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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89화 (89/105)

089화

“딱 맞춰서 왔네.”

한쪽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는 페르난데가 채이 쪽으로 다가오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에 마주 손을 흔든 채이가 슬쩍 웃었다. 새삼 페르난데도 귀족이긴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부러인지 평소에 하도 껄렁하게 다녀서 까먹기 십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그에게서도 확실히 귀태가 났다.

“흰색 제복 잘 어울린다. 웬일로 차려입었어?”

“손님들한테 얼굴 비치라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페르난데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하지만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채이의 시선을 크게 의식한 듯,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회피하던 페르난데는 슬쩍 말을 돌렸다.

“일단.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저녁부터라 시간이 좀 있는데… 어떡할래? 그때까지 저택 가서 쉬어도 되고 미리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어도 돼.”

채이는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클레망과 셀리언은 광장으로 내려가 잔뜩 사 온 물건을 시종들에게 맡기곤 돌아서고 있었다. 짐 정리도 해야 하니, 자신들은 저택으로 먼저 가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델리온과 동행해 온 랭커스터의 기사들도 저택으로 향하려는 듯 보였다. 먼 길을 이동하느라 피로가 쌓였을 테니 쉴 수 있을 때 푹 쉬려는 모양이었다. 하여 채이도 저택에서 잠시 쉬고 움직이기로 했다. 구경은 조금 있다가 마음껏 해도 되는 거니까.

“레오. 우리도 가서 쉬자.”

“응.”

“그럼 따라와. 조용한 별관으로 안내해 줄게.”

페르난데가 뒤쪽을 가리키며 돌아섰다. 그를 뒤따라가 도착한 곳은 메인 저택과 제법 거리를 두고 지어진 또 다른 저택이었다. 아무래도 페르난데 개인 소유의 저택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채이만 들여보내고 싶지만….”

“꿈이 야무지군.”

“아? 지금 시비 터냐? 확 로비에서 재운다, 너.”

“해 보든가.”

불편한 눈으로 레오나드를 흘겨보던 페르난데가 도발을 맞더니 급기야 눈꼬리를 쭉 찢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레오나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를 못 참은 두 사람이 다시 말다툼을 하는 동안 채이는 에녹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일부 병사들이 곳곳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페르. 어디로 가면 돼?”

주변을 둘러본 채이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방을 쓰면 좋을지 모르니 페르난데의 안내가 필요한 까닭이었다. 그때까지도 레오나드와 서로 노려보고 있던 페르난데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돌아서며 눈싸움을 멈추었다. 채이가 끼어듦으로써 싸움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손님 접대용으로 비워진 방은 2층에 있어.”

페르난데가 먼저 계단을 오르고 채이와 일행들이 그 뒤를 따랐다. 2층 복도는 상당히 고요하여 엇갈리는 발소리만이 울렸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메인 저택 쪽의 빈방을 사용하고 있고, 페르난데가 이곳에 다른 귀족들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조용하게 휴식할 수 있으니 일행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여기야.”

“오.”

페르난데의 안내로 배정받은 방에 도착한 채이는 방 안을 슥 둘러보았다. 내부가 상당히 크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손님이 없어도 시종들이 항상 청소를 해 두는 건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거기에 두 명도 거뜬하게 누울 수 있을 만큼 크고 푹신한 침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아, 좋다.”

에녹이 마차에서 가지고 나온 짐을 정리하는 동안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채이가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며칠 내내 딱딱한 마차에서 지내느라 혹사당한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문기둥에 기대어 서서 지켜보던 페르난데가 피식 웃고는 제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랑 여기 옆방은 자유롭게 써. 그럼 쉬고 조금 이따가 그레이트 홀에서 보자.”

아무래도 손님 접대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망나니라는 명성과 다르게 제법 건실한 모습이라 볼 수 있었다. 정말 망나니라면, 그런 귀찮은 일은 진즉에 집어치우고 뽈뽈 돌아다녔을 테니까. 꽤 오랜 시간을 지켜보며 알게 된 페르난데는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 나중에 봐.”

흐뭇해진 채이가 선뜻 그를 보내 주었다. 이후 에녹도 자신은 옆방을 쓰겠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기에 방에는 레오나드와 둘만 남게 되었다.

침대 위로 풀썩 누운 채이는 레오나드가 크라바트를 편하게 풀며 옆자리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레오. 피곤한 건 괜찮니? 너 여기 오는 거 처음인 줄 알았으면 좀 더 고민할 걸 그랬다.”

