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자신이 아는 그 채이가 맞냐’니….
“예?”
채이는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하여서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자 채이가 제게 화를 낸다고 생각한 건지 크게 겁먹은 요신이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해요! 뭔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서… 죄송해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채이가 손을 흔들며 두려워하는 요신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작게 웃음 지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어딘가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요. 그럼 달라진 거라고 해 둘게요.”
채이의 대답에 요신이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분명 눈앞의 사람은 자신이 아는 채이와 얼굴이 같은데도 요신은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고 정중한 말투라든가, 햇살처럼 따뜻한 분위기라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신은 신기하게도 더 이상 그의 존재가 두렵지 않았다.
며칠 뒤 요신은 새로 발급된 신분패를 소중히 품고서 랭커스터 저택을 떠났다. 노예로 오래 살아온 탓에 혼자서 잘 살아 갈지 걱정이 되었지만… 랭커스터 쪽에서 틈틈이 편의를 봐줄 생각이라고 하니 괜찮으리라.
채이는 그렇게 기꺼이 도와주는 레오나드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물론 레오나드는 채이가 그 사내를 신경 쓰는 것이, 그 사내가 자꾸만 채이의 기억 한편에 남을 것이 탐탁지 않아서 그런 거였지만.
벤냑스는… 채이에게 고백했던 그날 따로 말도 없이 코네러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페르난데는 집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 이유를 무척이나 궁금해했지만 채이는 그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그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확실하게 잘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렇게 벤냑스와 페르난데가 떠나고 다시금 찾아온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채이 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또 한숨을 내쉬고 말았던 것일까. 오랜만에 채이를 독차지한 채 느긋이 차를 들이켜고 있던 에녹이 채이에게 물었다. 그에 찻잔 손잡이를 엄지로 문지르며 상념에 잠겨 있던 채이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채이는 에녹에게도 벤냑스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고민 상담을 해야 할 만한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흠. 뭔가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표정이신데요?”
“그런가.”
어깨를 으쓱인 채이가 작게 웃어넘겼다. 그때였다.
“채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드였다.
채이가 반가운 기분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는 무언가를 손에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일이 일찍 끝나서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전달할 게 있어서 잠시 나온 모양이었다.
“그게 뭐야?”
“채이 앞으로 온 초대장이야. 그리고 이건… 페르난데가 보낸 거고.”
레오나드는 어딘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으로 페르난데의 편지와 초대장을 흘겨보곤 채이에게 건넸다. 종이봉투 두 개를 넘겨받은 채이는 우선 초대장의 봉인을 풀고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아스타리우스 제국의 화합을 도모하는 향연’에 여러분을 초대하니 참석해 달라는 형식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주최는 루드비스 가문이었다. 읽어 보니 매년 한 번씩은 루드비스 가문에서 아스타리우스 제국 소속의 귀족들을 모아, 친목 도모를 겸하는 연회를 여는 것 같았다. 이번 연회는 특히 세계수와 관련된 문제가 잘 해결된 것에 대한 뒤풀이도 겸하는 듯했다.
“루드비스 가문이 보낸 연회 초대장이네요?”
고개를 내빼고 슬쩍 내용을 본 에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연회장이 채이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 보였다. 베타인 채이를 거의 준귀족 취급해 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채이는 다음으로 페르난데가 보낸 편지를 뜯어 펼쳤다. 길게 적어 보냈던 저번 편지와 달리 이번 편지는 아주 간략했다. 요약하면 꼭 놀러 오라는 거였다. 채이가 천천히 읽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던 레오나드가 말했다.
“페르난데 녀석이 관심 보이는 이가 대체 누구인지 그들도 궁금했던 거겠지. 하지만 강제는 아니니까 꼭 갈 필요는 없어, 채이. 그리고 채이가 안 가면 나도 가지 않을 생각이야. 멀리 이동해야 하니 좀 피곤하고… 어차피 가주도 참석할 텐데.”
그건 은근히 가지 말자는 뉘앙스로 흘린 말이었다. 채이가 루드비스 3세와 황후의 눈에 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리고 지방분권적인 형태인 아스타리우스 제국에서 황제는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황제위라는 성향이 강해 귀족들의 연회 참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유를 들어 거절하면 그만인 것이다.
