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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81화 (81/105)

081화

“페르! 이거 봐. 벤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대. 그동안 몸 상태 안 좋았는데 이제는 괜찮다나 봐. 편지 보내자마자 출발했다니까 오늘 안에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벤냑스의 편지가 도착한 다음 날.

채이는 이른 오후 시간에 만난 페르난데에게도 편지 내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큰둥하니 턱을 괴고 앉은 페르난데는 힐끔 눈을 흘겨 편지를 쳐다볼 뿐이다. 그는 꼭 감정 상한 사람처럼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래. 다행이네.”

그리고 채이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채이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표정은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데.”

“흥.”

“너 아직도 삐져 있는 거니? 내가 레오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거 미리 말 안 해줬다고?”

“아 씨.”

예민한 곳을 찔린 듯 페르난데가 성질난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며칠 전 페르난데는 랭커스터 저택을 찾자마자 레오나드에게 ‘채이와 각인을 약속한 사이가 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저런 상태였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 같아서 말 안 했던 건데. 그게 그렇게 서운했나?’

물론 페르난데는 채이에 대한 감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소식을 들어 뒤숭숭해진 거였지만,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채이는 페르난데가 서운해서 투덜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채이 님!”

그때였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퍼뜩 고개를 든 채이가 활짝 미소 지었다.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이리로 다가오는 이는 바로 벤냑스였다. 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그를 기쁘게 반겨 주었다.

“어서 와요. 일찍 도착했네요?”

“네!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야 뭐 언제나처럼요.”

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벤냑스에게 앉으라며 권유했다. 벤냑스가 집사장에게 가져온 짐을 맡기고 의자에 앉자 기다리고 있던 에녹이 빈 찻잔을 하나 건네고 거기에 홍차를 따라 주었다. 그러는 동안 페르난데와 벤냑스는 어색한 사이처럼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어제 편지 받았어요. 대체 무슨 무리를 했길래 그랬어요?”

“앗. 그게… 부끄럽네요….”

마침 던져진 채이의 질문에 수줍게 눈을 내리뜬 벤냑스가 볼을 붉혔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많이 약해서 검을 쥐거나 단련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어요. 하지만 강인한 채이 님을 보고 나니, 저도 채이 님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래저래 무리를 좀 해 버린 탓인지… 몸살이 심하게 들었답니다. 한번 아프면 오래 가는지라 이번에도 역시.”

“아. 그랬던 거군요.”

그나저나 운동 조금 했다고 몸살이 심하게 날 정도라니.

‘정말 연약한 아이네.’

이 세계를 만든 친구가 떠들어댔던 그 ‘병약수’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벤냑스를 ‘병약한 오메가’라고 표현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캐릭터인가.’

솔직히 종이 위에 쓰인 글자일 뿐이라면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인물이 그 설정으로 인한 피해를 받고 있다 생각하니…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저도 채이 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으음.”

채이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벤냑스는 따뜻하게 녹은 초콜릿처럼 무른 시선으로 채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채이에게 닿는 일은 없었지만 벤냑스는 의외로 쉽게 꺾이지 않고 직진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제삼자의 위치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페르난데는….

벤냑스가 채이를 향해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불태우고 있단 걸 알면서도 조용히 차만 들이켰다. 화풀이일 수도 있고, 심술일 수도 있다. 그는 벤냑스에게 채이와 레오나드의 바뀐 관계를 미리 언질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즈음 찻잔의 손잡이를 문지르며 상념에 잠겨 있던 채이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벤. 혹시 산책은 매일 하고 있어요?”

“아침마다 마당을 걷는 거라면 꾸준히.”

“그거 말고 하는 건 없는 거죠?”

“네. 가끔 부모님 몰래 검을 휘둘러 보기는 하는데….”

채이는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가 안 되어 있는데 늘 마음만 앞서다 보니 안 그래도 약한 몸이 더 부담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 ‘간극’을 먼저 줄이는 것이 벤냑스의 과제였다.

“중요한 건 기초라고들 하죠. 기사들도 처음부터 검을 번쩍 들고 잘 휘두른 건 아니에요. 그 뒤에는 다 노력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벤도 처음에는 체력과 근력 단련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산책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거나 빠르게 걷기 같은 걸 해보세요. 단, 절대 처음부터 무리하지는 말 것. 꾸준한 게 제일 중요해요.”

“채이 님도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닌가요?”

“그럼요. 저도 비실비실했던 때가 있는걸요.”

이번 생에서도. 전생에서도.

