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나는 당신들이 함부로 들락날락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게 무슨 짓인지 잘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 데비드 장로. 어스틴 장로.”
차분하지만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는 경고였다. 그에 ‘장로’라 불린 노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생각보다 더 공격적인 레오나드의 태도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두 노인은 끝까지 아집을 부리며 물러서지 않았다.
“시끄럽다! 레오나드! 장차 델리온의 뒤를 이어서 가문을 짊어져야 하는 녀석이 저런 천한 것 따윌 끼고 놀다니!”
데비드 장로는 채이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혈압을 올렸고.
“그것도 애 하나 제대로 못 낳는 천한 상놈 베타라고 들었다. 레오나드, 생각은 있느냐? 저런 상것을 좋다고 데려오다니. 가문의 수치임을 알아라.”
어스틴 장로는 혐오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으면서 자신의 변변찮은 밑바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채이는 깨달았다.
일전에 에일런의 가문 복귀를 반대했던 것도 바로 시대에 낙오된 저 노인들이었음을.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다 그대로 사고가 굳어 몰상식함의 아이콘이 된 노인들 그 자체였다.
‘아휴. 부끄러워라.’
어린것들 앞에서 저런 시대에 뒤처진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노인네의 모습을 본 채이는 그만, 대리 수치를 느끼곤 얼굴을 손바닥 안에 감추었다. 앞으로 늙어도 저렇게 늙진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뿐인데 채이가 상처받은 걸로 단단히 착각한 레오나드는 눈을 흉흉하게 뜨더니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나불대는 주둥아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뭣…?! 저, 저 버릇없는 놈이!”
이대로 두었다간 두 명 중 한 명은 자기 수명보다도 빠르게 지옥행 티켓을 끊을 것임이 분명해지는 상황. 그걸 델리온도 모를 수 없었기에 다급히 끼어들었다.
“장로들, 당장 여기서 이런다 해서 바뀌는 거 없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쯤에서 노여움을 푸시고 일단 나가시지요.”
“하지만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것이 지금 우리를 협박하고 있지 않느냐. 감히, 이 랭커스터 가문을 한결같이 지탱해온 우리들을 모욕하다니…!”
“그만! 데비드 장로.”
늘 점잖던 델리온이 결국 목소리를 높이자 장로들도 주춤하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오늘은 이쯤 하고 물러나려는 건지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돌아섰다.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이쪽을 흘겨보긴 했지만.
장로들이 먼저 식당을 떠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장로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서 있던 델리온은 눈만 굴려 채이를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아….”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최대한 입단속을 시키려 했지만 조금씩 새어 나가는 건 역시 어쩔 수가 없었는지, 복도를 지나가다가 시종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델리온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인가. 아무래도 그는 채이가 오메가로 형질이 변하기 전까지, 장로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만들려던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전 괜찮습니다.”
정말이었다. 대리 수치를 느끼기는 했지만 상놈이라느니 천한 것이라느니… 그런 저급한 말을 들었단 이유로 상처받을 채이가 아니었기에.
“뭐 틀린 말도 아니었고요.”
채이는 남자 베타라 알파 오메가 후사는커녕 자식 자체를 낳을 방법이 없다. 오메가가 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계속 제자리걸음일 터… 그렇다고 자신이 랭커스터 가문의 명맥을 끊어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귀족들이 혈연으로 이어지는 명맥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는 채이도 알았으니까. 레오나드의 체면과도 관련 있으니, 더욱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을 채이의 너그러운 용서라 생각한 델리온은 고마워하며 조용히 웃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들어가세요.”
델리온이 짧게 고개를 까닥인 후 식당을 나갔다. 사라진 델리온의 자취를 눈으로 좇던 레오나드는 이내 채이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채이… 정말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아.”
채이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해도 좀처럼 저조한 기분을 풀지 못하던 레오나드가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자기가 더 상처 입은 얼굴이라서 채이는 오히려 레오나드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했다.
“다 먹었으면 방으로 갈까? 아니면 도서관에 올라가서 같이 책이나 읽을래?”
“…도서관 가자.”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어 채이와 눈을 마주했다. 픽 웃은 채이는 레오나드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갔다. 잠시 침묵한 채 따라가던 레오나드는 맞잡은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있잖아, 채이.”
“응?”
“도서관 가기 전에 씻을까?”
“아. 그래도 되고.”
