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순식간에 전력의 절반 가까이 잃고 전세가 뒤집히자 월계관을 쓰고 있는 엘프가 주먹을 꾹 쥐는 게 보였다. 월계관은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더니… 확실히 저 엘프는 레오나드의 이능향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제대로 견뎌내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경악 어린 얼굴로 지켜보던 클레망이 작게 중얼거렸다.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괴물이잖아…. 이런 게 가능하다니, 인간 맞아?”
레오나드는 앞에서 보고 뒤에서 봐도 인간 맞다. 채이는 멀쩡한 사람을 괴물 취급하는 클레망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이번만 참기로 했다.
“…이런 건 예상외군.”
잠시 후, 월계관을 쓴 엘프가 주변 상황을 무심하게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레오나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인간 놈이 한 건가.’
그리고 월계관을 쓴 엘프는 동족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대신….
가면 뒤에서 즐거움이 담긴 미소를 히죽 입가에 걸었다.
‘흥미롭구나.’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끼는 고양감인가. 죽은 엘프들도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여 목숨을 끊었으니 명예로운 죽음이라 생각했을 터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론 그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나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것이 바로 엘프들의 습성이었다.
“오늘은 이만 후퇴한다.”
그 말에 살아남은 엘프들이 페로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잘 따라오든 말든, 월계관을 쓴 엘프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냉정한 모습에 저들이 속셈을 숨기고 있진 않은가 유심히 확인해본 레오나드는 곧 페로몬의 농도를 옅게 하여 엘프들을 구속에서 풀어주었다.
겨우 풀려난 그들은 월계관을 쓴 엘프를 뒤따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서로 간에 끈끈한 애정을 보여주던 드워프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곧 채이가 안도의 숨을 삼켰다.
‘어떻게 내쫓기는 했네.’
레오나드 덕에 당장의 위기를 모면했다. 레오나드의 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무기였다. 새삼 레오나드가 대단하게 보일 즈음이었다.
“……?”
채이를 품에 안고 있던 레오나드의 몸이 돌연 앞으로 기울었다. 채이가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떠받쳤는데 뭔가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건 피였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레오나드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피를 떨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채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오! 너 왜 그래?!”
당황해서 그리 물었지만 레오나드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채이가 걱정할까 싶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델리온이 레오나드를 내려다보며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했다.
“한 명도 아니고 열댓 명이나 되는 엘프들을 한꺼번에 죽일 정도로 힘을 사용했다. 속이 꼬일 만도 하지. 힐링 워터로 치료한 후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질 거다.”
“아….”
“그리고 들어가면 자네의 상처도 치료하도록 해라.”
델리온이 손을 까닥여 에녹을 부르고, 의무병들에겐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채이는 에녹과 함께 레오나드를 부축해 쿠쿠프의 집으로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다가 따라 들어온 의무병들은 레오나드와 채이에게 힐링 워터를 건넸고 뒤이어 다친 드워프들과 기사들도 바삐 치료하며 돌아다녔다.
분위기는 다소 어두웠다. 엘프들을 성공적으로 내쫓았다는 사실에 당장 기뻐하기엔 습격의 피해가 가볍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습격한 적의 수는 겨우 스무 명 안팎이었다. 이후 엘프들이 재정비해서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한 뒤 본격적으로 공격해올 것을 생각하면 밝은 분위기일 수는 없었다.
“레오… 괜찮니?”
상처 위에 힐링 워터를 뿌린 채이가 힐링 워터를 마시고 잠시 이마를 짚고서 앉아 있는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피를 흘리던 증상은 바로 사라졌고 안색도 차츰 괜찮아졌다.
‘다행이다.’
피를 본 직후 레오나드가 정말 어떻게 되어버리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채이는 그제야 안도했다. 어째 몸에서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채이는 상처 안 아팠어?”
그 와중에 레오나드는 채이 걱정부터 하고 있다.
그까짓 조금 긁힌 게 뭐라고… 채이는 절로 한숨을 뱉고 말았다.
“응.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진짜야. 흔히 있는 일인데 뭐.”
“…흔히 있어?”
아차.
의아한 듯 쳐다보는 레오나드와 에녹의 시선에 채이의 말문이 막혔다. 혼이 쏙 빠져서, 그만 말이 잘못 나오고 말았다. 이런 일이 흔히 있었던 건 전생이지 베타라는 약자의 위치에서 보호받고 있는 지금이 아닌데 말이다.
