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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93화 (93/105)

093화

며칠 내내 이어지던 연회가 끝나고… 랭커스터 가의 일행은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즐겁게 놀고 푹 쉰 덕분인지 기사들도 그렇고, 모두 표정이 밝고 좋았다. 물론 저택까지 가는 길이 고단하다는 건 똑같기 때문에 이렇게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도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라.”

“응. 다음에 또 보자, 페르.”

채이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페르난데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직접 물어보지 않았고 페르난데도 구태여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페르난데가 자기 부모님과 쌓았던 감정의 골을 조금은 풀었다는 걸 눈치챘다. 사무엘과 마틸다를 보는 페르난데의 표정이 연회 첫날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으니까.

“채이.”

그때 마차 안으로 올라타던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마차 안으로 올라탄 채이는 이내 덜커덩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고,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잠시 마중 나와 주었던 클레망과 셀리언은 채이의 일행이 출발하는 것까지만 본 뒤 자신들의 마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랭커스터 저택까지 다시 안전하게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채이 님, 배고프진 않으세요?”

“조금?”

마차가 한참 달리고 있을 무렵. 채이의 대답에 에녹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디저트를 꺼냈다. 아직 머물렀다 갈 수 있는 중간 지점까지 한참 남은지라,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온 음식이었다.

“이거 드세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에녹.”

에녹의 따뜻한 마음씨에 채이가 웃어 주자 에녹도 배시시 마주 웃는다.

그렇게 채이는 바삭한 간식을 오도독 오도독 한참 씹어 먹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채이의 옆자리에 앉은 레오나드는 꽤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에녹과 무슨 대화를 해도 별다른 반응도 없고.

드물게 느슨해진 모습이었다.

“레오. 많이 피곤하니?”

채이가 레오나드의 팔을 부드럽게 쓸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 기척에 가물가물 눈을 뜬 레오나드는 “음…” 하고 소리를 삼키더니 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순간 달콤한 페로몬 향이 훅 퍼졌다가 빠르게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채이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레오나드가 이렇게까지 빈틈을 보여 주는 일도 처음인 것 같았기에. 평소 애교를 부릴 때하곤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던 에녹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약을 안 드셨지. 그래서인가 봐요.”

그리고 ‘약’이라는 단어에 놀란 채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약? 레오 어디 아파?”

“아, 그런 건 아니고. 러트 안정제요. 이제 9월이잖아요. 레오나드 공자님의 러트는 매년 10월이나 11월쯤에 오니까… 러트 전조 증상이 나타날 때가 되긴 했거든요. 러트가 찾아올 시기에는 페로몬 조절이 어려워지고 잘 흐트러지는데, 이걸 안정제 없이 버티려고 하면 정신력을 많이 소모해요. 그만큼 피곤해지는 거고요.”

거기에 “오메가가 겪는 히트사이클도 비슷해요.”라고 덧붙인 에녹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모습이었다.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는 모양새였다. 알파와 오메가는 매년 이런 일을 겪는단 말인가. 베타일 뿐인 채이로서는 상당히 번거롭고 거슬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원래 레오나드 공자님은 이 시기 즈음, 러트 안정제로 널뛰는 페로몬을 항상 바로잡아 두셨어요.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이 시기가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해서…. 하지만 약을 먹게 되면 각인이 제대로 되지 않거든요. 적은 확률이라도 실패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안 드신 거 같아요.”

…각인인가.

문득 제가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각인할 거라던 레오나드의 고집스러운 말이 떠올랐다. 채이는 조용히 레오나드를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마음 한편에 묻어 두고 있었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안정만 잘 취하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어.”

그때 레오나드가 눈을 감은 채 흘러가듯 이야기했다. 채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기다랗게 내려앉은 레오나드의 속눈썹을 바라보다 작게 웃어 버린 채이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도닥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일행들은 루드비스 영지를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중간 지점에 들러 하루 휴식을 취했다. 이후 일정대로 움직여 순탄하게 컴베스트 영지까지 도달한 마차는 이제, 새까만 밤이 찾아온 숲을 하나 지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이 끝나고 마을이 하나 나올 겁니다.”

한참 말을 몰던 마부가 장막을 걷으며 마차 안 채이의 일행들에게 일러 주었다. 오늘 안에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걱정할까 봐 미리 말해 준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여 답한 채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에녹의 몸 위로 모포를 덮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팔짱을 낀 채 반쯤 잠이 든 레오나드에게도 모포를 덮어 주려고 할 때였다.

“엇…!”