오늘 바깥 햇살이 조금 강하기는 하지. 막 아침 산책도 다녀온 참이었으니, 시원하게 씻고 도서관으로 간다면 더 좋으리라. 레오나드가 슬쩍 웃고 말했다.
“그럼 같이 씻으러 가자.”
“그… 어어?”
하마터면 “그래”라고 답할 뻔한 채이가 눈을 동실하게 떴다. 방심할라치면 매번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오는 레오나드였다. 정작 레오나드는 순수한 척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같이 자주 씻었잖아.”
“그건… 옛날이잖아…!”
친자식하고도 다 커서 같이 씻는 건 뻘쭘한데 관계가 달라진 지금은 분명 다른 생각이 나고 말 거다. 그걸 알면서… 뻔뻔하기도 이렇게 뻔뻔할 수 없었다. 어느새 방 앞까지 도착한 채이는 눈을 흘기곤 입을 옷을 챙겼다. 실내에서 편하게 입는 종류의 옷들이었다.
“레오. 너 먼저 씻을래?”
“같이 씻을래.”
“…그럼 나 먼저 다녀올게. 진짜 들어올까 봐 말해두는데 안 돼! 알겠지. 옷은 저기 큰 거 있으니까 아무거나 꺼내 입고… 편안하게 쉬고 있어.”
그러고 채이는 후다닥 욕실로 튀어갔다.
다행히 레오나드는 정말로 같이 씻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조용했다.
‘하아.’
욕실 문을 등지고 서서 안도한 채이는 곧 욕조로 다가가 물을 채웠다. 찰방거리기 시작하는 수면을 보고 있으려니 잠시간 상념에 잠기게 된다. 속에 묻어 두었던 생각들이 하나둘 올라오는 탓이었다.
그중 가장 고민인 건….
‘내 형질도 언젠가 바뀌는 게 맞긴 한 걸까.’
역시 형질 변화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노력하면 바뀌는 사람이 있고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던데, 과연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할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불안이 커지는 이유는 꾸준히 스킨십을 하고 흥분향에 노출되는 빈도도 제법 늘었지만 여전히 ‘이변’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킨십의 강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그랬으니…. 진도가 더 나가지 않아서라는 건 변명의 이유가 되지 않아.’
만약 끝까지 형질 변화가 없다면 그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도 선뜻 레오나드와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숙성되면 더 달콤하게 변하는 과일처럼, 달라진 관계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채이는 나날이 자신의 감정을 키우고 있었기에.
그러니 명예와 안락함을 모두 버리고 둘이서 살아보자며 욕심을 부리겠다면 그리해 볼 수도 있으리라. 레오나드는 분명 좋다고 말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게 옳은 걸까.
채이 본인이야 원래부터 가진 게 없다시피 했으니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원래 가져야 했던 것을 이제야 겨우 되돌려 받았는데… 다시 그걸 반납하라 요구하는 건, 이기적이지 않은가. 채이는 사랑 하나 때문에 레오나드가 가난과 불명예를 떠안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 이전에 그는 채이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니 더더욱.
찰방.
문득 손목 위까지 차올라 흔들리는 물을 느끼고 상념에서 빠져나온 채이가 얕게 콧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다.’
그래도 자신이 지금 당장 형질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정 난 건 아니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그때까지 천천히 고민해보면 언젠간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뭐, 원하는 대로 형질 변화가 잘 이루어진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일 터이고.
채이는 이내 따뜻한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욕조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오늘 바깥 해가 조금 강하긴 하지만 이 근방은 여름이 되어도 그리 덥지 않은 데다, 저택 안은 항시 서늘해서 찬물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후끈후끈하게 씻고 나온 채이는 개운한 기분으로 몸을 닦은 후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적당히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니 정신이 기분 좋게 풀렸다.
“레오. 너도 씻어.”
방으로 돌아간 채이가 레오를 부를 때였다. 어쩐지 조용한 것 같아 고개를 드니 레오나드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말은 안 해도 많이 피곤했나.’
잔잔히 미소 지은 채이는 곁으로 다가가 레오나드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그대로 쉴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려고 하는데 몸을 돌리는 순간 팔을 확 끌어당기는 힘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침대 위로 털썩 쓰러지자 그늘이 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갤 드니 채이 몸 위로 슬금슬금 올라간 레오나드가 장난기가 느껴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