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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83화 (83/105)
  • 083화

    채이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결국 불법을 저지른 건 저쪽이고 이렇든 저렇든 아쉬울 것도 저쪽이니, 이쪽도 신사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가 턱짓하며 두 사람에게 다 들리도록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채이. 이 녀석 데리고 도망갈까?”

    뒤를 생각하지 않은 막무가내에 가깝긴 하나 그게 페르난데답기도 했다.

    그때 노년의 여성이 발끈하여 외쳤다.

    “요신은 저희가 입양한 아들이에요! 아들을 뺏어 가겠다니 범죄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페르난데는 흔들리지 않고 더 얄미운 얼굴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시다? 쟤가 진짜 입양한 애라면 당연히 입양 신고서도 있겠지? 노예 계약서가 아니라. 걱정하지 마. 정말 너희들의 말이 맞는다면 그땐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고 기꺼이 벌받을 테니까. 물론 너희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입양 신고서를 정말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참… 모를까 봐 말해 두는데 입양 신고서는 위조하기 힘들 거야. 입양을 허락한 수도원에서만 써 주는 거니까.”

    거기다 고아를 입양한 집은 수도원에서 보내는 비정기적인 방문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조작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사용인으로 들이는 것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인지라 노예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귀족에겐 함부로 손을 뻗칠 수 없다 보니 진짜 입양아인지 사용인으로 들인 건지 등에 대한 확인 절차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지만 말이다.

    “잊으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건데 이곳은 랭커스터의 영지입니다. 아무리 루드비스 님이 황제의 아들이라지만, 선은 지키셔야죠. 컴베스트의 가신 귀족을 이렇게 모함하고도 무사하실 것 같아요? 랭커스터가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루드비스 님이 아직 어리고 순진하셔서 잘 모르시는 걸까요?”

    “그렇게 억울하면 직접 랭커스터 가에 찾아가서 징징거려 보든가.”

    “그리 협박하시면 못 할 것 같습니까? 요신은 정말 저희의 소중한 아이란 말입니다!”

    노년의 남성이 급기야 버럭! 목소리를 높이자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눈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역시나 그들은 무심하게 혹은 귀찮은 일이 터졌다는 듯 눈살을 찡그리다 지나갈 뿐이다. 요신만 더욱 쪼그라들어 벌벌 떨고 있었다.

    ‘데리고 도망간다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채이는 페르난데와 노년 부부가 말싸움하는 동안 요신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이 상태로는 불가능하겠지.’

    요신은 노년 부부를 앞에 둔 이후 공포에 빠져 외부 상황에 제대로 된 반응을 못 하는 상태였다. 채이가 도망가자고 말한들 거기서 진정성을 느낄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요신은 더 이상 예전처럼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덜렁 안아서 데리고 도망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떡할까.’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쉬운 방법을.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채이는 잠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가 보실까요? 랭커스터 가로.”

    이어 채이의 가라앉은 시선이 또렷하게 노년 부부를 향했다. 그 금색 눈동자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노년 부부는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두 사람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물러서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믿는 구석도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랭커스터가 가신 귀족인 우리를 내치겠어?’

    거대한 영지의 군주를 따르는 가신 귀족이 많다는 건 곧 권력이 강하고 명망이 높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말하면, 쟁취한 힘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가신 귀족들의 기분을 어느 정도 맞추어야 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곧 영지 군주가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성 알파만 후계자로 뽑을 만큼 공들이는 랭커스터라면 알고도 흐지부지 넘어가 줄 가능성이 컸다.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랭커스터는 우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지.’

    황제는 귀족들의 선택으로 결정되기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사실상 황제보다 각 영주의 권력이 더 강한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채이가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일은 없으리라. 그들의 유일한 실수는… 레오나드에게 있어 채이가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노년 부부는 보란 듯 앞장서서 랭커스터 저택으로 향했다.