그 이야기에는 페르난데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힐끔 눈을 굴려 채이에게 집중했다. 하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들도 발현하자마자 강해지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채이는 알파도 아니고 베타다. 지금의 강인함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물론 채이에게 그 정도 노력은 이제 ‘일상’이었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상당한 것이었다.

“노력하면….”

작게 중얼거리던 벤냑스가 곧 보석 같은 눈에 총기를 담으며 채이를 올려다보았다. 벤냑스는 자신에게 용기를 심어 주고 또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채이를 동경하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깊어지는 사랑을 마음에 품었다. 벤냑스는 언젠가 채이만큼 키도 커지고 강해져서 그에게 보호받는 게 아니라 그를 보호해 주는 입장이 되고 싶었다.

“멋져요. 채이 님.”

그런 벤냑스의 숨겨진 마음도 모르고….

“벤도 멋진 사람이에요.”

눈을 부드럽게 휜 채이는 순수하게 벤의 노력을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녹은 고민했다.

‘어쩐다.’

레오나드와는 특수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연애 쪽으로 심각하게 눈치가 없는 채이였다. 그런 채이라면 분명 벤냑스의 마음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론 불필요한 감정만 키우는 꼴인지라 벤냑스에게 그건 더 이상 품어서 안 될 마음이라 말해주고 싶은데… 언제 말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 벤냑스가 입을 열었다.

“저어… 채이 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놀러 가지 않으실래요? 어디라도 좋아요! 함께 걷고 대화하고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요. 그… 많이 걷다 보면 운동도 될 거고요! 어떠신가요?”

눈에 보이는 수작질이라 페르난데와 에녹은 단번에 눈치챘지만….

‘이제 아픈 거 다 나았다고 막 움직이고 싶은가 보네.’

역시나 채이는 이번에도 남다른 사고회로를 굴리고 있었다.

“좋아요. 아, 그럼 여기 블렌츠 광장 쪽으로 놀러 갈까요?”

채이도 광장으로 내려가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된지라 문득 생각이 났다. 하여 괜찮겠느냐는 의미로 에녹을 돌아보자 에녹은 “저와 함께 간다면 괜찮지만, 그래도 레오나드 공자님이 걱정할 수 있으니 우선 알리고 오겠다.” 말한 뒤 자리를 비웠다.

그러고 잠시 찾아온 침묵 도중.

“나도 같이 간다.”

페르난데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에 벤냑스는 불퉁해진 얼굴로 입을 삐죽였지만 채이로서는 싫을 이유가 없었다. 기왕 놀러 가는 거라면 다 같이 가는 게 더 떠들썩하고 재미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페르난데는 블렌츠 광장 길을 잘 알았다. 길 안내를 맡기기에 적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온 에녹은 채이에게 “레오나드 공자님이 조심히 잘 다녀오라 하셨다.”라며 일러주었다. 채이와 벤냑스, 페르난데 그리고 에녹을 포함한 일행은 간단한 준비를 끝마치고 저택을 나섰다.

“우와! 저거 보세요, 채이 님!”

광장으로 내려간 벤냑스가 음유시인들의 합동 공연을 발견하고 잔뜩 들떠선 채이를 불렀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 기분이 좋았던 채이도 인자한 웃음을 띠며 재촉하는 벤냑스를 얌전히 뒤따라갔다. 꼭 어린 아들을 데리고 마실 나온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으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참. 그러고 보니, 벤. 식사는 하고 온 거예요?”

“아. 먹고 오긴 했는데… 입이 조금 심심하긴 하네요.”

채이의 물음에 벤냑스가 열심히 공연을 구경하다 말고 입을 달싹였다. 그걸 힐끔 쳐다본 페르난데는 근처를 스윽 둘러보다가 먹거리 가게가 모여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간단히 먹을 것 좀 사서 오지.”

“그래야겠다.”

“채이 님. 저는 여기 자리 잡아 놓고 있을게요.”

채이와 벤냑스, 그리고 페르난데 세 사람이 벤치에서 일어나는 동안 에녹이 말했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누군가는 자리를 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 에녹이 나서서 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고마워. 에녹은 먹고 싶은 거 있니?”

“저는 괜찮아요.”

“알겠어. 그럼 금방 다녀올게.”

채이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가게 쪽으로 이동했다. 길거리에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잔뜩 풍겨서, 배가 그리 고프지 않은데도 위장이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채이가 벤냑스를 돌아보고 물었다.

“벤. 뭐 먹을래요?”

“저는….”

그때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동글해진 벤냑스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이도 벤냑스와 마찬가지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 가게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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