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벌써 지척까지 다가온 대군의 모습에 델리온과 한차례 시선을 교환한 채이는 목에 걸어 둔 공명의 피리를 불었다.
휘릭.
바람을 타고 청량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실비에트는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서 대기를 하고 있겠다 했기 때문에, 그가 소리를 듣고 날아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을 터였다. 곧 엘프 대군이 축복의 땅, 그 언덕 위에 진격을 멈추고 섰다. 월계관을 쓴 엘프 한 명이 검을 들고 다가올 즈음 채이도 앞으로 나가 마주 섰다.
두 진영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채이의 뒤를 지키고 선 일행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볼 동안 엘프들은 채이를 앞에 둔 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길 몇 분. 대표로서 앞으로 나왔던 엘프가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방해물을 치우기 위해서 왔다. 위험하니 그곳에서 물러나거라.”
엘프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정한 배려의 말이었다. 숨죽이고 있던 일행들이 모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 눈앞의 방해물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썩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후에 일어났다.
“제안이 하나 있어.”
“…무엇이지?”
엘프들이 채이의 말에 선뜻 반응해 주는 것이다.
클레망은 이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아무리 봐도 평범하고 능력 없는 베타일 뿐인데. 그렇다고 엘프들이 ‘약자에겐 다정하고, 강자에겐 매정한’ 정의로운 종족도 아니거늘… 어째서 저 베타에게만 이리 남다른 것인가. 채이 본인조차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그 이유를 아는 건 채이에게서 뭔가를 본 엘프들뿐일 터였다.
“너희와 싸움 없이 대화로 풀고 싶어.”
채이가 곧장 본론을 꺼냈고 그걸 듣고서 눈앞의 대장 엘프는 다시금 침묵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으니 그들이 무슨 얼굴로, 어떤 표정으로 이 자리에 임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기 힘들었다. 하나 대화를 듣고자 하는 엘프들의 낌새에서 채이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이용하면 그들과 싸우지 않고 완만한 해결책을 끌어낼 수 있으리란 걸.
잠시 후….
엘프가 입을 열었다.
“싫다면?”
그 웃음기 섞인 한마디에 위태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일행들이 일제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자칫 엘프 중 누구 하나라도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가는 전면전이 일어날 것처럼 날 선 분위기였다. 그때.
펄럭.
어디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일행들도, 엘프들도 하나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시야를 가르며 나타나 채이를 감싸듯이 내려앉은 것은 다름 아닌 실비에트였다.
“채이!”
실비에트가 채이의 얼굴에 제 주둥이를 가져다 대며 좋다고 비비적댔다. 실비에트의 턱밑을 쓰다듬으니 고릉고릉거리는 것이 아기 고양이 같아서 귀여웠다. 물론 그가 애교를 부리는 대상은 채이뿐이다. 눈앞에서 채이와 대치 중인 엘프를 돌아보는 금색 눈동자는 꼭 먹잇감을 포착한 뱀처럼 사나웠다.
“이제 쟤네 전부 죽이면 돼?”
언뜻 봐서는 이대로 협상이 결렬되어 사실상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 같았다. 하지만.
“잠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던 실비에트를 손짓으로 막은 채이는 다시 엘프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여전히 채이 앞에서 살기를 띠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침착하게 생각하면 그들이 정말로 싸우려는 게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래곤인가. 풋내기로 보이기는 하다만, 싸우지 못하게 된 게 조금 아쉽긴 하군.”
그리 중얼거린 엘프가 물 흐르는 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은 다음 등 뒤로 손짓했다. 그에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엘프들도 하나둘 검을 수납했다.
“좋다. 네 제안에 응해주지. 다만 대화로 적절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로서도 더 이상 순순히 넘어가 줄 수 없다는 점은 알아 두어라.”
엘프들과의 ‘평화로운 협상’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상황이 격해지지 않은 채 일단락되는 듯하자 지켜보던 일행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긴장하여 굳었던 어깨를 풀었다. 델리온은 기사들에게 대피해 있는 드워프들을 데리고 오라 명령했다. 그즈음, 상황이 일단락됐음을 파악한 실비에트는 채이에게 뺨을 비비며 물었다.
“채이. 나는 이걸로 된 거야?”
“응. 도우러 와 줘서 고마워.”
“웅!”
