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일주일 정도 남았던가?”
에녹은 날짜를 가늠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하는 대신 시선을 내리뜬 채이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 두고서 상념에 잠겼다. 이제는 정말… 레오나드와의 각인을 어찌하면 좋을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찻잔의 손잡이를 엄지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자 에녹이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는 눈치를 보았다.
“채이 님? 괜찮으신가요?”
그에 잠시 뜸을 들인 채이가 자신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했고.
“이대로 오메가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에녹은 그 고민을 듣자마자 단번에 채이의 심정을 이해했다.
안타까웠다.
레오나드와 채이가 마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지도 어언 5개월. 그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붙어 다녔던가. 채이가 레오나드의 흥분 페로몬에 노출되는 일은 충분할 정도로 많았다. 레오나드가 10년 넘게 묵혀 온 감정은 곧 365일 발정기인 것처럼 발딱발딱하게 만들기 일쑤였으니까.
그럼에도 채이에게서 전조 증상 등의 이변은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자신은 오메가가 될 수 없는 체질이었던 걸까? 채이가 그런 불안과 실망을 가지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베타인 채로도 괜찮지 않겠느냐, 할 것이다. 아니. 레오나드라면 누구보다 단호하게 그리 이야기할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방계 장로들이 이때다 싶어 후계자 자격 미달을 들먹일 수도 있고, 아예 쫓아내려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결정에 따라 순순히 나간다고 한들 이후가 과연 평화로울까? 심하면 매일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노출된단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반대로 레오나드가 반발하고 나서는 자들을 힘으로 강제하여 찍어 누를 가능성도 있겠지만-사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쪽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렇게 되면 가신들의 가문에서도 말이 나올 수 있고, 어떻게든 피를 봐야 했다.
“나는… 레오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채이도 귀족들의 알력 다툼에 빠삭한 건 아니나 자신이 베타로 남는 일이 레오나드에게 ‘방해’가 될 수 있음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채이 님….”
에녹은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지 몰라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도움이 되고 싶으나 이번 문제만큼은 그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노력보다는 운이 따라 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러트가 오기까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어요. 이번 러트일이 안 되면, 다음 러트일도 있고… 아무튼. 벌써부터 포기하긴 이르잖아요! 그동안 레오나드 공자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 보시는 건 어떤가요?”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말뿐이다. 채이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슬픈 에녹이었다. 그리고 그런 에녹의 다정한 마음씨와 공감을 눈치챈 채이는 화사하게 웃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엿본 것만으로도 마음 안쪽이 푸근해졌다.
“고마워, 에녹. 네 말대로 해 볼게.”
그렇게… 해가 다 떨어지고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느라 식당에서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그날 채이는 레오나드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평소처럼 메인 하우스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신이 에녹에게 답했던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레오나드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자신의 손을 잡은 채 머뭇거리는 채이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채이. 왜?”
하지만 레오나드의 물음에도 채이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하면서 입만 오물거렸다. 레오나드는 혹시 채이가 자신과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생각했고,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드는 듯한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는 저 오물거리는 예쁜 입술을 집어삼켜 빨지 않곤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채이의 입에서 이유가 나오기 전, 레오나드는 그의 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포개었다. 가까워진 숨이 섞여 든다. 페로몬도 아닌 것이… 맡을수록 편안해지는 채이의 체향에 중독될 것만 같았다.
채이의 입술이 열리길 바라는 것처럼, 레오나드가 그의 말캉한 아랫입술을 물고 핥았다. 그러자 큰 저항 없이 입술이 열렸고 그 사이로 침범한 레오나드는 음미하듯 채이의 혀를 빨아들였다. 여전히 키스가 서툴러 뚝딱거리는 채이였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을 느낄 때마다 채이를 향한 소유욕이 범람하여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졌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뺨을 발그스름하게 데운 채이가 눈을 반개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앞의 이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거의 자식처럼 키웠던 사내임을 까먹게 되고는 했다. 이렇게 색정적이어도 되는 걸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레오나드가 넘쳐흐르는 감정을 인내심으로 꾹 억누르길 잠시….
“음, 그. 레오.”
