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데리고 왔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채이와 시시덕대고 있었던 미카멜이 짐짓 껄렁해 보이는 모습으로 턱을 까닥거렸다. 그에 장로들이 채이의 상태를 무심히 훑어보았는데 한 장로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듯 눈썹을 휘었다. 뒤이어 지껄인다는 소리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왜 저 베타 놈을 제대로 구속해서 오지 않았던 거지? 저렇게 자유로운 상태로 두었다가 혹여 허튼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쯧쯧,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 하다니. 이래서 못 배운 베타 놈들이란….”
상대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그만 말문이 막혀 반박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도 어쩌면 고도의 기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드는 순간이었다. 한 소리를 듣고 만 미카멜이 끄응 침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소란 없이 잘 데리고 왔으니까 그걸로 된 것 아니오? 고분고분한 자를 상대로는 굳이 과격한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올시다.”
장로들은 혀를 쯔쯔 차곤 채이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들의 내립떠보는 시선에 채이가 전혀 기죽지 않자 장로들은 더욱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여럿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싸고 노려보는 모양새가, 못된 것만 배워 사람 괴롭힐 줄만 아는 고약한 것들과 흡사했다. 채이는 한숨을 삼켰다. 전생 나이까지 합쳐도 채이보다 더 오래 살아 왔을 장로들이건만 나잇값이라곤 조금도 못 하는 이들이었다.
“그래… 순진한 레오나드를 꼬드겨 판단을 흩트렸다는 요물이 바로 네놈이구나.”
채이로선 이번에 처음 보는 장로가 고고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한쪽 눈 위에 긴 상처가 나 있는 노파였다. 거기에 기세를 탄 어스틴 장로가 천박한 말을 얹었다.
“우리 가문에 너 같은 놈은 짐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레오나드를 포기하고 모습을 감춘다면 차후 랭커스터는 네놈에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으마.”
“하하, 어스틴 장로. 물의를 일으킨 상것에게 내리는 처사치곤 상당히 너그러우시군요.”
자기끼리 좋다고 웃자 채이가 입을 꾹 다문다. 채이의 표정이 어두워진 듯하자 미카멜이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채이가 입을 열었다.
“일찌감치 포기하라 이거군요.”
“그렇다.”
“정말 오메가가 될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고, 오메가가 되지 않으면 아이를 가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남자 베타니까.”
“잘 아는군.”
분명 채이는 자신의 존재가 레오나드에게 해악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재발현에 실패할 경우 아이도 갖지 못하는 ‘베타 남성’의 위치가 레오나드의 발목을 잡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오메가가 되지 못해서 레오나드와 가문을 나가야 한다면, 그 미래가 정말 행복할지에 대해서도.
“그런데….”
향후 두 사람의 관계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당사자인 레오나드와 채이지, 제삼자가 함부로 끼어들 문제는 아니지 않나.
“그리 협박들 하시면 제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겁먹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애당초 채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고민하는 건 레오나드의 미래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 그런 것일 뿐 랭커스터의 미래가 불투명해질까 봐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당사자가 아닌 것이 조언도 아닌 참견을 해대면 기분이 불쾌하기 마련이었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이… 상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붉으락푸르락해진 데비드 장로가 눈을 사납게 뜬 채 성을 냈다. 동시에 위압적이고 강대한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레오나드의 곁을 오래 지켜온 채이에게는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피부를 간지럽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물론 레오나드의 분노가 직접 채이를 향한 일은 없다시피 하였지만 간접적인 노출은 의외로 꾸준히 있었다. 당사자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나, 그로 인한 영향은 분명 존재했다.
“나이도 있는데 무리하지 마시고요.”
“무… 뭐라…!”
“아 참. 그러고 보니 저도 당신들을 만난다면 하려던 말이 있었습니다.”
채이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세월로 인해 키가 쪼그라든 탓에 하나같이 채이보다 작은 장로들이 오히려 주춤하고 물러섰다. 노쇠하였어도 우성 알파의 위압이다. 상대는 그저 평범한 베타일 뿐이고. 그러할진대 어째서. 장로들은 아무렇지 않게 위압을 이겨내는 눈앞의 존재에게 공포를 느꼈다.
“우리 레오 귀찮게 만들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일 많아서 힘든 앤데. 그리고 당신들은… 어차피 ‘갑’이 될 수 없어. 대대로 우성 알파가 이어왔다는 가문의 명예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레오의 존재가 절실한 ‘을’일 뿐이지.”
