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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73화 (73/105)

073화

채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순간 본인이 먼지처럼 느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음?’

너무도 압도적인 그 크기에 순간 위압감을 느낀 채이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하여 슬쩍 뒤로 물러나는데 어디선가 성스럽게 느껴지는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바로 너였구나.

바로 나무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뭐지. 말하는 나무라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거 마물인가?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말하는 나무 마물’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이미 꿈이라고 인지된 공간이다. 때문에 채이는 꿈이라서 이런 황당한 전개가 펼쳐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단순한 꿈은 아니란다. 아이야.

그 생각을 나무는 부정했지만.

‘내 생각을 읽었어.’

놀란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조차 읽어낸 건지, 나무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대체 이 나무의 정체는 무엇일까. 꿈이 만들어낸 산물인가. 아니면 꿈에 직접 간섭하고 있는 외부의 무언가인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나무가 직접 밝혀주었다.

-나는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모든 걸 포용하는 자’. 세간에서는 엘프들에 의해 세계수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세계수.”

-그리고 나는 널 만나기 위해 이리 잠든 틈을 타서 찾아왔단다. 네가 뿌리 가까이로 다가와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

채이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세계수가 꿈을 통해 찾아왔다니. 이보다 비현실적인 일이 또 있을까. 솔직히 무언가가 자신의 꿈에 직접 간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설마 이게 진짜일 줄이야. 혼란스러워하던 중 채이는 의문이 하나 들었다.

“나를 갑자기 왜 찾은 거지?”

생각해 보면 처음 맞닥뜨렸을 때 세계수는 이미 채이를 알고 있던 것처럼 말했다. 그는 언제부터, 어떻게 채이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채이는 세계수를 어디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어쩌면 채이가 이 세계에 빙의한 외부자라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해주지 않고 그저 웃음을 흘린 세계수가 다른 말을 꺼냈다.

-신께서 친애한 아이야. 네가 다툼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리하도록 하라. 뜻대로 이루어질 터이니…. 짧은 시간이지만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신이라니?

의문이 커졌지만 직후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눈이 너무 부신 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나 아침 햇살을 보고 있었다.

“…….”

채이는 눈을 깜박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는 가끔 뒤척이는 소음과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다들 자고 있었다.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지만 채이의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뜨고 있었다.

“채이….”

“아, 미안. 깼어? 조금 더 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많이 피곤했는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응, 대답하더니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레오나드다. 피식 웃은 채이는 그대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폐부로 들어차니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마당을 거닐다 세계수 뿌리 쪽으로 다가간 채이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꿈에서 보고 있던 것을 눈앞에 두니 묘한 기분이다. 아직 꿈속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역시 평범한 꿈은 아니었다.

‘원하면 그렇게 해라… 인가.’

채이는 엘프들과 되도록 다툼 없이 대화로써 감정의 골을 해결할 수 있기를 원했다. 레오나드가 무리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세계수는 그 바람을 읽고 그러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를 용기가 솟아났다.

‘그래. 까짓거 해보자.’

여차하면 실비에트도 제 곁에 있을 테니 조금쯤 무리수를 던지는 건 괜찮으리라.

그렇게 결심을 다진 채이는 그날 오후에 열린 작전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작전 회의는 이미 경고를 보낸 엘프들이 재정비를 끝마친 후, 본격적인 공세를 퍼부을 게 자명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재차 논하기 위해서 열린 거였다. 여기서 적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실비에트가 나타나 힘을 보탤 예정이기도 했다.

“아직 월계관을 쓴 엘프가 몇 명이나 나타날진 모른다. 분명한 점은 다음 습격엔 총 전력이 나설 거란 점이지. 전례로 보아도 그렇다.”

“고지식한 면이 있는 종족이야.”

