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응? 블렌츠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네.’
컴베스트는 사시사철 온화하거나 서늘한 기후를 가진 나라여서 차가운 간식이 비교적 덜 발달했고 사람들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알고 있다. 그래서 컴베스트 안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를 보기 힘들었다.
분명 그랬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가게가 이렇게나 많이 생겼지?’
이제 보니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호기심에 하나씩 사 먹거나 타 영지에서 온 사람들이 반가운 마음에 구경하고 있을 뿐, 역시나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스크림을 파네요? 예전에는 못 봤던 거 같은데.”
벤냑스도 채이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리 의문을 표했다.
뭐, 어쨌든.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좋은 것이니.
“벤.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채이 님도 드실 건가요?”
“그러려고요.”
“그럼 저도 아이스크림 좋아요!”
원래부터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던 채이와 신기해서 호기심이 생긴 벤냑스는 서로 다른 이유로 아이스크림 가게를 선택했고, 페르난데는 그런 두 사람을 잠자코 뒤따랐다.
“페르. 너는?”
“나는 그다지 안 끌려서.”
채이의 물음에 시큰둥하게 대답한 페르난데가 아이스크림 가게들을 쭉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유를 찾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간판 아래에 그려진 상표를 발견한 페르난데가 게슴츠레 눈매를 좁혔다.
‘허?’
그 상표는 바로 랭커스터 가와 연계된 상단의 것이었으니까. 이득이 되지 않는 짓을 상단이 자처해서 할 리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의 강력한 입김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입김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채이.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지.”
“응? 어떻게 알았어?”
페르난데의 단정적인 발언에 아이스크림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벤냑스도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고 채이를 돌아보았다. 물론 페르난데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손해 볼 줄 알면서 운영비 닦아 쓸 정도면 말 다 했지.”
“뭐?”
“아무것도 아니다. 이만 돌아가자고.”
손을 설레설레 내저은 페르난데가 먼저 돌아섰다. 마침 아이스크림이 나와서 받아 든 채이가 벤냑스를 챙기며 몸을 크게 돌릴 때였다.
툭!
누군가와 채이의 몸이 강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몸을 돌리던 중에 부딪힌 거라 미처 반응할 수 없었고 그 탓에 방금 받았던 채이의 아이스크림이 셔츠 위로 엎어졌다. 채이와 부딪혔던 누군가는 연약하게 튕겨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엇.”
아까운 아이스크림이 엎어져서 한 번,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한 번 더 당황한 채이가 잠시 주춤했다. 크게 놀라 버린 벤냑스가 괜찮으냐 물었고, 휑하니 가 버리던 페르난데는 벤냑스의 외침을 듣자마자 채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은데. 저기,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채이는 일단 쓰러진 사람부터 일으켜 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제게 가까워지는 채이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굼벵이처럼 움츠러든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외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그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모습에 채이의 말문이 턱 막혔을 때였다. 사내는 연신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말만 반복하더니 이제는 채이의 옷에 쏟아진 아이스크림을 자기 소매로 닦으려 했다. 어안이 벙벙하다가 금방 정신을 차린 채이는 다가오는 사내의 팔을 붙들어 멈추게 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힉! 때리지 말아 주세요…!”
“안 때립니다. 아무것도 안 해요.”
채이가 황급히 손을 떼어내고 거리를 둔 채 다독였음에도 사내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끔거렸지만, 마치 엮이면 안 될 일이라는 듯 빠르게 지나가거나 아예 무시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굉장히 찝찝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노예인가….”
돌연 벤치로 향하다 말고 되돌아온 페르난데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노예’라는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한 채이가 고개를 들어 페르난데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설명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페르난데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아스타리우스 안에서 노예를 부리는 건 불법이야. 불법이지만… 일부 귀족들 사이에선 여전히 이용되고 있거든. 사용인이다, 양자로 들인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서 버티면 잡아넣기 힘든 게 현실이라.”
…그랬었던 건가. 그래서.
엮이기 싫어서 기피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고 지나가던 일부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노예상이던 소설 속 채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을 사람들이 소설 속 채이의 만행을 알았지만 법으로 심판하려고 하진 않았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노예를 사들이는 주 고객층이 귀족이니까.’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대부분 권력자들인데, 그런 권력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마음이 착잡해진 채이는 조용한 시선으로 다시금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벌벌 떨고 있던 사내도 힐끔 눈을 들었다가 채이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아.”
