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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90화 (90/105)

090화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서 일어나 수다를 멈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소개를 들어 보니 페르난데와 똑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온후한 인상을 가진 사내가 루드비스 3세 황제이자 우성 오메가인 사무엘. 비단처럼 곱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시원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 루드비스 황후이자 우성 알파인 마틸다인 듯했다.

‘이렇게 보니 페르난데는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네.’

날카로운 눈매는 어머니 쪽을 닮았지만 말이다. 풍채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로 치면 루드비스 3세도 만만치 않았다. 확실히 페르난데가 가진 특유의 카리스마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인가 싶었다.

“…그럼 원하는 만큼 즐겁게 놀다 가시기 바랍니다.”

“제국의 기둥들에게 태양의 가호가 깃들기를.”

사무엘과 마틸다가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며 손을 들었다. 멈추었던 연주가 재개되고 귀족들도 다시금 편안한 모습으로 수다를 떨며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즈음 채이 일행을 발견해 낸 페르난데가 같은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았는데, 그 모습을 본 것인지 단상에서 내려온 두 사람도 이리로 걸어왔다. 아무래도 페르난데를 볼 겸 자신들이 부른 베타를 직접 만나 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채이는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뒤이어 에녹과 레오나드도 고개를 돌리자 사무엘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의 행동을 부드럽게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편히들 앉아 계십시오.”

그리고 두 사람을 뒤늦게 발견한 페르난데는 부루퉁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할 뿐이다. 채이가 힐끔 눈을 돌려 그런 페르난데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거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자신의 부모님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반면….

“자네가 랭커스터 가의 그… 채이라는 자인가 보군.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잘 왔다. 편히 놀다 가거라. 그리고 자네에게는… 우리 펠과 친하게 지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사무엘은 부모로서 상당히 페르난데를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채이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아닙니다. 페르난데 공자님이 저를 신경 써 주시는 거죠.”

“허허. 말도 듣기 좋게 해 주는구나.”

사무엘이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반면 페르난데는 처음 듣는 채이의 경칭에 경악했다는 듯 얼빠진 얼굴로 턱을 괴었다. ‘불쾌해서’라기보다는 ‘채이도 저를 공자님 취급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점에서 얼이 빠진 거였다.

하지만 채이도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적인 자리라면 편하게 대할지 몰라도 페르난데의 부모님들을, 그것도 제국의 주인들을 앞에 두고 베타인 채이가 공자 신분인 그를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친하다고 한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인지하고 있고 말이다.

물론 페르난데의 입장에서는 채이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돼서 잠깐 호기심이 동했다, 딱 그 정도였다. 그는 베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채이를 좋아하는 것이기에 평소처럼 편히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공자님은 무슨.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해.”

하여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작게 말했지만, 그러한 페르난데의 모습을 본 사무엘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서 미간을 좁혔다.

“펠.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채이 공이 난감해할 거다. 그리고 네가 루드비스 가문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참, 아직도 이토록 어린애처럼 굴어서야… 이 아비는 걱정스러워서.”

거기까지 잔소리한 사무엘은 시선을 의식한 듯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멈추었다.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잔소리를 술술 뱉어 내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페르난데도 아주 질린 기색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고, 두 사람을 방관하며 바라보던 마틸다는 또 시작이네 싶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채이는 다 큰 자식이라도 걱정하고 마는 사무엘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만약 상대가 레오나드였다면, 채이도 사무엘처럼 비슷한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았을지 몰랐다.

사무엘과 채이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그 걱정의 선이 ‘과보호인가 아닌가’이리라.

“신경 꺼.”

“…잠시 대화 좀 하자꾸나. 할 말이 있어 온 것이기도 하니. 따라오거라.”

“싫어. 어차피 멋대로 외출했다고 또 그거 잔소리하려는 거잖아.”

“아들.”

“말 못 알아들었어? 나한테 신경 끄라고.”

그즈음 마틸다가 한마디 얹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근처에서 마틸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바쁜 일이 남아 있던 게 생각났는지 먼저 가 보겠다며 자리를 비우고 말았다. 이래서야 중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페르난데가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자 사무엘도 감정이 격해지는지 잔소리의 강도가 높아졌다. 주위에 엿듣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점점 분위기는 안 좋아졌고 두 사람의 자잘한 말다툼은 계속 이어졌다.

