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수도 안을 달려 라이오스 광장이 보이는 입구 언저리까지 도착한 마차가 차례차례 멈춰 섰다. 모든 행렬이 멈추고, 분주하게 내린 기사들은 말과 마차의 상태부터 점검했다. 말은 루드비스 저택 내 마구간에 맡겨 둘 예정이라 여기서는 잠시만 쉬고 다시 저택까지 올라가야 하는 까닭이었다.
“아으. 이제야 좀 살겠네요.”
“그러게.”
잠시 마차에서 내린 에녹이 열심히 기지개를 켰다. 그 옆에서 채이가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동안 레오나드는 로렌스에게 어떤 보고를 듣는 중인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즈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사들을 지휘, 감독하고 마지막으로 시간과 일정을 확인한 델리온이 말했다.
“1시간 뒤에 다시 출발할 거니 그 전까지 광장이라도 구경하고 오거라.”
안 그래도 지루한 참이었던 채이에게 있어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채이는 레오나드와 에녹, 그리고 호위로 붙은 로렌스와 라이오스 광장 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함께하게 된 로렌스는 못 본 사이 더욱 늠름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로렌스의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를 발견했다. 그건 일전에 채이가 선물로 주었던 브로치였다.
“잘 사용해 주셔서 기뻐요.”
반가운 마음에 채이가 브로치를 보며 이야기하니 로렌스도 제 가슴께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덩치는 거대한 곰 같아서 위압적인데 애처럼 헤벌쭉 웃으니 순식간에 곰돌이가 되어 버리는, 여전히 귀여운 사람이었다. 어디까지나 채이가 보기에는 그랬다.
“채이 님이 주신 거니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요.”
“정말입니다! 그리고 소중히 하지 않으면 공자님의 손에 목이 비틀려 죽을지도 모릅니다.”
…과장하는 버릇도 여전하고.
그때 앞장서서 걷고 있던 레오나드와 에녹이 채이를 돌아보았다. 에녹이 정면을 가리키면서 “여기 와 보세요!”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싶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니 광장의 시계탑 근처에서 누군가가 사람들을 앞에 둔 채 인형극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인형극?”
“네! 채이 님은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나도 처음 봐.”
에녹과 레오나드 옆으로 다가간 채이는 두세 명의 남녀가 다양한 모양의 인형들을 조작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인형은 사람 모양도 있었고 마물의 모양이나 엘프, 드워프, 드래곤의 모양도 있다. 이따금 수인족들의 인형도 나타났다. 이야기에 집중해 보니 내용은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다양한 종족들을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교육용에 가까웠다.
귀족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정보를 얻기에 다소 취약한 위치에 있는 베타 평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인형극인 것이다. 좋은 의도다. 그렇기 때문일까. 채이가 무의식적으로 다정한 눈빛을 띠었고 그런 채이의 사소한 변화들을 놓치지 않던 레오나드는 그가 이 인형극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곧 인형극단 단원들이 인형극의 끝을 알리며 챙이 넓은 모자를 내려놓았다. 자주 해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구경하던 몇몇 사람들도 그 안으로 동전을 던져 넣고 즐거운 얼굴로 떠났다. 인형극단 단원들은 항상 이렇게 수고비로 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많이는 없지만….’
채이가 지갑에 든 동전을 전부 꺼내려고 할 때였다. 레오나드가 로렌스에게 눈짓했다.
“본 값은 해야지. ‘넉넉하게’ 주고 와.”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로렌스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 예.”
그러고는 단원들에게 다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인형극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그만한 값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로렌스가 종이 한 장을 건네자 그걸 본 단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송구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종이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채이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끼고 있었기에, 채이는 조금 미안한 눈치로 돌아보았다.
“혹시 나 때문에 대신 낸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냐. 나도 흥미롭게 봤거든. 그래서 값을 치른 것뿐이야.”
“그러니?”
“응. 그보다 채이. 저기 한번 가 보지 않을래?”
레오나드가 자연스럽게 채이를 끌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 했다. 그에 채이와 에녹이 군말 없이 걸음을 옮겼고, 로렌스도 감격해서 우는 단원들을 뒤로한 채 세 사람을 뒤따르려 할 때였다.
“이야. 의외인데? 그 레오나드 공자님께서 이런 귀-여운 인형극에 관심이 있었을 줄이야.”
망나니처럼 건들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너스레를 떨며 알은체했다. 누군가 싶어서 채이가 돌아보았는데… 이게 웬걸. 한쪽 주머니에 손을 꼽고 삐딱하게 선 사내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바로 클레망 디 롤라이스였다.
