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어난 일행들은 다시금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쿠쿠프는 가는 길 도중에 수인족들의 역참이 있으니 그곳을 거쳐 이동하면 오늘 안에 축복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마차를 과감하게 돌려보내고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일행들은 역참으로 가기 위해서 숲을 한참 가로질렀다. 어제에 비해 긴장이 풀린 상태인지 일행들이 조잘대며 떠드는 목소리가 지루하지 않은 백색 소음처럼 들려왔다.
‘시원하다.’
일행의 중간에서 걷던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아침 이슬을 잘 머금은 데다가 커다란 나뭇잎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어서 서늘하니 기분 좋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죠?”
“거의 다 왔다.”
앞장서고 있던 쿠쿠프가 델리온의 물음에 고개를 까닥일 즈음. 숲의 끄트머리가 보이자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거대한 벽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하나 나 있었고,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꼭 현대에서 보던 고속도로 터널 입구와 비슷한 모양이라 채이는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보게나!”
쿠쿠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 안쪽에서 나뭇가지를 꼬나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팔을 자유롭게 움직였으나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생김새만 보아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드워프나 엘프나 드래곤과 같은 존재들과도 다르다. 저들은 수인이라 불리는 소수 종족. 엄밀히 따지면 저들도 고등 이종족이었다.
물론 ‘고등 이종족’을 말할 때 보통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 태생의 뿌리가 확실한 드워프, 엘프, 드래곤만을 가리키기에 수인은 거기에 묶여서 불리지 않았다. 수인은 먼 과거 인간과 유전자가 섞이며 생긴 아종이라는 말도 있어 이종족이란 표현을 일부러 안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채이가 보기에는 다 인간과 달랐기 때문에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오래전부터 굳어져서 내려온 관념이라니까 그러려니 했다.
“오. 쿠쿠프잖아.”
쿠쿠프를 알아본 수인이 입에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아그작 부러트리곤 다가왔다.
조금 긴 주둥이에 새까만 코, 회색빛 털과 삼각형의 뾰족한 귀 그리고 꼬리뼈 아래로 살랑거리는 풍성한 꼬리. 생김새로 보아서는 회색 털을 가진 늑대 수인인 듯하다. 예상이 맞았는지 수인 옆으로 온순한 늑대 2마리가 함께 따라 나오고 있었다.
“애들 이용하려고?”
“그래. 축복의 땅으로 갈 거다.”
그에 무심히 탄성을 내뱉은 수인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그 신호를 들은 늑대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어나왔다. 마침 통로 안쪽에서 말 수인처럼 보이는 이가 힐끔 고갤 내밀었지만 수줍은지 가까이 다가오진 않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축복의 땅까지 가는 길은 평탄하니 이 녀석들을 이용하도록 해. 빠르기도 하고. 물론 안전을 생각할 거면 말이 더 좋긴 한데, 이게 비싸거든.”
늑대 수인이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무래도 효율이 달라지는 문제다 보니 쿠쿠프는 일행들과 먼저 의논을 했고 최종적으론 늑대들에게 도움받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가들아. 잘 바래다주고 와라.”
늑대 수인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자 늑대들이 강아지처럼 좋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몇 마디 짖어 대답한 늑대들은 이윽고 일행들을 태운 수레를 끌면서 통로를 빠져나갔다. 수레가 많이 덜컹거렸으나 터널을 나가고부터는 완만한 평야 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정돈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해가 다 떨어질 무렵. 일행은 평야를 넘어 새로운 숲으로 진입했다. 거기서부터는 안전을 위해 속력을 줄였지만 면적이 넓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제 다 왔구나. 저 앞이다.”
채이와 같은 수레에 타고 있었던 쿠쿠프가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든 채이는 정면에서 점처럼 빛나는 은은한 불빛을 발견했다. 저곳이 바로 축복의 땅에 자리 잡고 있는 드워프들의 마을인 모양이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언덕 끝에 다다르자 늑대들이 속도를 눈에 띄게 줄였다. 잠시 후 집 밖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드워프들이 기척을 느꼈는지 하나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늑대들을 끌고 나타난 인간들이 수레에서 우르르 내리자 긴장하는 눈치였지만 그 사이에서 쿠쿠프를 발견한 드워프들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쿠쿠프! 무사했구먼!”
“그들이 지원군인가?”
드워프들은 쿠쿠프를 맞이해주면서 뒤쪽에 있는 일행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성인 드워프들보다 훨씬 더 조그만 어린 드워프들이 서슴없이 다가와 신기하단 눈으로 일행들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나?”
