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어쩐다. 레오한테 또 걱정 끼치겠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채이는 이내 바삐 뛰어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름대로 단련되어 잔근육이 잘 붙은 몸이라 결코 가볍지 않은 채이를 한 손에 들쳐 메고, 이만한 속도로 달릴 정도면 절대 평범한 이는 아니었다.
‘누구지.’
자신과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납치를 강행할 뿐인 전혀 모르는 사람인가. 채이는 조금 더 집중해서 괴한의 움직임이나 보폭, 숨소리, 저를 가뿐히 들고 있는 팔의 골격 등을 단서로 하여 상대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은 의외로 이 괴한이 나이가 제법 있는 사내라는 점이었다.
나이가 제법 있는….
순간 채이의 머릿속으로 추측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충분할 만큼 도망친 건지, 아니면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달리는 것을 멈춘 노년의 사내가 채이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듯 떨구었다. 그러고는 채이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것을 홱 벗겨 낸다. 애초에 묶여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채이는 스스로 머리를 털며 고개를 들었다. 쭈그려 앉아 단검을 채이의 목에 겨눈 그는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반항을 안 하더군. 오만한 베타 놈 같으니라고.”
그 혐오에 찬 목소리까지 들으니 채이의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검날의 끝이 금방이라도 목의 살갗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겨누어져 있음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던 채이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다이비드 장로. 였던가요? 이름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서.”
“…데비드다!”
나직이 으르렁댄 사내가 자신의 복면을 냅다 던져 내팽개쳤다. 곧 노쇠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채이를 강하게 압박하며 숨통을 조여 왔다. 애초부터 그는 신분을 감출 생각이 그다지 없었던 걸로 보였다.
“허튼짓 못 하게 묶어 둬라.”
데비드가 검을 더욱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남자가 채이의 손을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고용된 사람인 듯한 그는 평범한 베타 사냥꾼이 아닌 열성 알파 발현자였다.
그러나 채이는 반항도 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법도 없이 그저 데비드를 빤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득, 이를 깨문 데비드가 채이의 얼굴에 감정 실린 주먹을 갈겼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채이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노쇠했다 해도 우성 알파였기에 감정이 실린 주먹은 우습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작게 신음한 채이가 입 안에 모인 피를 퉤 뱉어 냈다. 입 안이 살짝 터져 있었다.
“나 참.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보는 채이의 눈은 죽지 않은 채였다.
베타 주제에.
그 여유로움이 데비드에게는 못 참을 만큼 거슬렸다.
“개같은 것. 네놈 때문에… 네놈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수치를 겪었는지!”
채이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데비드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지난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건 채이를 몰래 원탁실로 불러들였던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비밀리에 이루어지던 방계 장로들의 모임 자리에, 어찌된 영문인지 장소를 몰라야 할 레오나드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었다.
그는 데비드의 발가락을 과자처럼 부스러트려 버렸고 데비드는 다른 장로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울부짖으며 나뒹구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다신 채이에게 손 뻗칠 생각하지 말라는 협박과 어디 가서 징징거릴까 봐 일부러 잘 보이지 않는 곳을 분질러 준 거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
거기에 실금하는 추태까지 보였으니… 고통도 고통이지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의 수치를 당하고 만 것이다.
데비드는 분통함과 날로 치솟는 증오로 인해 매일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분노를 상대적 약자인 채이에게 쏟았다. 결국 알고 보면 다 그놈의 존재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그놈이 잘못한 거라고. 하여 분풀이의 대상이 된 채이가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상황이었다.
이내 들끓는 분노를 잠시 삭인 데비드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죽 웃었다.
“널 여기서 죽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분해버린다면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아주 궁금하구나. 부디 날 실망시키진 말아야 할 거다. 놈이 돌아오지 않는 임을 찾으며 밤새 울부짖는 걸로는 모자라거든.”
“설마 레오를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런 짓을 하고 당신은 무사할 것 같습니까?”
채이는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제아무리 둔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고, 레오나드에게 두터운 콩깍지가 씌어 있는 채이라지만, 레오나드가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채이도 충분히 안다.
‘선’을 넘는다면 그 순간 데비드는 정말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 터였다.
반면 데비드는 한낱 베타 따위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성 알파.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최상류층 종족이자 남부럽지 않은 힘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본인이거늘.