“클레망 공자님?”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눈웃음 지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마침 그 뒤에서 피륙으로 만든 작은 자루를 양손에 한가득 쥔 셀리언이 나타났다. 그녀는 어째선지 잔뜩 성이 나 있는 얼굴이었는데 채이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아, 하고 놀라더니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설마 두 분이 와 계셨을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이군요.”
상황으로 보아 클레망과 셀리언도 루드비스 가의 초대로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이! 레오나드는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으니까 이번이 처음이지? 웬일이래?”
가볍게 손뼉을 친 클레망이 능청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채이도 처음 알게 된 진실이었다. 채이가 레오나드를 돌아볼 즈음 레오나드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미간을 슬쩍 구겼다.
“불필요한 관심은 가끔 무례함이 된다는 걸 모르나?”
“에이.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엔 제국 땅 크기만큼의 벽이 있지. 친한 척은 그만둬.”
“클레망은 상처받았어용. 어떻게 사람이 저리 매정할까? 그치, 채이.”
은근슬쩍 다가와서 채이의 어깨에 팔을 걸친 클레망이 킥킥 웃음을 지었다. 이쪽을 보는 레오나드의 눈매가 매서워지자 그 반응조차 즐기는 듯 보였다. 그런 클레망을 멀뚱멀뚱 쳐다본 채이는 대수롭잖은 투로 답했다.
“레오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곤란해하는 것도 아니고 당황하는 것도 아닌… 정말 순수하게 그리 생각해서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상황에 전혀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는 채이의 모습에 클레망은 입을 삐죽이며 어딘가 식어 버린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휘두르려 해도 휘둘리지 않는.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거지만 채이는 클레망이 껄끄러워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진짜 재미없다, 너.”
“마침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네요.”
채이가 그리 대답하곤 작게 웃자 결국 한숨을 내쉰 클레망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다간 자기가 채이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한 것이었다. 클레망이 채이에게서 떨어진 사이, 레오나드가 채이를 제 곁으로 슬쩍 당겼다. 그즈음 조용히 상황을 살피고 있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자님들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셨나요? 기사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그러자 셀리언이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저희는 어제 밤에 도착해서,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요. 그래서 저놈이 오늘 잠시 기분 전환이나 할 겸 광장으로 놀러 가자 하더군요. 참고로 이 거추장스러운 사치품들은 전부 저놈이 산 겁니다.”
양손에 주렁주렁 매달린 자루를 불쑥 보여 준 셀리언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클레망을 흘겼다.
“이럴 줄 알고 기사 한 명쯤은 데려가자고 했는데. 말귀를 알아먹질 않으니.”
그러니까 자기가 한 무더기 사 놓곤 셀리언에게 대신 들어 달라고 떠넘겼다… 대충 이런 상황인 듯했다. 어쩐지. 아까까지 그녀가 잔뜩 화난 도깨비 얼굴을 하고 있던 이유는 그 탓인 모양이었다. 채이와 에녹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클레망은 셀리언의 앞에서 한껏 연약한 척하며 깐족거렸다.
그나저나… 항상 저런 식이면 한 번쯤은 진심으로 화낼 법도 한데. 셀리언은 클레망과 원수지간처럼 투닥거리면서도 은근히 받아 줄 만큼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채이는 그게 조금 신기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런 게 아니면, 그냥 두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친밀한 사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을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지라 채이의 일행들은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뭐, 클레망이 원래부터 한 일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일행은 광장을 가볍게 돌고 난 후 마차를 타기 위해 돌아갔다. 거기에는 클레망과 셀리언도 함께였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똑같으니 마차에 태워 주기로 한 거였다. 당연히 레오나드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채이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또 빼앗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광장에서 루드비스 저택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금방 저택의 정문까지 도착하여 내릴 준비를 끝마쳤다. 잠시 후 열린 대문 안으로 마차가 진입하고, 채이는 일행들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들은 마차와 말을 보관하는 곳으로 옮기느라 동분서주했다.
“여기가 페르의 집이구나.”
채이는 드넓은 저택 내부 공원을 둘러보았다. 클레망과 셀리언처럼 미리 도착해 있던 귀족들이 제법 있는지 정차된 마차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채이.”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곳에 있는 건… 웬일로 단정하게 잘 차려입고, 머리는 한쪽으로 대충 묶어 늘어트린 모습의 페르난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