”
“응. 안정제를 먹으면 각인이 되지 않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버틸 걸 그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다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채이를 눈앞에 두고 보니,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채이는 누구보다 이날을 기다렸다던 레오나드가 그 잠깐 사이 약을 먹어 버렸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느긋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은근한 기대감도 분명 있었지만, 미지의 경험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뭐.”
“…그런데 채이. 방에서는 어떻게 나갔던 거야?”
“아, 음. 그게…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레오나드가 자신의 탈출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음을 깨달은 채이는 ‘실비에트에게 불똥이 튀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다 일단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진이 다 빠진 탓인지 평소보다 더 순둥순둥해진 레오나드는 얌전하게 채이를 따랐다.
그날 채이는 레오나드에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무리하게 빠져나갔던 이유를 에둘러 설명하면서 그를 이해시켰고, 고분고분하게 납득한 레오나드도 미안하다며 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사실 레오나드는 채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길 바라여 그에게 맞춰 주고 있는 거였지만… 채이의 눈에는 그저 기특해 보일 뿐이었다.
“채이… 걱정했어. 방에 없어서.”
“나도 미안해. 걱정을 끼쳐 버렸네.”
채이는 제 품에 안겨, 꼭 삐진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투정 부리는 레오나드의 등을 쓸어 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안겨 있나 싶더니 조금 더 밀착하여 끌어안은 레오나드가 채이의 목에 입술을 맞추었다. 간지러워서 살짝 움츠러들자 레오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채이를 바라보았다.
“채이. 페로몬 아직 제어하기 힘든 거야?”
“왜? 냄새 많이 나? 사실 제어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
레오나드를 살짝 떼어 놓은 채이가 제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부터 알파나 오메가였던 발현자들은 자연스럽게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향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채이에게는 그 모든 게 어색해 보여서… 레오나드는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얼른 제어하는 법 터득해야겠다, 채이.”
다른 사람과는 채이의 향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오나드의 그런 엉큼한 생각을 알아채지 못한 채이는 제 몸에서 나는 페로몬 냄새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돌려 말한 줄 알고, 괜히 미안해하는 중이었다.
“어쩌지.”
“페로몬은 감정에 많이 흔들리니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봐.”
레오나드가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눕히며 말했다.
채이는 냉큼 그의 말대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페로몬에 좀 더 집중하자 어쩐지,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알 것도 같다. 우선은 감정과 페로몬을 떼어 놓듯이 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감을 잡고 나니 앞으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페로몬을 최대한 갈무리하는 데 성공한 채이가 뿌듯한 얼굴로 레오나드를 돌아봤을 때였다.
“…레오?”
레오나드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또 자는 척인가 싶어서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와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일정하다. 그는 정말 잠든 것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레오나드의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일 많다고 하더니 그거 때문에 피곤했나?’
평소에도 물론 예쁜 녀석이었지만 이리 자는 모습을 보니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보니 아직 어릴 때의 귀여운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게 웃은 채이가 레오나드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마침 상황을 살피러 온 에녹이 문 안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나 레오나드가 깰까 봐 채이는 조용히 일어나 에녹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채이 님! 걱정했어요.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해서….”
에녹이 목소리를 낮추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딘가 십년감수했다는 얼굴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미안.” 하고 사과한 채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동안, 에녹은 뒤늦게 이변을 느끼고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점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엇!”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만 에녹이 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가 다시 반응했다.
“채, 채이 님! 그… 페로몬인 거… 맞죠?!”
그에 채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에녹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타이밍이 정말 잘 맞았다며 이 정도면 신이 도운 거 아니냐고 떠들어 대기도 했다.
신이 도운 거 아니냐… 인가.
확실히 채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발현한 타이밍이 참 절묘했다.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더니만,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선물이라도 받듯 이리 발현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신께서 친애했던 아이야.
문득 꿈으로 나타났던 세계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결국 세계수가 했던 말의 의미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세계수는 그때 한번 꿈으로 나타난 것 말곤 조용했기 때문에.
“신이라는 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을 뱉고 말았다. 그 말을 질문으로 알아들은 에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턱을 짚더니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채이는 그걸로도 충분했는데 의외의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신이 정말 있는진 저도 모르겠지만 그런 속설은 있어요. 세계수는 신이 처음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뿌리내리도록 한 생명이라는 이야기. 누군가가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나무를 처음 발견한 후 만들어 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엘프들의 어떤 이야기가 부풀려져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요.”
썩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물론 에녹의 말마따나 만들어졌거나 부풀려져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축하드려요, 채이 님. 이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네요!”
“고마워.”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해 주는 에녹을 보고 채이도 작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에녹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던가. 아직 작고 어린 소년이었지만 믿을 수 있고 듬직한 친구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 에녹.”
채이가 진심을 담아 전했다.
에녹은 평소답지 않은 채이의 반응에 수줍고 멋쩍어했다.
“왜 헤어질 것처럼 말씀하셔요. 전 계속 채이 님 곁에 있을 건데.”
“그렇게 들렸니? 미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어.”
“네! 앞으로도 열심히 곁에서 보필해 드릴게요!”
그때였다. 계단 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잠시 멈춘 에녹과 채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모습을 드러낸 건… 상당히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