“다섯 명이 다쳤어. 한 명은 크게 부상을 입었고… 그래도 저번 전투 이후로 그들도 많이 지쳤는지 며칠 내내 안 오고 있어. 당분간은 조용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마 다행이군. 부상자는?”
“저쪽.”
드워프와 대화를 나눈 쿠쿠프가 부상자의 위치를 확인한 뒤 델리온과 대화를 나눴다. 델리온은 늑대들부터 돌려보내고 의무병들에게 지시하여 드워프들을 돕도록 했다. 그사이 레오나드와 셀리언도 언제 어디서 습격할지 모르는 엘프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재빨리 시작했다.
다들 바빠 보였다. 반면에 마땅히 해야 하는 임무가 없던 채이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지켜보다가 드워프 마을을 슥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네.’
마을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의 창문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오며 어두운 밤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라, 모든 드워프가 이곳에 모여 사는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땅 위로 울긋불긋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뿌리가 축복의 땅을 감싸고 있다. 시작점이 되는 나무의 몸통은 보이지 않았지만 뿌리의 일부만 봐도 얼마나 커다란 나무일지 대강 짐작이 갈 정도였다.
‘저게….’
이번 문제의 핵심인 세계수 뿌리겠지.
평범한 나무가 저리 클 순 없었기에 쉬이 추론 가능했다.
“저게 세계수의 뿌리야.”
그때 채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세계수의 뿌리임을 눈치챈 듯 곁으로 다가온 클레망이 너스레를 떨었다. 슬쩍 곁눈질로 쳐다본 채이와 눈이 마주친 클레망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웃으며 말했다.
“신기해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긴 합니다. 처음 보니.”
그러고 대화가 끊겼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 이유가 단순한 오지랖이었나 하고 채이가 생각할 즈음 주위를 슬 둘러본 클레망이 본론을 꺼냈다.
“계속 궁금했는데 너 레오나드랑은 무슨 사이야? 나쁜 의도로 물어보는 건 아니고. 그냥 둘이 엄청 친밀해 보이니까 괜히 호기심이 생기더라고.”
혹여 좋지 않은 의도로 물어본다고 의심받을까 걱정했는지 변명까지 빠르게 덧붙인다. 클레망은 제 곁에 레오나드가 없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로 협력하는 사이라 해도 이제 며칠 얼굴을 봤을 뿐인 타인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줄 생각이 없던 채이는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글쎄요… 생각하기 나름이니 클레망 공자님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시죠.”
같은 제국에 속해 있더라도 언제든지 국가 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빌미를 잡힐 만한 발언은 조심스럽기도 했다.
“너무해라. 이렇게 선을 긋네.”
클레망이 꽤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로 징징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칼같이 무시해버린 채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흐음.’
그 모습에 클레망은 눈앞의 베타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레오나드 정도 되는 귀족과 연이 닿은 베타라기에 자만심에 젖어 아는 정보를 술술 불까 싶었건만… 그런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 참.’
결국 클레망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지만 이대로 물러나기로 했다. 제 아버지가 랭커스터로 가는 김에 ‘그들이 거둔 수상한 베타’의 정보를 알아 오라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듯싶었다.
“자네들! 이리로 오시오!”
그즈음 누군가의 큰 외침에 클레망과 채이가 고개를 돌렸다. 쿠쿠프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던 드워프가 집으로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배고플 테니 식사부터 하세!”
아무래도 뒤에서 그들을 위한 식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보자고.”
픽 웃은 클레망이 고개를 까닥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채이도 따라갔다. 화려한 만찬이 차려지고 좁은 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드워프들과 함께 즐거이 떠들며 식사를 즐겼다.
“고기는 아직 더 있다. 그러니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어라. 여기까지 함께 와 줘서 다시 한번 고맙구나, 다들.”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죠.”
“호호홍. 겸손하기는! 우리도 이곳에서 평생을 지내며 먹고 살아왔다… 언젠가는 새로운 세계수의 뿌리가 생기는 곳으로 떠나게 되겠지만 당장은 갈 곳이 없는 신세야. 그런 우리를 자네가 배려해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어.”
쿠쿠프가 무척 고맙다는 듯 웃으면서 델리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후 많이들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쿠쿠프는 밖으로 나갔다. 채이는 그가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에녹, 레오나드, 로렌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쿠쿠프와 다시 만난 건 배부르게 식사를 끝내고 바람을 쐬기 위해서 잠깐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응?’
쿠쿠프는 저만치 홀로 앉아 평소보다 깊어진 눈으로 세계수 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