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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84화 (84/105)

084화

그러한 레오나드의 시선이 어째 낯부끄러웠던 채이가 슬쩍 눈을 굴릴 때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가 눈앞에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차린 자첸 자작이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이건 아니 될 일입니다! 망할, 델리온 공을, 지금 당장 델리온 공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아주 제대로 난 모양이었다.

거칠게 씩씩거리는 자첸 자작의 행동 때문인지 요신이 어깨를 움칠 떨었다. 혹시 몰라 채이가 요신의 앞을 보호하고 섰고, 냉혹하게 눈을 내리뜬 레오나드가 자첸 자작을 흘겨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 눈에 깃들어 있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하나 레오나드의 등 뒤에 서 있는 채이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뒤처리는 내가 할게, 채이. 저 녀석 데리고 나가 있어.”

“…응. 알겠어.”

부드럽지만 단호한 뉘앙스였는지라 채이도 군말 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요신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하자, 아까보다 조금 진정된 듯 보이는 요신이 머뭇거리다가 도망치듯 후다닥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가 버리고….

레오나드와 남게 된 자작 부부는 끔찍한 침묵 속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아래로 늘어트려진 앞머리 사이로 얼핏 비친 표정은 태엽이 멈춰 버린 인형처럼 무미건조했다. 조금씩 흘러나와 목을 움켜쥐듯 들어차기 시작한 우성 알파의 짙은 페로몬은 두 사람을 더욱 압박하고 있었다.

‘젠장. 그 망나니 애새끼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자첸 자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원래는 여기까지 끌고 올 일이 아니었다. 요신에게 세뇌를 걸어 무력하게 만들고 말을 듣게끔 하면 언제나처럼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페르난데를 만나서 그의 이능향에 의해 자작 부인의 이능향이 무효화됐고, 불필요한 신경전에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그때 차갑게 침묵하고 있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노예를 소유하는 게 불법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이 모를 리는 없겠죠.”

“공자님! 저희는….”

“오늘부로 자첸 가문의 가신 자격을 박탈하고 컴베스트 땅에서 영구 퇴출하겠습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까보다 더 기가 차는 발언에 자작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작 부부는 가신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모자라 영구 퇴출까지 하는 건 과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 있을 뿐이었다.

절망스러운 순간이다.

자작 부부에게는 귀하게 키운 어린 자식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이대로 쫓겨나게 된다면 앞날이 막막해진다. 힘든 일은 노예에게 전부 시켜, 할 줄 아는 거라곤 지시하는 것밖에 없는 두 사람의 아들이 앞으로 얼마나 고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자작 부부는 그 순간까지도 일말의 희망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었다.

‘랭커스터가 진짜 우리에게 매정하실까?’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컴베스트 군주인 델리온이었다면 모르겠으나… 그는 아직 후계자 신분의, 새파랗게 어린 자였기에. 레오나드가 자신들을 벌하겠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랭커스터를 대표하는 의견이라곤 감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조그만 관할 구역을 가진 ‘자작’이기는 하나 작위를 가지고 오랜 시간 컴베스트를 위해 헌신한 자신과 다르게 레오나드는 작위도 아직 없으며 경험도 부족한 한참 아래의 후배나 다름없었다.

즉 레오나드가 적어도 공작위를 잇기 전까지는 작위를 가진 자첸을 좀 더 존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컴베스트 대공작의 아들이라지만 그 사실이 곧 자작을 만만하게 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할진대 감히… 자기 멋대로 그런 결정권을 행사해?’

일단 레오나드와 좋게 풀고 난 뒤 델리온을 만나 간청해 볼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리란 걸 예감한 자첸 자작은 악독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잘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공자님. 저희를 이런 일로 건드렸다간 다른 가신 귀족들 사이에서도 잡음이 나올 거예요.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레오나드 공자님의 판단이 정말 컴베스트 귀족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노예를 소유한 게 우리뿐인 줄 아느냐.

자첸 자작은 은근하게 비꼬고 있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뻔뻔한 태도다. 레오나드가 대답하지 않자 더욱 기고만장해진 자첸 자작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무식한 자신감은 우성 알파를 눈앞에 둔 두려움도 떨쳐 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레오나드 공자님께서 그리 무자비한 선택을 하시겠다면 저희도 가만있진 않을 겁니다. 공자님도 들으셨지요? 방금 방을 나간 남자의 정체가 노예상이었단 것을. 그런 자와 엮이고도 그 자리가 온전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딱 봐도 애틋한 사이인 거 같아 안타깝기는 합니다만 공자님이 저희를 이리 내치시겠다면 저희도 동아줄로써 이용할 수밖에….”

자첸 자작이 그렇게 한참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한순간이었다.

머리채를 잡힌 자첸 자작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꼬꾸라져 이마를 찧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자작 부인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뒤이어 밀려오는 아찔한 통증. 자첸 자작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인식하기도 전에 강제로 고개가 들렸다. 눈앞에 놓인 것은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었다.

