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그러한 모습을 본 에녹은 적당히 입구 근처에 자리 잡은 채 청각을 곤두세워 밖으로 나간 채이의 기척을 쫓았다. 창가 아래에 쭈그려 앉은 페르난데에게 채이가 다가가고 있었다.
하여 에녹도 조금 자리를 옮겨 창가 쪽에 기대어 섰다. 건물 안에 있는 에녹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채이와 페르난데가 시선을 마주쳤고, 채이는 조용히 그의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니?”
그리고 조심히 건네어진 질문. 페르난데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자신이 제 아버지와 다투는 모습을 채이가 봐 버렸다는 걸 눈치챘다. 걱정돼서 따라 나온 건가…. 정말이지, 다정한 사람이다. 그러니 더 좋아해 버린 거지만. 잠시 대답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페르난데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랬어.”
다소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서두였다. 하지만 채이는 페르난데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편하게 꺼낼 수 있도록 얌전히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아빠는 과보호가 심하고…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었지.”
드리운 페르난데의 속눈썹이 약하게 떨리며 조금 더 내려앉았다. 어릴 적 실수로 복도에 있는 물건을 깨트렸을 때 페르난데가 아닌 애꿎은 시종에게 화를 내면서 쫓아냈던 아버지. 그런 행동을 보일수록 페르난데를 무서워하고 항상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 너희 아버지가 무섭다며 멀어지던 친구들….
그는 과거의 편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 아빠한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어.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고 말싸움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아빠는 늘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느니, 자기가 더 잘하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만 지껄이더라고. 거기다 엄마는 우리가 싸우든가 말든가 신경도 쓰지 않고. 뭐… 일이 바쁜 탓도 있겠지만.”
페르난데의 가라앉은 시선이 허공을 훑었다.
“…아빠의 과보호는 내가 6살 무렵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고 나서부터 특히 심해진 것 같아. 어느 순간 내 주변에는 나를 폭탄물 취급 하는 인간들만 남아 있더군. ‘페르난데 님은 특별하시니까요’. 그건 언제나 나를 두려워하는 말이었어. 동시에 혐오하는 말이었고. 그 목소리에 담긴 비아냥거림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충격적인 거더라.”
피식 웃은 페르난데가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꼴사납게도 채이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있으니, 또 그런 속내를 채이가 조용히 곁에서 들어 주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안도감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라 코끝이 시려 왔다.
“그 모든 행동들이 날 사랑해서라고 생각되진 않아. 오히려 방치고, 짐짝 취급 하는 거지. 아니라면 왜 맨날 괜찮다고만 하는데? 그게 방치가 아니면 뭐겠어. 나한테 애정이 없으니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쉽게 쉽게 해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냐고.”
점점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금방 부서질 것처럼 처연해서… 걱정스레 바라보던 채이는 그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페르난데가 ‘자신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태도를 싫어한다는 건 그와 처음 만났던 당시의 반응을 보고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설마 속으로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채이였다.
“페르….”
그때였다.
페르난데에게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무렵, 부스럭대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채이의 청각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뭔가 싶어서 슬쩍 돌아본 채이는 기둥 모퉁이 너머에서 펄럭이는 옷자락을 얼핏 보았다. 가만 보니 그건 사무엘이 걸치고 있던 망토의 옷자락 일부분이었다.
하여, 에녹이 창가 너머에서 엿듣고 있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무엘이 채이와 페르난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페르난데를 뒤따라 나오기 전에 보았던 사무엘의 얼굴이 채이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자꾸만 어긋나는 관계에서 느끼는, 슬픔과 답답함으로 가득해 보이던 얼굴. 그건 페르난데를 정말 귀찮게 여기거나 관심이 없어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틸다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녀도 다르지 않으리라.
적어도 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슬쩍 페르난데를 다시 돌아본 채이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해. 네 부모님이 널 싫어하고 있진 않을 거라는 거.”
“…….”