시선을 또르르 떨군 채이가 잠시 머뭇거리며 레오나드의 두 팔뚝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상태로 팔뚝을 문질문질, 쓸어 만지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레오나드의 눈동자에 비친 채이의 얼굴은 수줍어 보였다.
“혹시 내일 바쁘지 않다면… 자고 가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드는 보기 드물게 동요했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자고 가라니. 채이가 설마 이런 말을 먼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레오나드의 머릿속에선 벌써 ‘이것부터 저것까지’… 앞으로 일어나리라 가정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안 돼?”
레오나드가 아무 말도 못한 채 서 있으려니 그걸 곤란하다는 표현으로 착각한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이대로 날려 먹을 수 없었던 레오나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당연히 되지. 시간 괜찮아. 자고 갈래.”
“그래? 좋아. 그럼 올라가자.”
대답을 받아 낸 채이는 들뜬 얼굴로 레오나드의 손을 맞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함께 채이의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레오나드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누구도 아닌 채이니까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머리 한편에 존재했지만… 그는 이미 채이의 아찔한 유혹에 당해서 정신이 쏙 빠져 버린 상태라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았다.
채이의 한 마디 두 마디에 레오나드는 이토록이나 휘둘리고 있었다.
“요즘은 밤 되면 좀 싸늘하네. 레오, 먼저 씻을래?”
“…응.”
“그동안 침대 덥혀 놓을게. 다녀와.”
“…응.”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분고분 대답한 레오나드가 욕실로 향하고, 채이는 침대 덥히는 도구로 이불을 따뜻하게 만들면서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욕실에서 나오는 레오나드를 확인한 채이는 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이만 씻으러 들어갔다.
끼리릭.
따뜻한 물을 틀자 금방 욕실 안으로 수증기가 차오른다.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느긋이 씻는 걸 좋아하지만 특히 쌀쌀해지는 이맘때쯤, 따뜻한 물로 씻으면 그렇게 기분이 녹녹하니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씻고 밖으로 나오니 후끈후끈한 열기가 싸늘한 공기와 맞닿아 기분이 좋았다.
채이는 머리를 잘 말린 후 가운을 챙겨 입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그 기척에, 먼저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무언가의 기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채이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채이의 ‘자고 가라’는 말은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자고 가라는 의미였으므로.
그때 레오나드가 자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다가간 채이는 옆으로 조금 더 옮겨 간 레오나드의 옆자리에 털썩 누웠다. 레오나드는 물기 어린 채이의 체향에 집중하다 매끈한 그의 이마 위에다가 쪽 입을 맞추었다.
그즈음 채이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우리 이런 관계가 된 지도 꽤 됐잖아.”
“그렇지.”
“그런데… 재발현의 징조가 안 보이니까 걱정된다고 내가 에녹한테 투정을 좀 부렸거든. 그랬더니 에녹이 좀 더 많은 시간을 너랑 같이 보내보는 게 어떠냐 하더라.”
그건 레오나드를 오늘 밤 구태여 붙잡게 된 이유이자 경위였다.
레오나드의 시선이 채이에게로 떨어졌다. 채이는 힐끔 눈을 굴려 레오나드를 쳐다봤다가 이내 그의 너른 가슴팍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누웠다. 그리고는 슬쩍 레오나드의 허리에 팔을 두르듯이 얹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러고 잘게.”
채이 나름대로 힘내서 나간 진도였다.
“…이러고 자기만 한다고?”
물론 레오나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응? 그럼 뭘 더 해야 하는데?”
고개를 든 채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오나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모르는 척 내숭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골 때리는 일이었다.
역시 채이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레오나드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채이, 나 이러고는 그냥 못 자.”
“왜?”
뭔가 문제라도 있나? 채이가 조금 더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눈을 둥글게 떴다. 레오나드는 제 얼굴을 감추고 있던 손을 조용히 떼어 내며 채이와 눈을 마주했다. 깊이 잠긴 눈동자는 꼭 심해를 보는 듯했다.
“…섰어.”
채이가 그 눈동자에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마음에 걸리는 말이 들려왔다. 레오나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뭐가 섰다는 건지 순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채이는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레오나드가 채이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서로의 배가 밀착할 만큼 가까워지니 자연스럽게 다리가 얽혔다. 그리고.
“어….”
허벅지에 닿는 단단한 부피감을 느낀 채이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