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채이는 에녹에게 “자신이 한 말은 그런 거시기한 뜻이 아니었다”는 걸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제야 에녹도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알고 부끄러움에 뺨을 붉혔다. 그렇게 서로 더운 열기를 식히고 있던 와중… 한참 영지를 달리던 마차가 숲을 앞에 두고 천천히 멈춰 섰다. 컴베스트 영지의 서쪽에 존재하는 이 숲을 건너면 영지의 경계선이 나온다. 하여, 잠시 쉬었다가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한번 정비하고 가겠습니다!”
기사단장인 로렌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즈음 채이는 에녹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앞 마차에서 내린 레오나드도 채이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레오나드의 얼굴은 약간 심통이 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는 원래 채이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오붓한 시간을 즐기려 했었는데, 에녹이 대뜸 “채이 님과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어요!” 하는 바람에 다른 마차를 타게 되었으니까.
“아. 레오.”
머쓱하게 미소 지은 채이가 레오나드를 맞이했다. 에녹은 다가오는 레오나드를 보자마자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레오나드가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후다닥 자리를 떠 버렸다.
“다음 출발부터는 두 분이 같은 마차 타세요!”
그 말만을 남긴 채.
레오나드는 도망가듯 어디론가 뛰어가는 에녹의 등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채이를 돌아보았다. 에녹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에 대한 해명을 원하는 얼굴이었지만, 채이는 그저 허허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결국 가벼이 한숨을 내쉰 레오나드가 그에 대한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말했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나 봐. 그 전까지 같이 걸을래?”
“그래. 그러자.”
레오나드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채이는 그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잠시 뒤에 준비될 점심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 깊이 들어가진 않고, 숲의 입구 근처만 좀 걸을 생각이었다.
솨아아아.
한차례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이 사락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채이는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인적이 비교적 드문 곳이고, 다듬어진 숲길 주변으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보니 공기가 참 시원했다.
“채이. 손잡아도 돼?”
마침 레오나드가 장난스럽게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작게 웃은 채이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채이의 눈에는 사귀게 된 지 꽤 되었음에도 이런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허락을 구하는 레오나드의 모습이 썩 귀여웠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나름대로 채이를 향한 존중이자 애교였다.
“채이한테서 나는 냄새 좋아….”
깍지 껴서 잡은 손을 끌어당긴 레오나드가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하지만 사실 좋은 냄새라고 하면 레오나드의 페로몬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취할 듯 달콤하고 짙은 초콜릿 향. 그 향이 이따금 우유에 녹인 것처럼 부드러워질 때면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곤 했다. 하지만 직접 입에 담기에는 상당히 낯부끄러워서 채이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하며 걷고 있을 무렵….
어디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채이와 레오나드가 잠시 멈춰 선 채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둘 사이에 긴장 어린 분위기가 감돌았다. 곧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토끼처럼 생겼으나 이족보행을 하는 작은 생물이었다. 몸체가 새까맣고 눈동자는 빨간색이며 발톱은 날카롭다. 그건 일반 동물이 아니라 ‘재키’라고 부르는, 지극히 온순한 6등급의 마물이었다.
“재키가 있었네.”
마물을 알아보고 긴장을 푼 채이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재키는 지나가다 말고 웬 거대한 생물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가 싶었는지, 멈춰 서서 입가를 움찔거리며 채이를 올려다보았다. 제아무리 온순한 생물이라 해도 낯선 존재가 다가오면 충분히 경계할 만한데 재키는 채이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 숲에도 마물이 많이 살아?”
“많이는 아니고… 가끔 6등급 마물들이 출몰할 거야.”
“그렇구나.”
채이가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재키는 도망가지 않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솜 인형처럼 생겨서 두 발로 뽈뽈 걸어 다니는 재키는 마니악한 취향을 가진 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인기 있는 마물 중 하나였다.
“귀여워라.”
“발톱 날카로우니까 안 긁히게 조심해.”
“응. 걱정하지 마.”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더니 재키가 한참 관심을 보였지만, 어디선가 들린 소음에 결국은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조금 아쉬운 눈치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채이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채이. 이만 돌아갈까?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그래야겠다.”
점심 식사 준비도 대강 끝나 가고 있을 테니까. 돌아서는 채이의 뺨에 입을 맞춘 레오나드가 손을 내밀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채 마차가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샘물가에서 간단히 씻은 일행들은 다시 마차에 올라타 이동을 시작했다. 밤이 깊어져서는 영지 경계선을 벗어나 작은 백작령의 숲까지 도착했다. 루드비스 가문이 다스리는 루드비레 영지에 도달하려면 앞으로 작은 영지를 몇 개는 더 넘어야 했기에 일행들은 근처 여관을 하루 대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관방을 배정하는 등, 안쪽이 부산스러워서 채이가 잠시 바깥에 앉아 있을 무렵.
