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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99화 (99/105)

099화

그때였다.

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아 한숨을 쉬다 말고 고개를 든 채이가 귀를 기울였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레오나드가 문 앞에 병사를 세워 두고 간 게 분명했다.

“저기요.”

채이는 문에 가까이 기댄 채, 침묵하고 있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예상한 대로 그 병사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마 레오나드에게 ‘절대 열어 주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 문 뜯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예, 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듯 문 너머에서 당황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헙’ 하고 입을 틀어막는 소리도 들린다.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이름 모를 병사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지는 듯했다.

“이 문, 제가 뜯고 나가면 그쪽은 어떻게 되냐 묻는 겁니다.”

“안 됩니다… 살려 주세요….”

음. 역시 으름장을 놓고 간 건가.

‘정말이지.’

이래서야 죄 없는 병사에게 불똥이 튈까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다. 말로 좀 혼쭐내는 것보다 더하기야 하겠냐마는… 어쨌든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원치 않게 끼어 혼이 나는 거니까. 물론 레오나드가 그걸 노리고 일부러 인질 삼아 병사를 세워 두고 간 것이란 사실까지는 제아무리 채이라도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흠.”

다시 침대로 돌아가 털썩 걸터앉은 채이는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뒷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터였다. 실제로 지금까지 ‘혼자였을 때’는 항상 그렇게 했었고. 하지만 이번 일은 레오나드와도 밀접하게 엮여 있는 문제였다. 특히 그는 종종 브레이크 없이 나가 버리려 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라도 그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았다.

‘나와 레오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장로들이 건더기를 물려고 눈에다 불을 켠 상태일 텐데.’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지금 당장 각인을 하는 건 좋지 않은 판단인 듯하다.

‘일단 레오를 진정시켜야 해.’

하지만 자신은 방에 갇히고 말았다. 이래서야 레오나드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미 똥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레오나드에게 다시 설득을 시도해 봤자 콩알도 안 먹히리라는 건 누구보다 채이가 제일 잘 알기에 ‘되돌아온 레오나드를 설득해 본다’는 선택지에도 넣지 않은 상태였다.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는 채이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퍼뜩 고개를 든 채이가 벽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방 안으로 훅 불어온다. 잘 살펴보니 창틀은 성인 남성 하나는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물론 높이가 있어서, 무작정 아래로 뛰어내리는 건 불가능. 하지만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여기가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

창밖을 둘러본 채이는 이내 서랍 속에 보관해 둔 것을 꺼내었다. 그건 바로 엘프들과 교전하던 당시 실비에트에게 받아 두었던 공명의 피리였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며 주고 갔기에 지금까지 고이 보관하고 있던 거였다.

‘실비를 조용히 불러올 수 있으려나?’

공명의 피리로 실비를 조용히 불러서 실비의 도움으로 저택을 빠져나간다.

채이의 계획은 그러했다.

도중에 들킬 위험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지금은 해가 다 져서 어두컴컴한 시간이기 때문에 ‘꾀’만 잘 쓴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물론, 실비에트가 그러한 채이의 생각을 알아채고 와야겠지만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채이는 ‘음. 일단 해 보지 뭐.’ 하고 공명의 피리를 불었다. 고집불통 레오나드의 되바라진 행동에 대한 약간의 반발심도 생긴 상태였기에 채이의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휘릭.

피리를 불자 저번처럼 맑고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고 몇십 분을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것 같다.

뒤늦게야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지금 실비에트는 자기 집에 있을 텐데 여기서 거기까지 피리 소리가 닿을 수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저번에… 실비에트의 가족들이 사는 레어에 직접 가 보니 컴베스트까지의 거리가 상당했으니까. 뭐, 돌아올 때는 실비에트의 도움을 받아 날아온 덕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긴 했었지만.

‘안 들렸으려나? 들렸어도 도착하려면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

그가 제때 오지 못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 커튼이라도 뜯어서 묶은 다음에 밧줄 대용으로 내려 볼까?’

커튼 쪼가리가 제 무게를 견디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낙법을 이용해서 착지만 잘하면 크게 다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채이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창밖을 내다보기 위해 위로 밀어서 올려 두었던 창문을 누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홱 드니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무언가의 노란 눈과 마주쳤다. 잘 보니 그 실루엣은 실비에트였다.

“실비…!”

“채이, 괜찮은 거지?”