이 또한 자신이 방계이기 때문에… 사생아에서 이어진, 되다 만 반쪽짜리 핏줄이기 때문에 베타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거라 여겼다. 데비드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은 곪을 대로 곪아 이성까지 좀먹고 있었다.
다만 이성적이지 못할 뿐 그가 바보인 건 아니었다. 때문에 데비드는 복수를 꿈꾼 순간부터 이미 살아남는 미래를 포기한 상태였다. 채이의 머리채를 낚아챈 데비드가 독기 품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걱정일랑 하등 필요 없다. 어차피 오늘내일 죽을 목숨이라면 나는 더더욱 네놈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 복수하고 죽을 것이니. 차라리 잘된 셈이지…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랭커스터도… 그 후계자 꼬맹이도.”
문득 생각난 게 있는 듯 데비드가 비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곧 그놈의 러트일이라고 했던가. 페로몬이 불안정해 보이던 게 이번에는 약을 먹지 않은 것 같더군… 어찌 폭주시킬 수만 있다면 랭커스터도 그 꼬맹이도 함께 없애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겠구나.”
그때까지 무슨 말을 해도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던 채이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건 진심으로 분노한 눈이었다. ‘소설 속 채이’의 몸으로 눈을 뜨고부턴 비교적 평화로운 삶이 지속되었기에 이토록 감정의 변화가 두드러진 적이 거의 없던 채이가 노골적인 살기를 띨 만큼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채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까진 환경이 주는 ‘평온함’에 이빨을 숨긴 맹수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 그도 사실은 레오나드 못지않은 냉혹함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국의 존속을 두고 사람이… 동료들이 시시각각 죽어 나가는 전쟁터의 일선에서 활약하며 살아남지도 못했을 터이니.
“그 애한테 허튼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십시오.”
채이가 데비드에게 경고하듯 한마디 일렀다. 그 순간 데비드는 저를 오롯이 담은 사나운 시선에 당황하여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감정 잃은 괴물처럼 냉담한 분위기가 평소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기에,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 버린 데비드는 금방 허세를 부렸다.
“하. 하하!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구나. 랭커스터 가의 후계자라는 놈이 한낱 베타한테 걱정이나 받는 꼴이라니…. 애틋해서 참 좋겠어, 응? 그렇게 애틋한 임과는 이만 죽어서 만나도록 해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인내의 담을 넘자 이를 악다문 데비드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이 베타 놈을 난도질해서 고통스럽게 만든 후 죽일 생각이었다. 찰나, 그가 감정에 휘둘리며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은 채이가 뒤로 묶여 있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 지탱했다.
직후 몸을 뒤로 홱 내빼면서 당긴 발로 데비드의 중심 부위를 정확히 걷어찼다. 이어 몸을 옆으로 돌린 채이는 한쪽 무릎으로 바닥을 짚어 다시 균형을 잡은 뒤에 발차기를 날려 비틀거리는 데비드를 완전히 넘어트렸다.
“악…!”
데비드가 짧은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동안 채이는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 앞으로 몸을 세우며 일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방심하고 있던 열성 알파가 다가오기 전에, 밧줄을 쉽사리 풀어 버린 채이는 데비드의 가슴께를 한쪽 발로 짓밟은 뒤 손목을 무릎으로 힘껏 눌러 단검을 떨구게 했다.
떨어진 단검은 이제 채이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더 다가오면 죽이겠습니다.”
그걸 데비드의 목 위에 세워서 드니 열성 알파는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그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제 목에 겨누어진 날붙이를 노려본 데비드가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열성 알파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무엇 하고 있나! 이 건방진 베타 놈을 당장 죽여! 베타 따위 힘으로 제압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열성 알파는 빤히 노려보는 채이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베타니까 힘으로 제압하면 된다’는 게 말이 쉽지, 저 사내에게서는 그걸 허용할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저 날카로운 날붙이는 데비드의 쭈글쭈글하고 연약한 피부를 뚫은 뒤 목구멍에 바깥바람이 통하는 새로운 구멍을 만들고 말 것이다. 단순히 말뿐인 허세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리먼!”
“못 해요… 그것만은 못 합니다, 아버지.”
결국 그는 기세를 죽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대단한 우성 알파라 할지라도 결국 인간이기에 날카로운 것에는 베이고 찢기며 치명상을 입었다간 죽는다. 이렇다 할 온정을 나눈 적이 없는 사이고, 데비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저까지 휘말리도록 만든 것에 화도 났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 아버지를 죽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