채이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채이는 사내의 얼굴을 정확히 본 직후 과거의 기억 조각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 눈앞에서 새파래진 얼굴로 경악하는 이 가녀린 사내가 한때 노예상이었던 소설 속 채이에 의해 팔려 간 피해자 중 한 명이란 소리였다.
이름이 분명… 요신이었던가.
그런데 그도 채이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요신은 절망한 사람처럼 스르륵 쓰러지더니 다시 두 손을 간절히 모았다.
“아… 죄… 죄송해요. 다신 도망치려고 안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아무래도 자신을 부리던 귀족에게서 도망치던 중에 하필이면 채이와 만나 버린 탓에, 자신이 현 주인에게서 도망치려던 사실을 채이가 이미 알고 잡으러 온 거라 착각하는 듯했다.
“…….”
그래. 노예상으로 돈을 벌었으니 실제로 팔아넘긴 노예도 있었겠지.
지금까지 안일하게 넘겨 왔던 문제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소설 속 채이’가 저질렀던 일이고 지금 채이 본인이 한 일은 아니기에 억울했다. 하지만 그러니 더욱, 기억을 공유하게 된 입장에서 분노와 죄책감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채이는 동요로 흔들리는 눈에 사내의 안타까운 모습을 담고 있다가 입 안쪽 살을 꾹 깨물었다.
“요신!”
그때 누군가가 엄한 목소리로 요신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한 쌍의 남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옷차림새로 보아 어느 귀족 가문의 노년 부부 같았는데, 요신은 그들을 보자마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노부부는 그런 요신의 상태를 뻔히 눈치채고 있음에도 뻔뻔한 얼굴로 다가와 웃으며 부모 행세를 했다.
“아니, 이거… 낯이 익다 했더니 페르난데 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이쪽은 코네러 영식 맞으시지요? 두 분을 이런 데서 다 뵙는군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희 애가 무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대신 사과를 드려야겠어요.”
“좀 유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라서요. 죄송해요. 저희가 집에 가서 따끔하게 혼낼게요.”
채이는 조용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설 속 채이’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소설 속 채이’도 이 두 사람의 얼굴은 본 적이 없는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신…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 속에서 채이는 불법 경매장에 아이들을 팔아넘기며 이득을 챙겼고, 팔려 가는 아이들 중엔 아직 어리던 요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억으로 추측해 보건대 요신은 한 차례 경매장으로 넘겨졌다가 저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페르.”
“어.”
“노예를 풀어 줄 방법은 없을까?”
순간 호호 웃으며 가식을 떨어대던 그들의 가면에 금이 생겼다.
채이의 얼굴을 슬쩍 확인한 페르난데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방법이야 많지.”
“이봐요. 느닷없이 노예라니요?”
“그쪽은 어디 가문의 누구시길래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죠? 굉장히 불쾌하군요.”
노년 부부는 눈을 날카롭게 찢으며 채이를 노려보았다. 방법을 묻는 채이의 말은 곧 요신이 노예로 부려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런 채이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페르난데가 한숨을 쉬며 채이 앞을 슬쩍 막고 섰다. 동시에 페르난데의 페로몬이 약하게 퍼지며 일행들을 보호하듯 감쌌다. 아직 벌건 대낮인 데다가 지켜보는 눈이 많긴 하지만 혹시나 저 둘 중 한 명이 우성 오메가라서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레귤러 이능향을 쓸지도 모르니 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우성 오메가의 레귤러 이능향은 에일런 랭커스터의 것처럼 무식할 만큼 강력하지 않은 이상 지속 시간이 짧고, 채이처럼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니 채이가 걱정돼서 나선 것은 아니다. 채이의 단단함은 페르난데도 잘 알았기에. 그가 나선 이유는 어디까지나 심약한 벤냑스와 눈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예가 괜히 채이의 발목을 잡아 귀찮게 할까 봐서였다.
“저놈들이 노예를 사들였고 그 노예를 ‘노예로서 부리고 있음’을 증명해서 잡아넣기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야. 보통 노예들은 출생 신고도 제대로 안 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노예를 사는 건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귀족이니까.”
“루드비스 님! 무슨 말을….”
“노예의 신분을 위조하기라도 했다면, 더 까다롭지. 의심만으로는 저들을 함부로 수색할 권리가 없어서 확인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신분패뿐인데 그것도 이미 위조되어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무섭게 노려보는 부부를 태연히 마주한 채 조곤조곤 설명해주던 페르난데가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말은 저쪽도 노예를 강제로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일에 휘말렸을 때 보호받을 방법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