잠시 난감해하던 채이는 적당하게 말을 둘러댔다.
“그러니까… 마물을 잡고 다녔을 시절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는 말이었어.”
“음.”
“아무튼! 나는 자리 비켜줄게. 피곤하기도 할 테니까 오늘은 이대로 푹 쉬어.”
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그런 채이의 손목을 붙들고 말했다.
“나는 채이가 옆에 있어야 더 안정돼. 그러니까 나 두고 가지 말아줘.”
귀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투정이었다. 채이는 가슴 안쪽이 몽글몽글 간지러워져서 레오나드의 똘망똘망한 눈을 슬쩍 피했다. 이리 나오니 채이로서는 단호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럼 두 분, 함께 쉬고 계세요.”
마침, 에녹이 적당히 빠질 수 있는 타이밍에 끼어들어 채이를 다시 앉히고 떠났다. 결국 레오나드의 곁을 지키게 된 채이는 행여나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솔직히 단둘이 남게 되니까 조금 그런 쪽으로 의식하게 되었지만, 채이는 아픈 애 앞에서까지 야시시한 생각을 해버리는 음흉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오나드는 음흉했다.
“채이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
레오나드는 에너지를 충전한답시고 몸을 기울여 채이를 안았다. 30분은 그렇게 안고 있어야 한다나?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는 녀석이 딱 봐도 다른 속셈을 갖고 있는 듯하였기에 채이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오늘은 봐주고 내일 해야지, 하면서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잔소리 폭탄이었다.
“너. 앞으론 그런 무리하지 마.”
“응.”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놀랐다고. 왜 그런 부작용 있는 힘을 함부로 쓰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잘됐다며 안도하고 있었는데.”
“미안해.”
“아니, 뭐… 네 딴에는 나 구하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 미안할 일까진 아니지. 그래도 난 네가 안 다쳤으면 좋겠으니까.”
“…나도.”
문득 채이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레오나드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도야, 채이… 미안해. 계속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좀 더 빨리 가지 못했어.”
그제야 채이는 깨달았다.
‘아.’
레오나드가 하마터면 ‘죽는 상황’이 벌어질 뻔한 것에 대해 큰 죄책감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걸.
“…….”
채이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레오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개를 든 레오나드가 기습적으로 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뽀뽀 수준의 키스였고 금방 떨어졌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채이는 새빨갛게 익은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앗, 야. 너 또 이런 곳에서….”
“상관없잖아.”
“상관있거든? 공공장소에선 그런 거 하는 게 아니야.”
엄연히 말하면 여긴 쿠쿠프의 집이고 사람이 많긴 하나 공공장소라고 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그리고 다들 다쳐서 치료를 받거나 피곤해서 쉬는 중인데, 이런 장소를 불문하는 애정 행각은 민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 레오나드를 민폐라고 생각할 정도로 용기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둘만 있는 일 생기면 매번 이런다니까. 얼른 잠이나 자, 이 녀석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채이가 레오나드를 눕혔다. 레오나드는 온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채이의 말을 들었으나 누워서도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래도 피곤했던 건 맞는지 눈을 감은 레오나드는 그대로 금방 잠들었다. 그의 옆에서 턱을 괸 채 길게 누워 있던 채이는 레오나드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새근새근 잠든 레오나드를 담고 있는 채이의 눈에 어두운 걱정이 깃들었다.
‘…엘프들이 재정비를 끝내고 다시 쳐들어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부상자가 생기겠지.’
현재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충돌하면 또 모른다. 더군다나 레오나드의 힘이 그의 몸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걱정이 깊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무식하게 싸우는 것 말곤 방법이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채이는 엘프에게 죽을 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엘프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채이는 크게 다쳤거나 어쩌면 이곳에 살아 있지 않았으리라.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엘프가 채이를 봐주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 망설였던 걸까.’
죽이려던 순간 채이를 보고 무언가를 알아본 것처럼 당황했던 모습도 상당히 이상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거기서부터 채이 본인이 원하는 알맞은 해답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기분을 느끼던 채이는 바른 자세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겉보기와 다르게 체력을 제법 소모했던 채이는 금방 잠이 들었는데….
문득 눈이 뜨였다.
‘…꿈?’
채이는 어느새 끝과 시작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