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어쩐지 그 모습에 마음이 이끌린 채이는 옆자리로 슬쩍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쿠쿠프.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채이 아가구나.”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든 쿠쿠프가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채이가 말을 걸어준 덕에 아까보다는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옅어져 있었다.
“그냥 세계수 뿌리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는지, 걱정되어서 말이야. 마음이 심란하더구나.”
“저희들이 있잖습니까.”
“그래. 하지만 아가들이 강한 만큼 엘프들도 만만치 않은 강자들이다. 거기다, 엘프들은 과격하기까지 하지. 싸우다 보면 다치는 자가 나올 것이고 어쩌면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야.”
“…….”
“나는 그게 걱정인 거란다.”
채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레오나드를 비롯한 사람들이 다칠까 봐 걱정인 건 채이도 마찬가지였기에, 쿠쿠프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특히 최전선에서 싸우게 될 레오나드가 걱정됐다. 에녹의 경우 채이와 함께 후방에 있을 것이고 로렌스는 보조하는 입장이기에 비교적 안전할 테지만 레오나드는 달랐다.
물론 채이가 아직 레오나드의 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서 더욱 그러했지만 말이다.
“되도록 엘프들과 싸우지 않고 대화로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호홍. 그게 되면 정말 좋겠지.”
쿠쿠프는 채이의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웃어넘겼다. 그런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채이는….
‘정말 이겨서 굴복시킨다는 선택지 이외에는 엘프들과 대화할 방법이 없는 걸까?’
설령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시도는 전부 해보고 포기해야 하지 않나,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 내 넋두리를 들어주어 고맙구나. 여기까지 오느라고 지쳤을 텐데 이만 자러 가도록 해라. 오늘 밤은 아마 안전하지 않을까 싶으니….”
그러고 쿠쿠프가 자리를 털며 일어나려는데, 예상치 못한 이변이 터지고 말았다.
댕! 댕! 댕! 댕!
큰 종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채이와 쿠쿠프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을 때 감시탑에서 보초를 서던 드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다! 습격이다!”
며칠 동안 잠적을 탔다던 엘프들이 마침 공교롭게도 오늘 밤,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오늘 오다니…!”
쿠쿠프가 허를 찔린 듯 당황하며 탄성을 삼켰다. 경보가 들린 순간 델리온을 비롯한 네 명의 우성 알파들이 뛰쳐나왔고, 밖에서 쉬고 있던 기사들도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채이가 달빛을 등지고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았다. 성별이 모호한 그는 마물의 흉측한 안면 가죽을 가면으로 쓰고 있었으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기다란 금색 머리카락은 달빛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저게 엘프….’
어째서인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아름답고 절제된 기품이 풍기고 있었다.
“왔다….”
“숨어. 숨어.”
밖에서 놀고 있던 어린 드워프들을 어른 드워프들이 집 안에다 숨겼다. 현재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곳에 선 엘프 한 명뿐이었기에 기사들은 그를 둥글게 포위하고 진을 만들었다.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던 델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설마 혼자 쳐들어온 건가.”
제아무리 전투 민족인 엘프라 할지언정 혼자 우성 알파 넷을 상대하긴 힘들 텐데. 그는 이 상황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즈음 자신을 포위하든 말든 우아한 걸음으로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온 엘프가 이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건 채이를 비롯한 일행들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아스타리우스의 제국 공용어였다.
“포기를 모르고 지원군을 불렀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아직도 이 신성한 땅에 발을 붙이고 버틸 생각인가?”
듣고 있던 일행들이 흠칫 놀랐다. 당황한 건 채이도 마찬가지였다. 엘프들은 이미 이쪽 상황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채이 일행이 막 도착한 오늘 밤, 때마침 나타난 것도 의도된 일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이쪽이 장거리 이동에 지쳐 있는 틈을 이용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들도 계속된 신경전에 지친 것 같다고 했으니 이쪽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기 전까지 일부러 쉬었다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역시 혼자 나타난 이유는 아리송하다.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어딘가에 매복해 있다든가.’
그리고 혼자서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건 시선을 자신에게만 집중시켜 이쪽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속셈일지도. 그리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문제는… 어디에 있냐는 건데.’