채이도 레오나드에게서 가기 싫어하는 낌새를 느끼고 고민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연회, 다른 귀족들도 전부 모이는 거지? 그 코네러 가문이라든가?”
“그럴걸. 아스타리우스의 5대 대공작 가문에겐 전부 초대장이 가니까.”
채이의 물음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5대 대공작 가문’이란 아스타리우스를 대표하는 제국의 주춧돌이자 선제후 권한을 가진 다섯 가문을 말한다. 황제의 가신이면서 동시에 많은 가신 귀족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실상 독립 국가의 군주들.
생각해 보니 코네러 가문도 바로 그 아스타리우스의 5대 대공작 가문 중 하나였다. 참고로 클레망과 셀리언의 본가인 롤라이스 가문과 스테폰 가문, 현재 황제를 겸직하고 있는 루드비스 가문도 대공작 가문이었다.
잠시 생각해 본 채이가 본인의 의사를 표현했다.
“나는 가 볼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연회에 가서… 벤냑스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서 확실하게 거절하는 거다. 질질 끌어서 좋을 것도 없고, 또 이런 계기가 아니면 언제 벤냑스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레오나드에게는 그 이유를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오나드는 채이가 가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여기서 가려면 꽤 멀어서 내일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미리 준비해 둬.”
“너는 피곤하면 쉬어도 되는데. 나 때문에 같이 갈 필요는….”
“채이 혼자 보내는 게 더 싫어.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거라고 생각할래.”
레오나드가 허리를 숙여 채이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닿자 괜스레 채이의 심장이 떨렸다. 채이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올려다보자, 레오나드는 옅게 미소를 지어 주고는 이내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 준비하는 거 도와주도록 해.”
“네!”
“난 남은 업무가 있어서 이만 가 볼게. 나중에 보자.”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채이는 레오나드의 허리를 토닥여 준 뒤 다시 일하러 떠나는 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따뜻한 분위기를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곧 흐물흐물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채이 님, 채이 님.”
에녹은 부담스러울 만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나드 공자님과는 최근 어떠세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연애 이야기라고 했던가. 오히려 에녹이 지금까지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 용하다. 에녹은 최근 들어 안정기에 들어선 듯한 두 사람의 연애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입장이었기에 더 그러했다.
그리고 채이는 에녹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답했다.
“어? 뭐, 평소처럼 잘 지내지.”
“평소처럼 잘 지낸다 함은… 혹시 동침도 하셨나요?!”
자기가 말하면서도 수줍은 듯 에녹이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외쳤다. 하지만 여전히 에녹의 과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채이는 속으로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자주 그러는 편이야. 레오가 워낙 좋아해서.”
당장 어제도 ‘채이 옆에 있으면 피로가 풀린다’면서 기어코 한 침대에서 딱 붙어 자고 갔다. 여기서 ‘레오나드가 워낙 좋아한다’는 말은 그냥 저와 붙어 있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었지만 에녹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곤 발그레해진 제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머! 그렇구나. 채이 님… 채이 님은요? 어떠셨어요? 베타라서 힘들진 않으셨을지….”
남성 오메가는 상대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곳이 부드러워지는 체질을 가졌다. 액체가 나와 큰 고통도 없고 쉽게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타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지금까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고충이 있었을 터.
에녹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채이는 왠지 모를 미묘함에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면서도 대답을 이었다.
“나도 싫진 않지. 힘든 건, 그러네. 확실히 덩치가 있다 보니 좀.”
그건 ‘아무리 침대가 크다지만 역시 레오나드의 덩치 때문에 한 침대에서 자기에는 약간 불편하다’는 뜻으로 공감하며 한 대답이었다. 거기서 뜬금없이 베타가 왜 나오는 건진 의문이었으나 되물어보기 애매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크, 크기가… 엄청난가 봐요.”
“응?”
“역시 공자님이야.”
“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대화가 이어지는 게 참으로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때 벌떡 일어난 에녹이 의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짐부터 챙기도록 해요, 채이 님. 가면서 더 이야기해 주실 거죠?!”
“어… 어. 그래.”
같이 잤다는 것 말고 무슨 이야기를 더 해 달라는 걸까. 채이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에녹이 말했던 ‘동침’이 ‘그렇고 그런 뜻’이었음은… 며칠 뒤 마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는 도중에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