채이가 뒤로 물러나 비켜 주니 빙글 돌아서 창틀 위로 착지한 실비에트가 슬쩍 안으로 들어오며 거칠어져 있던 숨을 골랐다. 혹여 누가 이야기를 들을까 싶었는지 목소리도 작게 낮추었다.

실비에트는 채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도 이런 늦은 시간에 자신을 불렀을 리 없다고 생각하여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접근해 온 상태였다. 다행히 드래곤들은 기척을 감추는 것에 능했고 일부러 뒤쪽으로 돌아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와.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반면 실비에트를 오랜만에 봤다는 반가움에 채이는 자신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도 깜박 잊고 기뻐했다. 잠깐 못 본 사이 훨씬 더 늠름해진 것 같다. 채이가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하며 끌어안으니 실비에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좋다고 안겼다.

“그보다 채이. 무슨 일로 불렀던 거야?”

“아.”

그제야 현재의 상황을 다시금 상기한 채이가 표정을 굳히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본 실비에트도 조금 긴장한 채 집중했다.

“본론부터 말하면 레오랑 말다툼을 좀 했어.”

“뭐?”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이야기해 줄 테니까.”

그러고는 창문으로 나가야 한다며 조용히 실비에트를 불렀다.

실비에트는 그러한 채이의 부탁에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레오나드가 채이랑 말다툼을 했다니?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져 줄 것처럼 굴어서, 둘 사이에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실비에트의 의문은 곧 풀렸다. 채이를 등에 태우고 저택을 몰래 빠져나가 하늘을 나는 동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채이가 해 주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 이해한 까닭이었다.

‘난 또 뭐라고. 결국 사랑싸움이었네.’

어쩐지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쭉 풀리는 기분을 느낀 실비에트였다. 물론 그와 별개로 채이도, 레오나드도 그럴 만하다 싶었다. 레오나드는 채이가 계속 회피한다고 생각하여 울컥했을 것이고, 채이는 레오나드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질 않으려고 한다 생각하여 답답할 것이니.

실비에트는 저택에서 상당히 멀어진 위치까지 날며 물었다.

“그럼 그 못된 장로들 내가 전부 다 처리해 줄까? 몰래.”

“실비.”

“아, 아니. 나는 외부자니까. 차라리 괜찮지 않나 싶어서.”

실비에트의 등을 쏘아보는 채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여간 레오나드도 그렇고, 실비에트도 그렇고… 왜 ‘다 죽여 버릴까?’로 가볍게 통일이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채이도 레오나드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있다면 기꺼이 손을 더럽힐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선택이었다.

사이는 안 좋으면서 이런 데선 생각이 비슷하다니까. 채이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그의 매서운 시선을 등 뒤로 느낀 실비에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크게 선회했다.

“그보다 채이.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오늘 아예 안 돌아가려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면 레오나드가 화낼 것 같은데…. 그 녀석이라면 분명, 채이가 사라진 거 알자마자 엄청 찾을걸.”

“음.”

“뭣하면 내가 같이 가서 그 녀석 설득해 줄까? 어쩌면 재발현의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관련 문서가 없는지 나도 찾아보게. 내가 생각해도 제일 평화롭게 이 갈등을 끝내려면 채이가 오메가라는 걸로 바뀌어야 할 거 같아.”

그렇겠지. 실비에트의 말대로다. 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발현의 확률을 높일 방법이 따로 더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아무튼 지금은 실비에트와 함께 설득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고마워. 우리가 나온 지 얼마나 됐지?”

“나온 지 아마 2시간 가까이는 된 거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구나… 찾고 있겠다. 돌아가자.”

“응!”

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실비에트가 하늘을 한번 크게 돈다. 그러고서 저택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잠시. 별안간 실비에트는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참, 근데 채이. 오늘 뭐 달달한 거 먹었어?”

앞뒤 없이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응? 아니. 그런 건 안 먹었는데… 왜?”

“그래? 아까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더라고. 채이한테서.”

실비에트가 채이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어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바닐라 과자랑 비슷한 거 같기도… 포근하고 달달한 냄새인데.” 하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바닐라 과자를 정말로 많이 먹었다고 한들 몸에서까지 그런 냄새가 진하게 날 리는 없었으니까. 소스를 온몸에 뿌리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그 순간이었다.

‘아.’

머릿속으로 레오나드가 첫 발현하던 당시의 일이 떠올랐고.

‘…설마.’

가능성 하나를 떠올린 채이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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