    아들이라며 그리 소리치던 요신은 정작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숨죽여 지켜보던 에녹이 채이 대신 요신을 달래어 움직일 수 있도록 부축했다. 그걸 확인한 채이가 노년 부부의 뒤를 먼저 따라갔다. 귀족들 간의 사정을 아는 페르난데와 벤냑스는 채이가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건가 싶어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채이의 결정을 믿기로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정말 랭커스터 저택 앞까지 당도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한 집사장이 일행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노년 부부는 자신들이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자첸 자작입니다. 랭커스터에 급히 이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희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집사장은 슬쩍 채이 쪽을 돌아보았다. 뒤이어 에녹이 부축하고 있는 거지꼴의 사내까지 보고서는 사정을 대강 눈치챈 듯했다. 그는 다른 말을 더 얹지 않고 그저 저택 안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사장을 뒤따라 도착한 곳은….

    “레오나드 공자님의 집무실입니다.”

    델리온의 집무실이 아닌 레오나드의 집무실이었다.

    그건 집사장의 은근한 속내가 얽힌 선택이었으나, 자작 부부는 그것까지 읽어내진 못했다. 그들은 상대가 레오나드든 델리온이든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만 있으면 상관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노련한 델리온보다 레오나드가 더 구슬리기 쉬울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채이 또한 처음부터 레오나드와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기에 집사장의 선택에 누구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마침내 집무실 문이 열리고 일하는 중이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레오의 일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채이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잠시 레오나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즈음 펜대를 내려놓은 레오나드가 흘깃 일행들을 훑어보고 물었다.

    집사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첸 자작님께서 급히 이르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다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작 부부는 무릎을 꿇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저희의 고충을 들어 주세요, 공자님!”

    “루드비스 님께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시며 저희 아들을 데리고 갈 거라 협박했습니다. 저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를 간악한 사내는 저희 아들을 보고 노예라느니 뭐니 끔찍한 소리를 지껄였고요. 이건 명백히 랭커스터 가를 향한 모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레오나드에게로 향했다. 레오나드는 다소곳하게 손깍지를 낀 채 아무런 말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자작 부부를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얼굴…. 익히 듣기만 했던 그 차가움을 눈앞에 둔 자작 부부가 마른침을 삼킬 무렵.

    문득 레오나드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그 끝에 있는 건 채이다. 이미 모든 정황을 눈치챘고 채이와 노예의 연결 고리도 어느 정도 이해한 레오나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채이가 말을 이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떡하면 좋겠어? 채이.”

    잠시 침묵하던 채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일단 너희는 잠시 나가 줄 수 있을까? 레오랑 대화하고 싶은데.”

    그 부탁에 집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에녹과 페르난데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갔다. 아예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 건지 멀어지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자 조용한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자 자작 부부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고, 요신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곧 요신을 내려다본 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신. 레오, 널 만나기 전에… ‘내가’ 노예로 팔아넘겼던 애야.”

    사실 채이는 이렇게 말했다가 레오가 충격을 받거나 제게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말하길 망설였다. 정말 실망한다면 억울한 일이기도 할 터다. 하지만 ‘내가 이 몸을 차지하기 전의 채이가 그랬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설명할 방법은 없었고, 요신이 노예라는 걸 확신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심하게 외면하고 레오의 뒤에 숨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이 몸뚱이가 지은 죄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지금 이 몸뚱이를 차지하게 된 건 채이 본인이었으니까.

    채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그 사정을 모르는 요신이 보기에는 다를 것이 없을 터. 오히려 부정하고 외면해 봤자 변명처럼 들릴 것이며 그건 요신에게는 또 다른 상처일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럽고….”

    그러니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해야 했다.

    “평생 속죄해야 할 죄악이야.”

    채이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고해와도 비슷한 채이의 발언에 레오나드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차분한 얼굴이었고, 도리어 경악하고 있는 건 자작 부부 쪽이었다. 거의 자백과 다름없는 채이의 행동을 자작 부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에 널 이용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어.”

    레오는 분명 자신이 바라는 것을 기꺼이 들어줄 터였다.

    착한 아이니까.

    그 착한 마음씨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채이 본인도 진정성을 느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아이를 꼭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

    레오나드가 부드럽게 녹은 시선에 채이를 오롯이 담았다. 그 시선을 채이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오. 딱 이번 한 번만 내 억지를 들어줄 수 있겠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다가섰다. 그 앞에서 허리를 살짝 수그린 그는 채이의 손등을 잡아끌어, 그 위에 입을 쪽 맞춘 뒤 눈을 들어 올렸다.

    “얼마든지.”

    반달처럼 슬쩍 접힌 레오나드의 눈빛은 사탕처럼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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