레오나드의 체력이 남다르다는 건 잘 알지만… 그가 연회 참석을 결정하기 전에 ‘멀리 이동해야 하니 좀 피곤하다’는 말도 했던지라 그 점이 괜히 신경 쓰이는 채이였다. 그리고 그런 채이의 다정한 마음을 알기에 살짝 눈을 접어 웃은 레오나드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괜찮아. 나는 채이가 더 걱정인데.”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또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 버렸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언제쯤 돼야 이 관계가 익숙해지려나 했는데…. 어느샌가 채이는 자식처럼만 생각했던 레오나드를 한 사람의 연인으로서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

보석 한 조각 같은 레오나드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잠시 빠져 있던 채이가 말을 이었다.

“연회는 왜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거야?”

“나까지 참석해야 할 이유가 굳이 없어서. 지금까진 늘 다른 형제들도 참석했거든.”

“아,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다들 오지 않았네?”

랭커스터 가에서 이번 연회에 참석한 사람은 델리온과 레오나드뿐이었다.

베넷은 집사장과 함께 가주의 대리자로서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은 거겠지만… 다른 형제들은 왜 오지 않은 것일까. 역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제법 고달프다 보니, 레오도 참석하겠다, 마침 잘됐네 싶어서 빠진 걸까? 채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레오나드는 채이의 앞머리를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움직이며 이마에 살짝씩 닿는 느낌…. 그 느낌이 좋았던 채이가 눈을 감고 있으려니 잠시 후 레오나드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채이.”

“으응?”

“저번에 코네러 영식과는 무슨 대화 했던 거야?”

기분 좋음을 만끽하고 있던 것도 잠시. 그 허점을 찌르는 질문에 눈을 반짝 뜨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든 레오나드의 얼굴이 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철두철미하다고 말해야 할까. 섬세하다고 말해야 할까. 사소한 것도 쉽게 지나가지 않는 녀석이다. 거기다 눈치는 또 어찌나 빠른지….

그런 레오나드도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채이였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일을 홀라당 이야기할 순 없었다. 자신의 선에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이야기해서 괜한 갈등을 만드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채이는 눈만 데굴 굴리며 말을 돌렸다.

“별다른 이야기 안 했는데.”

“흠.”

“진짜야. 네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었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레오나드도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채이가 나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니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채이를 믿기에… 곧 레오나드는 알겠다는 의미로 채이의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한숨 자고 일어나서 옆방에 있는 에녹과 함께 연회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어둑어둑하니 해가 다 내려앉아 캄캄한 때였는데, 그레이트 홀 내부는 샹들리에의 환한 불빛으로 인해 오히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사람 정말 많다.”

“와. 그러게요.”

채이는 레오나드, 에녹과 함께 연회장의 외곽 쪽을 걷기 시작했다. 웅장하고 흥겹게 울리는 음악의 선율이 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중간중간 설치된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즐기며 수다 떠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랭커스터 공작저에서 열렸던 연회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랭커스터 가문이 루드비스 가문의 명성과 권력에 밀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번에 열렸던 랭커스터의 연회는 어디까지나 후계자가 된 레오나드를 소개하는 자리로 마련한 것이었고, 이 연회는 제국 소속국 전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수 뿌리가 안전하게 지켜졌음을 기뻐하는 자리였으니까.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그만큼 화려하게 진행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채이. 저기 비어 있는데 앉을까?”

“아. 그러자. 에녹, 이쪽으로 와.”

“네!”

레오나드와 채이가 먼저 빈자리에 앉자 뒤따라온 에녹이 맞은편에 앉았다. 채이는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는 벌꿀주를 빈 잔에 따르며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살짝 들뜨는 느낌이었다.

“채이 님! 여기 스콘 드세요.”

“고마워.”

에녹이 따끈따끈한 스콘 하나를 채이의 접시 위에 올려 주고 레오나드는 조그만 잼 통을 집어 들어 채이 옆에 놓아주었다. 스콘 위에다 야심차게 잼을 바른 채이는 크게 한 입 물면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혹시 이 근처에 벤냑스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귀를 즐겁게 해 주던 연주가 멈추더니… 단상 쪽에서 한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실물은 처음 보지만 딱 느끼기에 두 사람은 루드비스 가문의 주인들이자 이 아스타리우스 제국의 황제와 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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