“빠르면 며칠 뒤. 늦어도 한 달 뒤일 거다. 그 안에 이쪽도 재정비를 끝마쳐야 해. 드워프들을 포함한 비전투원은 미리 대피시키고… 채이, 자네도 비전투원들과 함께 대피해 있어라. 거기서 제때 드래곤을 불러주면 된다. 신호는 이쪽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릴 것이니….”

델리온이 설명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거기서 별안간 채이가 손을 들고 흔들었다.

“저. 그거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채이에게 꽂혔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이는 예사로운 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은 저한테 맡겨 줄 수 없겠습니까? 전적으로요.”

“뭐?”

클레망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듯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셀리언과 다른 기사들도 베타가 이런 일에 나서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전을 아예 고치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가 일선에 서서 대응하겠다는 뜻인가?”

“둘 다겠네요. 이전부터 짜 온 작전을 전부 비틀어야 하는 일이라 미안하긴 한데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잘하면 그들과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델리온의 물음에 나온 채이의 대답. 레오나드가 그걸 듣고서 미간을 약하게 구겼다. 그로서는 채이를 위험한 일선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채이.”

하지만 레오나드가 말을 얹기 전에 먼저 손을 뻗은 채이가 레오나드의 손등을 도닥였다.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뜻이 담긴 동작에, 레오나드도 결국 입만 달싹여야 했다.

“정확히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저를 미끼로 협상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비에트와 함께 할 거고 협상이 결렬되면 그걸로 포기할 거니까 여차하는 일은 없을 거라 봅니다.”

“…미끼라.”

델리온이 잠시 침묵한다. 채이의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에 잠시 고뇌하는 듯했다.

“안 된다.”

하나 델리온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호하게 채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물론 채이로서도 처음부터 그가 믿어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기에, 반박하고 나섰다.

“저를 일선에 보내는 것뿐인데도 망설이시는 겁니까? 실비에트를 기습의 형태로 동원하지 않게 되는 건 아까울 수 있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충분한 전력임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요.”

“그래. 충분한 전력이지. 내 뜻은 자네의 신변이 위험할 수 있으니 안 된다는 거다.”

채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도 아닌 그 델리온이 너무 당연하게 자신을 걱정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만용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닙니다. 엘프들은 저한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 이유는 저도 알 수 없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만 부상자 없이 끝낼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흠. 손을 대지 못한다?”

“그때, 저를 죽일 수 있었는데도 절 보고 당황하기만 할 뿐 죽이지 않더군요. 만약에 그 엘프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저는 진즉 죽었을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레오나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지만 사실 레오나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엘프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자신은 늦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

턱을 짚은 델리온이 다소 의미심장한 채이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의아해했다. 엘프가 자비를 보여주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특별한 존재라든가?”

클레망이 대충 던져 보는 식의 가벼운 말투로 너스레를 떨며 히죽 웃었다. 채이가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믿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던지라 오히려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러든가 말든가 채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델리온은 쉬이 꺾이지 않는, 올곧은 눈을 가진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지었다. 레오나드가 왜 채이에게만은 항상 지고 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알겠다.”

결국 델리온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델리온에게 향했다. 그는 뒤이어 덧붙였다.

“대신 조건을 하나 걸지.”

“말하십시오.”

“우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고, 엘프들이 협상 중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지체 없이 움직일 것이니 자네는 그에 대해 논하지 않기로. 또한 실비에트는 당일에 부른다. 엘프들이 드래곤의 기척을 느끼면,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니까.”

“그러겠습니다.”

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웃었다. 솔직히 베타인 자신이 잘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해냈다. 그 뒤로 레오나드는 계속 걱정된다며 징징거렸고, 채이는 여러 방법으로 그의 불안을 진정시켜 줘야 했다.

시간이 흘러….

재정비를 일찍이 끝낸 이쪽 일행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 무렵.

“엘프들이 이리로 옵니다!”

“수는?”

“저, 전부 셀 수 없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요!”

가면을 쓰고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엘프 대군이 기어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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