채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서도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엘프들이 기척을 숨기는 데에 능숙한 건지, 아니면 빗나간 추측일 뿐인지, 기민한 우성 알파들조차 캐치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가면을 쓴 엘프의 한마디가 채이의 상념을 깨웠다.
“그대들이 불쌍하여 지금까지 많이 봐주었거늘… 이리 나오겠다 하면, 우리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섬뜩해지는 것도 잠시. 돌연, 엘프가 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며 허공을 그은 검이 아래로 늘어졌다.
“전부 죽여서 처리하는 수밖에.”
직후 사방에서 살기가 몰아쳤다. 이미 엘프들은 마을 전체를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꺄아아악!”
“으악!”
반응하고 대비할 틈도 없이 날붙이들이 쏟아졌다.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엘프들의 공격에 몇몇 드워프와 기사들은 벌써 다치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채앵!
순식간에 서로의 검이 엉키고 부딪치고 피가 튀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엘프들은 하나같이 마물의 안면 가죽을 가면으로 쓰고 있었기에 정말 괴물처럼 보였다. 이쪽은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 반면, 저쪽은 거리낄 게 없으니 그 손속이 더욱 냉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상대를 가리지 않는 끔찍한 공격은 채이도 피할 수 없었다.
“윽…!”
“채이 아가!”
채이가 쿠쿠프를 살리기 위해 밀쳐내다가 날아오는 검에 팔이 스쳤다. 흰옷을 적시는 붉은색 피에 쿠쿠프의 안면이 파랗게 질렸지만 살짝 그인 정도라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채이의 눈앞에 엘프가 직접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채이!”
템포 빠른 기습에 대응하느라 반응이 조금 늦어버린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채이는 1초의 방심만으로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눈앞에 선 엘프의 검이 제 심장을 뭉개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짧은 거리에서 자세가 무너진 채로는 그 검을 쉽게 피할 수도 없다. 최대한 급소를 피해 맞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채이가 쿠쿠프를 뒤로 물리면서 엘프와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였다.
찰나의 일이다.
검을 들었던 엘프가 순간 채이를 보고 당황하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져 있던 채이는 그 엘프의 의미심장한 망설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뭐지?’
그런 의문을 느낀 순간 레오나드의 검이 끼어들었다.
“큭!”
레오나드가 채이를 품에 안아 숨기자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인해 상처 입고 만 엘프도 뒤로 크게 물러섰다. 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 고맙….”
하지만 레오나드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떨었다. 굉장히 화가 나 있던 레오나드는 반쯤 맛이 가 있다고 할 만큼, 살기가 형형한 눈으로 엘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별안간 채이는 레오나드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느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레오나드의 페로몬은 차분히 바닥으로 깔리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훅 퍼져나갔다. 마을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양이었다.
“……!”
그걸 느낀 엘프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여 어기적댄다. 무언가에 행동이 강제되고 있는 것처럼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채이는 바로 눈치챘다. 엘프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전부 레오나드의 힘 때문이라는 걸.
실제로 ‘마물들을 복종시키는’ 레귤러 이능향… 레오나드가 가진 이능향의 힘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원래 ‘우성 알파의 레귤러 이능향’은 고등 이종족들에게 통하지 않는 힘이다. 상대가 우성 알파만큼 심신이 강인한 생물이라면 복종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예외였다.
그의 이능향은 같은 레귤러 이능향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강하여 돌연변이 같은 수준의 힘을 가졌기에 고등 이종족들조차 꿇릴 정도였다.
공기가 텁텁해질 만큼 풀려난 페로몬이 엄청난 위압감으로 머릴 짓누른다. 그나마 그것도 레오나드가 이성을 붙들고 있었기에 농도를 조절한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절해버리고 말았으리라. 다만 레오나드가 품에 안고 있는 채이 주변에는 페로몬이 더 낮고 얕게 깔려 있었기 때문에, 채이는 다른 이들만큼의 위압감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죽어.”
곧 레오나드의 입에서 살벌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과묵한 엘프들이 하나둘 검을 들었다. 명령을 거부하는 엘프들도 몇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었다.
-서걱.
가면을 쓴 머리들이 한꺼번에 바닥을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