그리고 그건 레오나드의 것이었다.

어느새 쭈그려 앉은 레오나드가 자첸 자작을 무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곧 붙잡은 자첸 자작의 머리통을 장난감처럼 가벼이 흔들며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일상 이야기를 하듯 심상한 목소리.

자첸 자작이 찢어진 이마와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자작 부인이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도 내일 점심 뭐 먹을까,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레오나드의 태도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러는 동안 그의 위협적인 페로몬은 더욱 농도 짙게 깔렸다. 공포로 바짝 얼어붙은 자첸 자작의 이빨이 딱딱 떨리며 부닥치기 시작했다.

“채이가 노예상이었다는 거. 안 지는 꽤 됐죠.”

“제… 제게 이런 짓을 했다간….”

“착각하지 마십시오. 자첸 자작.”

도중에 말을 끊은 레오나드가 자첸 자작의 머리통을 조금 더 위로 들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파랗게 번뜩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아득한 심해를 연상케 했다.

“우린 동등하지 않아요. 지금 저는 당신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겁니다.”

“으… 으흑….”

“저는, 사실 신경 쓰지 않거든요. 당신 같은 버러지가 뭐라 지껄이든, 아무것도.”

나직이 속삭이는 레오나드의 잔혹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자 하얗게 질린 자첸 자작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오나드를 가리켜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자는 그게 귀족이든 뭐든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성정의 폭군’이라 하더니 가히 그 소문대로였다. 요즘은 놀라울 만큼 유해졌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오히려 델리온보다 더 대화가 잘 통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젠장! 처음부터 델리온 공에게 갔어야 했는데.’

자고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제일 무서운 법. 이 미친놈에게 더 대항해 봤자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자첸 자작은 결국 힘 풀린 눈썹을 늘어트렸다. 코에서 피가 뚝뚝 흘러 아래로 떨어졌다.

“서… 선처해 주십시오… 공자님. 저희 가족들을….”

그 꼴을 보고 비웃듯 콧숨을 뱉은 레오나드가 그의 머리통을 놓아주고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 떠날 채비를 하십시오. 며칠 뒤면 당신네 집으로 기사들이 찾아갈 테니.”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가는 레오나드의 등 뒤로 보이는 두 사람은 절망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채이가 요신을 데리고 1층 로비로 내려가 일행들과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레오나드도 볼일이 다 끝났는지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 레오나드를 채이가 반겨 주었고 일행들을 한 번 훑어본 그는 채이에게로 다가가 뺨을 감싸 쥐었다.

“레오.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됐어. 이제 저자는 자유롭게 해방될 거야.”

“그렇구나… 고맙다. 그리고 수고했어.”

채이는 여러 감정이 담긴 손짓으로 레오나드의 허리를 쓸었다.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지 레오나드가 설핏 웃었다. 잠시 후 그는 채이 뒤쪽에 서 있는 일행들을 돌아봤다. 채이 앞에서는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인 양 부드럽던 레오나드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져 있었다.

“집사장. 당신은 저 위에 있는 자작 부부를 저택 바깥까지 안내해드리세요.”

“예.”

“그리고 에녹. 너는 그 녀석을 데리고 따라와라. 신분패를 새로 발급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공자님.”

고개를 꾸벅 숙인 에녹이 요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쥘 동안 레오나드는 채이에게 다녀오겠다는 뜻으로 눈짓했다. 레오나드가 앞장서서 어딘가로 향하고 에녹도 요신을 달래며 레오나드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울상이 된 자작 부부가 집사장과 함께 로비 쪽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로비 한가운데에 서 있는 채이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지나갔다. 집사장도 채이에게 고개만 까닥인 후 자작 부부를 데리고 저택을 나갔다.

그리되니 저택 로비에 남게 된 건 페르난데와 벤냑스 그리고 채이뿐이었다.

이내 페르난데가 뒷목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나들이는 여기서 쫑난 것 같으니 난 이만 가서 쉬련다. 어차피 내일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서 짐도 다시 챙겨야 하고.”

“그래, 페르. 오늘 정신없어서 피곤했겠다. 가서 푹 쉬어.”

“어. 내일 보자.”

채이는 등 뒤로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사라지는 페르난데를 잠시 지켜보다가, 벤냑스를 돌아보았다. 채이와 단둘이 남게 된 벤냑스는 어쩐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몸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닌지 걱정한 채이가 벤냑스를 배려했다.

“미안해요, 벤. 기껏 놀러 와 주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벤도 얼른 가서 쉬어요.”

하지만 벤냑스는 그러한 채이의 제안에도 선뜻 떠나지 않은 채 더욱 우물쭈물하고만 있더니 발그스름하게 뺨을 붉혔다. 그에 채이가 ‘왜 그러나’ 의문을 가질 무렵, 벤냑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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