“페르. 우선은 네 아버지랑 진솔한 대화를 한번 해 보는 건 어때?”
“이제 와서 털어놓고 대화한다고… 새삼 달라질 게 있나.”
“당연하지. 대부분의 갈등은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는 거니까.”
그래서 진실된 대화가 중요하다고들 하는 것이고, 채이는 그 점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건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또 직접 느껴 온 것이기도 했다.
“뭐가 문제인지 먼저 말해 주지 않으면…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아. 그냥 영원히 상처로 남는 거지. 그러기 싫다면 가끔은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야.”
채이의 잔소리를 닮은 충고에 페르난데는 살짝 부루퉁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다. 그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은 채이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신이 오지랖 부리는 건 이쯤 하고, 이제 두 사람이 대화할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잘해 봐.”
페르난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채이는 이내 연회장 입구 쪽으로 되돌아갔다.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기둥을 반드시 돌아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뒤에 숨어 있던 사무엘과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
채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양 힐끔 돌아보자 사무엘이 머쓱한 눈치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가 그 잠깐의 머쓱함을 참지 못하고 뒷목을 긁적일 무렵, 채이는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엘이 정말 페르난데를 알고자 한다면 두 사람의 문제는 잘 풀릴 터. 분명 그도 채이의 말을 듣고 있었을 테니까. 애초에 그도 함께 들으라고 의도하여 그에게까지 들릴 만한 목소리로 얘기한 거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사무엘은 채이가 엿듣고 있던 자신의 기척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으며 대화할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비워 주었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용기가 필요한 때….
그 말을 되새긴 사무엘은 이윽고 발걸음을 떼어 페르난데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레이트 홀로 되돌아온 채이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기다리고 있을 레오나드에게 돌아가야 할지, 조금만 더 벤냑스를 찾아볼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쩐다.’
페르난데와 대화한다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레오나드는 착하고 다정하니 분명 이 이상 자리를 비웠다가는 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리라.
‘안 되면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결정을 지어야만 하는 일을 계속 마음 한편에 두는 일이 내키지는 않지만… 확실히 온 건지 안 온 건지도 모르는 사람을 하염없이 찾아다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레오나드 쪽으로 돌아설 무렵.
‘아.’
창가로 불어온 바람에 섞인 은은한 매화 향이 코끝을 스쳤다. 순간 머릿속으로 그린 듯, 벤냑스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수줍어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제어되지 못한 페로몬이 흘러나왔기에 그 매화 향을 맡으면 벤냑스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하는 거였다.
하여 그 향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인형. 이윽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채이는 우물쭈물하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벤냑스를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벤.”
그러자 입술을 감쳐문 벤냑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니 벤냑스도 채이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듯했다. 어쩌면 채이가 어떤 대답을 돌려줄지 이미 예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고백에 대한 대답, 하고 싶어서 찾아다녔는데. 괜찮으면 잠시 자리 옮길까요?”
채이의 부탁에 뺨을 발그스름히 붉힌 벤냑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화의 내용을 들어 버린 에녹이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채이에게서 눈을 뗀 일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그런 대화가 오갔던 걸까? 이 사실을 레오나드 공자님은 알고 계신 걸까?
‘고백에 대한 대답이라니.’
물론 채이 님이라면 확실히 거절하고자 하는 거겠지만….
‘끼어들어야 하나? 아니면 냅둬? 어쩌지?’
에녹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도 잠시.
채이와 벤냑스가 자리를 옮긴다.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인 듯 그레이트 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에녹이 따라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보다 먼저 익숙한 그림자가 에녹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드니… 그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오나드였다.
“고, 공자님.”
“…….”
레오나드는 대꾸 없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만 보았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분명 ‘불안’이었지만 에녹이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차분한 모습이었다. 채이 님을 믿기 때문일까? 공자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에녹이 그런 의문을 느낄 즈음, 레오나드가 에녹 대신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에녹으로서는 부디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