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이내 채이가 눈을 가자미처럼 가늘게 치켜떴다.
“너 또 자는 척했지.”
“선잠 들었다가 방금 깬 거야.”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채이로선 구분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거짓말이라 해도 귀여운 장난 수준이니 그냥 넘어갈 뿐이었다.
“채이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
레오나드가 채이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구어 비비적거렸다. 다 큰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드는 꼴 같아 으이구, 한 소리 한 채이는 그를 감싸 안고서 쓰다듬어 주었다. 레오나드는 그 손길을 잠시 만끽하면서 안겨 있다가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씻고 돌아와선 채이와 가볍게 입맞춤을 나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 나누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앞서 장로들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으나, 그 일은 금방 잊은 채 평온함을 만끽했다.
***
며칠 뒤. 랭커스터 가의 ‘추문’을 알게 된 랭커스터의 장로들은 다수결에 따라 공식적으로 원탁 소집령을 내렸다.
원탁 소집령이란 가문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논의하고자 장로들과 가문의 주요 구성원들을 원탁실로 모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번 원탁 소집령에는 추문의 중심에 있는 레오나드와 현재 가주로 있는 델리온이 불리게 되었다. 장로들의 의도는 두 사람 선에서 이 ‘불미스러운’ 일을 적당히 끝내는 거였다.
하여 원탁실로 가는 길.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엔 레오나드와 델리온의 어긋나는 발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델리온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일은 없을 터. 물론 델리온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우중충한 분위기를 환기도 시킬 겸 먼저 말문을 열었다.
“원탁실에서 싫은 소리를 좀 듣더라도 너무 난동을 피우지는 말거라. 되도록 내가 알아서 상대할 테니.”
문제는 감정의 골이 깊은 아들을 상대로 하기에는 델리온의 대화 솜씨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서툴단 점이었다.
“신경 써 주는 척하지 마십시오.”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흘겨본 레오나드가 차가운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적어도 레오나드가 느끼기에 델리온의 배려는 가식 혹은 귀찮은 일에 휘말려 질책하는 것과 비슷했다. 결국 대화는 제대로 이루어져 보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무겁고 어색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그들이 원탁실 바로 코앞까지 도착해 있다는 거였다.
한숨을 속으로 삼킨 델리온이 원탁실 문을 열었다. 지하에 위치한 원탁실 내부는 어두웠다. 바닥에 깔린 은은한 빛이 원탁실 전체를 비추고 있었으나 샹들리에와 같은 수준의 밝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반원 형태로 나열된 의자엔 장로들이 앉아 있다. 의자 위치가 제법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델리온과 레오나드는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왔구나.”
원탁 의자에 앉은 장로들이 하나같이 눈을 깔뜬 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랭커스터의 방계 가문 전대 가주였던 어스틴과 데비드의 모습도 있었다.
“장로들을 뵙습니다.”
델리온이 예의를 차려 인사할 동안 레오나드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반항적인 모습을 힐끔 본 델리온은 이번에도 곱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임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꼭 들어맞았다.
“저! 저 무례한 놈!”
성질이 거칠고 참을성 없는 데비드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여든이 넘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정정한 데비드는 강한 페로몬을 뿜으며, 레오나드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래 봤자 노쇠한 사내의 페로몬이다. 같은 우성 알파라고 해도 한창 무르익은 레오나드를 이길 정도의 힘은 그들에게 없었다. 당연히 그 위협에 레오나드가 공포감을 느낄 일도 없다.
“그만하시게.”
중후한 목소리의 노인 하나가 중재하고 나섰다. 델리온의 아버지인 일레카였다. 일레카의 중재에 데비드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곧 델리온의 아버지가 천천히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 두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일레카는 변화를 일으키려는 제 핏줄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랭커스터의 장로는 델리온의 아버지인 일레카를 제외하면 모두 랭커스터의 방계 가문과 가신 가문의 전대 가주들이었다.
이는 직계의 후계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음을 면하지 못하거나 쫓겨났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지금처럼 방계가 대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실제로 과거를 답습해야 한다고 앞장서서 악다구니 쓰는 이들은 보통 강경한 방계 장로들이었다.