그걸 보면서… 채이는 깨달았다.

페르난데가 언뜻 다정해 보이기만 하는 자신의 부모님을 왜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를.

“하아.”

결국 먼저 항복기를 든 것은 페르난데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계속 다투었다가는 채이에게 민폐고 귀족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서 오르락내리락할 것도 알았기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엘도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더니 어딘가 착잡하고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먼저 돌아섰다. 두 사람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자 한참 눈치보고 있던 에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남의 집안 싸움이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심장을 졸인 모양이었다.

“페르… 괜찮은 거려나.”

채이의 중얼거림에 조용히 차를 들이켜고 있던 레오나드는 흘깃, 페르난데가 사라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주 사소한 눈짓일 뿐이고 이외에 말을 덧붙이는 일도 없었지만, 관심이 없으면 눈길도 주지 않는 레오나드를 생각하면… 항상 그렇게 싸워도 역시 미운 정은 들었던 게 분명했다.

가족과 사이가 안 좋은 건 레오나드도 마찬가지라 그로 인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이후 채이는 분위기 전환 겸 일행들과 수다를 떨며 디저트 타임을 가지다가 적당한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는 거냐는 눈으로 레오나드와 에녹 두 사람이 돌아보았기에 채이는 적당히 말을 돌렸다.

“잠시 이 주변 구경 좀 하려고. 화장실도 다녀올 겸.”

“그럼 제가 같이….”

“아냐, 아냐. 잠시 다녀오는 거니까 혼자서도 괜찮아.”

덩달아 일어나려는 에녹을 도로 제지하여 앉힌 채이는 씩 웃어 보인 후, “금방 다녀올게!” 하고 가벼이 자리를 떠났다. 그 뒤에서 에녹이 어떡하면 좋겠냐는 눈치로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는 가만히 멀어지는 채이를 바라보다가 에녹에게 눈짓했다. 조용히 뒤따라가라는 뜻이었다.

채이는 잠시 다녀오는 거니 괜찮다고 했지만 연회 도중 경비가 허술해지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다. 레오나드로서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레오나드의 명령에 에녹이 냉큼 채이의 뒤를 쫓아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거리를 충분히 벌려 둔 상태로 쫓아가니 그의 기척은 주변의 소음에 모조리 묻혔다. 그 때문에 베타치고 감각이 예리한 채이도 자신을 뒤쫓는 에녹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본래의 목적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벤냑스를 찾을 뿐이었다.

‘흠. 안 보이는데… 벤은 안 온 건가.’

채이는 수많은 귀족들 사이를 찬찬히 살피며 벤냑스의 모습을 찾았지만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벤냑스의 페로몬이 부드럽고 달콤한 매화 향과 닮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기에 어디선가 향이 난다면 금방 찾을지도 모르겠으나, 귀족들은 페로몬을 헤프게 흘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발현자 귀족들의 입장에선 무례하거나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적인 생각을 가진 건 벤냑스도 마찬가지였다. 채이와 대화하던 도중 실수로 향을 흘렸을 때 그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던 적이 있어서 알았다.

하여, 알파와 오메가를 찾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페로몬 향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 방법으로 이곳에서 벤냑스를 찾아낼 순 없을 듯하다.

그때였다.

‘응?’

그레이트 홀 구석에 익숙한 그림자들이 보여서 잠시 멈추어 섰다. 누구인가 했더니 아까 전에 대화한다며 사라졌던 페르난데와 사무엘이었다.

‘싸우는 건가?’

여기선 다소 거리가 있기도 하고 주위의 떠드는 소리들도 있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는 모르겠다.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난 표정이나 큰 입 모양을 보아선 둘의 분위기가 상당히 나빠 보였다.

그러더니 페르난데가 먼저 홱 고개를 돌린다.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그레이트 홀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사무엘이 손을 뻗으며 페르난데를 부르는 듯했지만 뒤따라가지는 못한 채, 어딘가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한 채이는 곧 그레이트 홀을 나가 버린 페르난데의 뒤를 쫓아서 밖으로 나갔다. 벤냑스를 찾는 것도 찾는 거지만, 그러고 나가 버린 페르난데가 걱정되었던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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