채이가 산뜻한 얼굴로 입매를 말아 올려 웃었다. 맹점을 찔린 장로들은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껌벅였다.
이쯤이면 할 이야기도 다 끝났다고 생각한 채이는 미카멜과 한차례 눈인사를 나누고 먼저 원탁실을 나갔다. 그런 채이를 뒤쫓는 이는 없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원탁실 위층 복도까지 올라오니 그제야 바람이 통한다. 지하에 위치한 원탁실엔 창문이 없어서 갑갑한 느낌이었다. 채이는 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도 잠시….
정면 방향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기에 뭔가 싶어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후 계단 위로 빼꼼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레오나드였다.
“레오?”
“채이.”
한걸음에 다가온 레오나드는 채이가 여기 있는 줄 알았다는 듯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여기서 만난 게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채이는 아리송했다.
자신이 오닉스 저택을 나와 원탁실에 들렀다가 다시 여기로 나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있을 법한 위치를 찍어 맞췄다고 보기에는 너무 정확하지 않은가. 그게 전부 에녹의 능력 덕분이라는 걸, 채이는 여지껏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같이 찾아온 레오나드가 마냥 신기했다.
“원탁실에서 나오고 있던 거야?”
“아, 그게. 장로들이 나랑 대화가 해보고 싶었나 보더라고. 원탁실로 부르길래 잠시 갔다가 이제 나오는 길이었어.”
“…아직 그 인간들 밑에 있어?”
“그렇긴 한데… 참아, 레오.”
레오나드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서 일이라도 치를까 봐 채이는 잽싸게 그를 말렸다. 스스로 억누르지 못한 분노와 함께 페로몬이 흘러나오니 은은한 초콜릿 향이 복도에 깔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괜찮아.”
레오나드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자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몹시 분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채이를 평생 옆에 구속해두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을 레오나드는 알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분명, 채이에게 미움을 사고 말 테니까.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 해.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말했으면 안 보내줬을 거잖아.”
“당연하지.”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채이는 곧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그럼 너도 말해준다고 약속해.”
“…….”
“어제 있었던 일, 너도 말 안 해줬잖아. 너 혼자 골몰해야 하는 문제 아니야. 나한테 숨길 일도 아니고.”
“알겠어. 미안해.”
시무룩해진 레오나드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곤 뺨을 맞댔다. 꼭 용서해 달라고 애교 부리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이번에는 비비적대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두 사람은 거기서 적당히 그만두고 오닉스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후 레오나드가 이번 일의 주동자를 찾아가 발가락을 분지르며 으름장을 놓는 일이 일어났으나 모두가 쉬쉬하였기에 채이는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었다.
***
채이를 불러 심술을 부렸던 장로들은 그 뒤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덕분에 조만간 그들이 또 찾아와서 한 소리 할 거라 생각했던 채이의 예상이 빗나갔다. 물론 평화롭게 지나가는 게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기에 채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8월.
페로몬 석을 수거하기 위해 엘프들이 랭커스터 가를 찾았다. 그들은 온 김에 채이와도 대화를 나누었으며 벨몬 열매를 한아름 선물하고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난데도 저택을 찾아왔다. 레오나드와 여전히 말싸움하는 걸 보고 있으니 건강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페르난데에게서 벤냑스에 대한 소식도 듣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벤냑스가 크게 아픈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당분간 못 볼 것 같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벤… 괜찮은 걸까.’
채이는 심히 걱정이 되었다.
그때 편지를 받은 이후 거의 2달이 지났는데 여지껏 소식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안 좋은 생각까지 하게 되던 무렵… 벤냑스가 정말 오랜만에 랭커스터 가로 편지를 보내왔다.
『채이 님에게.
채이 님! 보고 싶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 같네요. 저번에 보내 주신 채이 님의 답장은 잘 받았답니다.
사실 그동안 몸이 안 좋아서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제 몸이 선천적으로 약한 편인데 강해지고 싶어서 그만 무리를 했나 봐요. 부끄러운 이유네요.
어쨌든 지금은 건강합니다. 주치의가 말하기를, 오히려 크게 한번 앓고 난 덕분에 전보다 몸이 튼튼해진 것 같대요. 그래서 채이 님을 만나러 가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어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이미 찾아갈 준비는 끝내버렸답니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출발할 건데 무턱대고 찾아가도, 용서해주실 건가요?
빨리 뵙고 싶어요.
-벤냑스 코네러 보냄.』
그때가 9월 초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