당황함이 담긴 마부의 외마디가 바깥에서 들려와 흠칫 놀란 채이가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를 불안이 심장을 차갑게 식히던 것도 잠시… 돌연 마차가 멈추더니 바깥이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예사롭지 않은 낌새를 느낀 레오나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떴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채이가 창가 쪽으로 붙었다. 그때 앞쪽 행렬의 마차에 타고 있는 델리온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숙여라!”

그와 거의 동시였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마차가 흔들렸다. 직후 창밖이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정체 모를 어떤 이가 연막탄이라도 터트린 것일까? 그 의문에 미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덜컹, 마차의 문짝이 뜯겨져 나가더니 누군가가 채이를 연막 속으로 끌어 내렸다.

“윽… 채이!”

“채이 님?!”

안 그래도 밤이 깊은 상태다. 그런 때에 검은 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으니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채이는 끌어 내려지고 얼마 안 있어 머리에 무언가가 뒤집어씌워졌다.

이래서야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다.

다만 누군가가 채이를 단단히 잡고 있었고 다급한 레오나드와 에녹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채이는 이 ‘누군가’가 자신을 일행들에게서 떼어 놓으려 한다는 것만은 깨달았다.

그렇게 채이가 정체 모를 괴한에게 들쳐 메어져 숲 안쪽으로 사라지는 동안 마차를 습격한 또 다른 괴한들은 다소 고양된 목소리로 “마차를 털어!”하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델리온과 레오나드는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탓에 이능향을 제대로 쓸 수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그들이 아니었으니. 금방 침착함을 되찾은 로렌스가 물러서 있으라고 외친 후에 검을 힘껏 휘둘렀다. 엄청난 바람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검은 연막이 순식간에 옅어지며 서서히 시야 확보가 되기 시작했다.

“우악! 뭐, 뭐야!”

“무슨 힘이 저렇게 무식하게 세!”

크게 당황한 괴한들이 검을 앞으로 세운 채 긴장했다. 잠시 후 마차 밖으로 델리온과 레오나드 그리고 에녹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한들은… 그 면면을 찬찬히 살피더니 뭔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도 직면한 듯 창백해지고 있었다.

“서, 설마… 잠깐만.”

이내 그들의 흔들리는 시선이 마차 쪽으로 향한다. 어둡기도 했고 연막탄을 터트려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기에 몰랐는데 마차에는 분명하게 ‘랭커스터 가문’의 것을 뜻하는 문장이 달려 있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이잖아!”

“랭커스터 가의 마차라는 이야긴 없었는데….”

“씹, 그 자식이 속였어! 우리를 속인 거라고!”

그들이 배신감과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즈음 델리온이 무서운 눈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단번에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괴한들은 검을 냅다 버리고 무릎부터 꿇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사냥꾼’들이라 해도… ‘진짜 괴물’들 앞에서는 한낱 날파리에 불과했으므로.

바들바들 떨며 조아린 괴한들을 노려보던 델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저… 저희는 그냥 이 숲을 지나는 마차를 습격해 주면 된다고 해서….”

“살려 주십쇼! 우린 설마 이 마차가 랭커스터 가문의 마차인지 몰랐다고요!”

“거짓말 마라! 정확한 목적도 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그냥 습격했다고?”

델리온의 단호하면서도 매서운 일갈에 목소리를 높였던 괴한이 금방 기가 죽어 머리를 다시 조아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속으로 자신들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겠구나 하며 절망하고 있었다.

“목적은 저희도 모릅니다… 고용인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저희가 고용인에게 부탁받은 건 마차가 지나갈 때 연막탄을 터트리고 혼란을 줄 것…. 이후에는 그 마차를 상대로 뭘 해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냥 돈이 좀 많은 상단의 마차쯤 되겠거니 했다고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

아무래도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여, 이들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일행을 돌아본 델리온이 피해는 없는지 먼저 확인해 보려던 때였다. 창백해진 얼굴을 한 에녹이 비명처럼 외쳤다.

“채이 님이… 채이 님이 어디에도 안 보이세요!”

그 순간 당황한 델리온이 무의식적으로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숨이 다소 거칠어진 레오나드에게서 불온한 기운이 넘실대며 흘러나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러트가 가까워져서 페로몬의 제어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이거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 함은 정말이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찾아.”

이내 이를 아득 깨문 레오나드가 외쳤다.

“당장!”

그 일갈이 터지자마자 훅 퍼져 나온 페로몬에 사냥꾼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기절하거나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목을 쥐고 굴렀다. 에녹이 덜덜 떨며 당장 이능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델리온도 잔뜩 긴장한 채 기사들을 움직였다. 로렌스는… ‘왜 채이 님을 가만히 못 내버려 둬서 안달이냐’며 속으로 울고 있었다.

***

한편 채이는….

‘흠. 나 설마 또 납치되고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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