“채이 님. 이거 쓰세요.”
채이 곁으로 다가온 에녹이 모포를 건네주었다. 이제는 밤이 되면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혹시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여분으로 챙겨 온 물건이었다.
“고마워, 에녹.”
채이는 모포를 받아 몸에 걸쳤다. 하지만 컴베스트의 수도인 블렌츠를 포함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컴베스트의 지역들은, 북쪽 끝자락… ‘소설 속 채이’가 원래 살았던 루브너 마을에 비하면 연교차가 더 적고 겨울에 눈도 많이 안 오는 곳이었다. 이 정도 추위는 채이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브너의 숲 언저리에서 살았을 때는 정말 추웠지.’
문득 레오나드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올라서 피식 웃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서 돌아보니 마침 모포를 두른 채 다가온 레오나드가 옆자리에 걸터앉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바람 쐬고 있었어.”
채이가 벽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그러자 레오나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살포시 눈을 접으며 웃음기를 띠었다. 그 미소에 여관 창문으로 빠져나오는 불빛이 어룽거리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채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하얀 뺨을 가볍게 터치하듯 문질렀다. 가끔 닿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리고 늘 담백한 채이가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순간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았던 레오나드는 열기를 띤 눈을 내리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채이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자 허락이라 받아들인 레오나드도 입술을 겹쳤다. 쌀쌀하게 감돌던 공기가 따뜻한 열기로 덮이고,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입 안을 적셨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달뜬 숨이 뱉어질 즈음… 레오나드가 채이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모포 속에서 나온 손은 채이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그가 흥분할 때마다 내보내는 특유의 페로몬이 감각을 자극하기 시작하자, 쏙 빠져 있던 정신을 되찾은 채이가 붉어진 얼굴로 레오나드를 말리려고 했다.
“레오. 바깥에서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사람 없어도 못 만지게 하잖아.”
“어… 내가 그랬던가?”
레오나드의 가늘어진 시선이 채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채이가 옆으로 눈을 굴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젠 연인 사이인데 그간 너무 도망 다니기만 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채이에게 키스 이상의 진도는 아직 겁이 나는 영역이었다. 그때 부루퉁한 얼굴로 채이를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돌연 짓궂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럼 채이. 여관방으로 들어갈까? 아무도 안 보는 곳.”
허벅지에 놓인 레오나드의 손이 야금야금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 손을 빠르게 잡아 멈춘 채이가 화끈해진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 레오나드의 웃음 섞인 숨이 귓가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크흠.”
그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이는 델리온이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깬 존재가 델리온임을 안 레오나드는 훨씬 더 불만 어린 얼굴로 눈을 흘겼다. 델리온도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게 조금 무안한 듯 슬쩍 눈을 돌리고서 말했다.
“이 근처 숲은 5등급 이상의 마물도 곧잘 출몰하는 지역이라… 간혹 마을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하여,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 주려고 온 거였다. 크흠. 그뿐이니 나는 이만 다시 가 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얼른 자리를 피해 주려는 것처럼 발걸음을 빨리하여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방해의 효과는 컸다. 한숨을 폭 내쉬며 물러서는 레오나드의 모습이 어찌나 시무룩해 보이던지. 계속 더 깊은 스킨십을 원했는데 못 하게 했으니 얼마나 애가 탈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여 이제는 용기를 내기로 한 채이가 레오나드의 손등을 제 손으로 조심스레 덮으며 말했다.
“다음에… 레오.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정확히 뭐가 좋다는 건지 직접 입에 담진 않았지만 레오나드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진짜지? 약속한 거야. 채이가 좋다고 한 거니까.”
재차 확인하는 물음에 채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확신을 주었다. 그랬더니 언제 시무룩해 있었냐는 듯 채이를 바라보는 레오나드의 눈에 반짝반짝 빛이 들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큰 인내심을 얻은 건지 이후로는 스킨십도 잘 자제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은 후 일행들은 다시 짐을 챙겨 이동을 시작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단했다. 루드비레 영지와의 거리가 많이 멀다 보니 여관에서 머문다고 해도 피로가 상당히 쌓이는 탓이었다. 페르난데도 랭커스터 저택으로 올 때 항상 이렇게 고달픈 길을 지나왔겠구나. 채이는 새삼 그가 왜 저택으로 놀러 오면 밍기적거리면서 오래 머무르려고 했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채이와 일행들은… 루드비스 가문의 저택이 있는 라이오스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