아기 고양이처럼 채이의 쓰다듬을 받으며 히히 웃는 실비에트에게선, 더 이상 아까 전의 위엄 넘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내 실비에트는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바꾸며 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꼭 자기가 가장 아끼는 커다란 인형을 안고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실비에트가 채이에게 들러붙는 게 싫었던 레오나드는 그를 잽싸게 밀어내고 말았지만.
잠시 후 드워프들이 모두 되돌아온 뒤에 삼자대면 이야기가 나오고는 엘프와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다.
채이는 그들이 안에서 긴밀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실비에트와 에녹을 데리고 함께 산책했다. 아직 아침 시간이라 공기가 선선하니 산책하기에 딱 좋았던 까닭이다. 월계관을 쓰지 않은 엘프들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너무 태평하지 않나 할 수 있지만, 이쪽 기사들도 그만큼 대기하고 서 있으니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긴 힘들 터였다.
“설마 엘프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나올 줄 정말 몰랐어요. 이전 습격 때 피해가 크기도 했으니 꺼려할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음. 나도 잘 모르겠어.”
에녹의 궁금증 가득한 물음에 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리될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왜 그들이 제게 호의적인가에 대해서는 채이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대기하고 서 있던 엘프 중 시선을 끄는 이를 한 명 발견했다. 가면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싶어 살펴보니 허리에 레오나드가 준 상처가 남아 있다. 채이를 죽이려고 했다가 물러난 바로 그 엘프였다.
궁금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법.
채이가 엘프 곁으로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엘프들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는 에녹이 크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채이와 일면식 있는 엘프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채이가 다가오는 걸 보고 그와 마주 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상처. 저번에 저 죽이려다가 말았던 게 당신 맞죠?”
“…….”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요. 그때 저는 왜 살려준 겁니까?”
그 솔직하고 직설적인 물음에 엘프가 고개를 옆으로 까닥인다. 어쩐지 저 가면 뒤에서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별안간 허리를 숙여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엘프가 채이의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나직하게 흘리는 웃음소리가 가면 안쪽에서 들려왔다.
“우린 ‘너 같은’ 아이만큼은 해치지 않는단다. 아주 좋아하니까. 세계수처럼 맑은 생명의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는 희귀하기도 하고 말이지.”
…맑은 생명의 에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채이가 또 다른 의문을 품던 와중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도 한마디씩 얹었다. 분위기가 느슨해져서 그런지 그들은 생각보다 수다스러웠다.
“그렇지. 영혼이 저렇게 맑은 인간은 정말 오랜만에 봐. 아니, 인간 중에서는 처음인가?”
“처음이지 않나?”
“이백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맑은 영혼의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었어. 소수 종족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군… 인간하고 비슷하게 생긴 종족이 많으니 가끔 헷갈린단 말이지. 하하.”
영혼이 맑다느니 하는 사이비 같은 대화의 흐름에 채이가 잠시 당황하고 있을 무렵이다. 마침 삼자대면을 마친 이들이 밖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좋은 방향이든 안 좋은 방향이든 어찌어찌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채이가 그들을 돌아보고 묻자 월계관을 쓴 엘프들과 함께 걸어 나오던 델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세계수 뿌리를 일 년에 일정량 이상은 소모하지 않는 대신에 새로운 뿌리가 자라기 전까지는 간섭 없이 쓰기로 합의했다.”
잘 해결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이로써 평화로운 종결이었다.
“더 이상 적이 아닌 존재들 앞에서 적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실례이니 벗도록 하지.”
그즈음 월계관을 쓴 엘프들이 드디어 가면을 벗고 숨겨 왔던 얼굴을 드러냈다. 그에 다른 엘프들도 뒤따라서 하나둘 가면을 벗는다. 사락 흔들리는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영롱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가면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그들의 아름다운 용모가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클레망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걸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흘겨본 셀리언이 그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발을 짓밟아버린다.
최근 계속 얼굴이 어둡던 쿠쿠프는 드디어 후련해진 얼굴로 웃어 보이다가 커다란 나무 술통을 내놓았다.
“오늘은 ‘화해를 위한 축제’다!”
그렇게 선언된 화해의 축제는 엘프들도 함께했으며 밤새도록 이어졌다. 술잔을 기울이더니, 드워프들과 어깨동무까지 하며 친해진 엘프도 존재했다. 물론 대부분의 엘프들은 가장 큰 관심사인 채이 옆으로 모여들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