직계인 일레카 장로는 비교적 온건하거나 중립적이며, 가신 가문의 장로들은 무슨 문제가 생겨도 크게 의견을 내지 않거나 온건한 편이었다.
“레오나드… 이번 원탁 소집령이 내려진 이유가 무엇인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일레카의 물음에 레오나드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일레카는 제 손주를 책하지 않았다.
“이번 안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거란다. 그 베타를 계속 곁에 두겠다면 앞으로 후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해결할 방법은 있는 것이더냐?”
“베타의 형질을 오메가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될지 안 될지에 대해서는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만….”
레오나드가 답하고 있는데 방계 가문의 전대 가주, 칼로메 장로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쯧, 어디 그런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베타가 형질을 바꾸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더냐?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형질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 베타들이 이미 넘쳐 났겠지. 바보 같은 아집이로구나, 레오나드.”
거기에 방계 장로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그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드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이미 그는 참을 만큼 참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여 레오나드가 선을 넘기 전에 델리온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레오나드의 입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죠. 근데… 오메가가 되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호오. 안 되면 포기하겠다?”
“예, 이런 똥구덩이처럼 냄새나는 가문 정돈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요. 소중한 사람에겐 비할 게 안 돼서.”
“뭐… 뭣이라?!”
“이 소갈머리 없는 놈을 봤나!”
뜻대로 되어 간다 생각하여 뿌듯한 얼굴이던 장로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델리온이 끙 신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건 이제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의 싸움뿐이었다.
“네가 정말 랭커스터를 포기하는 게 가능할 거라 보느냐! 우습다, 레오나드. 그렇게 쫓겨났다가도 다시 아득바득 돌아왔던 놈이 감히 우리를 겁박해?”
“그랬었죠. 복수하기 위해서.”
“이… 이놈이….”
“가문에서 내다 버린 어린놈이 그토록 바라던 우성 알파 형질 발현자였으니 이보다 우스운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네 모가지가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이… 제가 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레오나드가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리자 숨을 옥죄는 페로몬이 짙게 내리깔렸다.
“……!”
가신 가문 출신 장로들은 겁을 먹은 어린아이처럼 벌벌 떨며 레오나드의 눈을 피했고 특히 레오나드의 살기를 정면에서 맞아야 했던 방계 장로들은 실금하거나 기절해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 대단한 우성 알파랍시고 방계임에도 늘 떵떵거리던 데비드조차 그 한순간에 죽음을 보곤 새파랗게 질렸다.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핏대가 설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있던 데비드는 이를 아드득 깨물었다. 우성 알파임에도 방계라는 이유로 랭커스터가 될 수 없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직계 혈통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그 열등감이 다시금 뭍 위로 올라오자 참을 수가 없었다.
“네놈도… 네놈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너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천한 상것 베타 놈이 오메가가 될 일도 없고, 네가 우리를 죽이고 가문을 나간다 한들 랭커스터의 이름은 언제나 건재할 것이니까 말이야!”
데비드의 공허한 외침만이 원탁실을 울린다.
데비드가 헉헉 차오른 숨을 뱉을 동안 침묵하던 레오나드가 한쪽 눈썹을 휘었다.
“이후 랭커스터가 어찌 되든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했듯 제 사람은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시니 더는 할 말도 없군요. 이만 가보도록 하죠.”
레오나드가 짙게 내리깔고 있던 페로몬을 거두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레오나드가 홀연히 원탁실을 나가버렸다. 곧 일레카가 델리온에게 눈짓을 했고 델리온도 조용히 원탁실을 나가며 자리를 피했다.
“더 이상 진행될 이야기도 없을 듯하니 이만 해산하시지요. 쓰러진 장로들을 챙겨주십시오.”
일레카의 반가운 한마디에 가신 가문의 전대 가주 장로들은 너도나도 일어나 쓰러진 장로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끝까지 자리에 남은 방계 가문의 장로들은 한참 동안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는데, 데비드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우릴 완전히 깔보고 있다고요.”
“유일한 우성 알파 후계를 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베타를 받아들이자니 그다음 후계가 문제로군요. 정말이지 랭커스터의 앞길이 막막합니다. 애초에 델리온과 베넷이 우성 알파만 더 낳았어도 이런 고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장로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방계 장로 유즈카스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