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설마 그걸 단번에 물어볼 줄은 몰랐던 채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 어. 그땐 그랬었는데.”
“그랬었는데?”
“그게 말하자면 복잡해서… 어쨌든 사귀게 된 상태야. 그보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레오나드가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 없지. 그 녀석이 채이를 좋아하는 건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사귀게 됐다는 건 방금 전에 눈치챘어.”
금세 시무룩해져 버린 실비에트는 채이 옆자리로 올라가 보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나드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싫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러고 보면 해츨링일 적에도 둘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 같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두어도 언젠간 친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어차피 둘은 그냥 마음이 안 맞아서 아웅다웅하는 거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자주 얼굴 보고 지내다 보면 정이 들면서 지금보다는 관계가 괜찮아지지 않을까.
“어쨌든 레오나드가 채이를 힘들게 하면 말해! 내가 그 녀석을 아주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까.”
“그래그래.”
채이가 풋 웃으며 실비에트를 쓰다듬었다. 방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가족처럼 자신을 걱정하여 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그저 고마웠다.
이후 채이와 실비에트는 그간 못 보는 사이에 쌓였던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면서 저녁이 다 되도록 떠들었다. 밥을 먹고, 씻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도 한참을 떠들다가 함께 잠들었다.
그렇게 아주 건전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돌아갈 채비를 끝낸 채이가 밖으로 나왔더니 레오나드가 무척 매서운 눈으로 실비에트를 노려보았다. 어제 질투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채이도 모를 수 없었다.
‘귀엽기는.’
전혀 귀엽게 느낄 만한 눈초리가 아니었지만 채이의 두 눈엔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 있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민하던 채이는 주춤거리며 레오나드 쪽으로 다가가 손을 엮어 잡았다. 마음 풀라는 의미로 보인 나름의 애정 표현이다. 채이 것보다 더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 있던 레오나드는 그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아무 일 없었던 거지?”
그에 채이가 별일 없었다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잠깐 사이 둘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실비에트가 그새를 못 참고서는 또 심술을 부렸다.
“어제 일은 둘만의 비밀이야.”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비밀스러웠던 하루가 되어 버렸다. 굳은 레오나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실비에트는 얄밉게 혀를 내밀며 약을 올렸다. 또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채이가 끼어들었다.
“쓰읍. 괜히 오해하게 그러지 마, 실비. 그리고 내가 너 어릴 때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었니?”
“히잉.”
결국 채이에게 혼나고 만 실비에트는 입을 빼죽 내밀었고 레오나드는 조금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이럴 때 보면, 아직 레오도 어린애 같은데 말이지…. 문득 레오나드와 채이의 눈이 마주쳤다. 깊은 호수처럼 새파란 시선은 새삼스럽게 느껴질 만큼 짙어,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뛰었다.
채이가 슬금 시선을 떨구었다. 이만큼 나이 먹은 아저씨가 첫사랑에 빠진 십 대 청소년처럼 떤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했다.
곧 에녹이 거실로 나타났고 레무엘과 라무드도 채이와 그 일행들을 배웅하기 위해서 레어 밖으로 함께 나왔다. 실비에트가 저택까지 일단 바래다 주겠다 했기 때문에 실비에트는 조금 더 그들과 같이 있을 예정이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실비.”
“응!”
폴리모프를 푼 뒤 본모습으로 돌아간 실비에트가 운반통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을 날아야 했기 때문에 좀 더 안전하도록 운반통에 채이와 일행들을 태워서 가기로 했다. 손을 흔들어 주는 레무엘과 라무드를 뒤로 하고, 펄럭 날아오른 실비에트가 구름을 뚫고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채이가 운반통 안에서 구경하고 있으려니까 심술쟁이처럼 웃은 실비에트가 또 먼저 레오나드에게 시비를 걸었다.
“레오나드 여기 떨구고 갈까?”
물론 조금 전에 채이가 실비에트를 따끔히 혼냈던 효과가 남아 있는 듯 레오나드는 눈만 흘기고 받아쳤다.
“아까 그렇게 혼나고도 제정신을 못 차렸군. 채이한테 또 혼나고 싶으면 그리하든가.”
“이익! 역시 레오나드 짜증 나.”
“그 말 그대로 네게 돌려주마.”
정말이지 유치한 녀석들이다.
‘에휴.’
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후 안전하게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온 채이와 일행들은 곧바로 델리온과 만나서 다음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은 축복의 땅으로 향할 것’.
‘그리고 드워프들과 합류할 것’.
가는 길에는 위험한 마물들의 협곡이 존재했기 때문에 기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레오나드와 델리온을 제외한 랭커스터 일원들은 가주의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남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와 떠날 채비를 약 10일 만에 끝마치고…. 축복의 땅으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 앞에 이번 작전의 핵심 멤버가 속속히 모였다.
“채이. 준비는 됐어?”
“응.”
채이가 공명의 피리를 자신의 목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이빨을 깎아서 만든 듯한 이 피리는 채이가 불면 실비에트에게만 들리는 공명음을 신호로써 보낼 수 있어, 이번 작전에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또한 이 피리를 이용하면 실비에트를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었기에 핵심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는 그가 함께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드래곤을 불러내는 피리구나? 말로만 들었던 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그때 익숙하지 않은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채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까무잡잡한 사내가 빙글 웃으며 친근하게 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물론 레오나드의 벌레 쫓는 듯한 손짓에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함부로 손대지 마.”
“어이쿠. 무서워라.”
레오나드가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니, 두 손을 떼어내며 입가에 씨익 미소를 건다. 이 능글맞은 사내의 이름은 클레망 롤라이스. 컴베스트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남쪽의 영지 도즈망에서 지원을 온 우성 알파였다.
그리고….
“그러다 진짜 손모가지 잘린다.”
저 여인 또한, 남쪽에 위치한 영지 중 하나인 가브리오에서 지원을 온 우성 알파로 이름은 셀리언 스테폰이었다. 클레망과 셀리언의 가문은 랭커스터와 클랭커스처럼 친근했기 때문에 서로는 이미 아는 사이라고 했다.
물론 가문끼리 친한 것과 별개로 클레망과 셀리언이 친하진 않은 듯했다. 아주 경망스럽게 호들갑 떠는 클레망을 차갑게 노려본 셀리언이 채이와 레오나드를 돌아보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오나드 공자, 채이 공. 이 손버릇 나쁘고 도움 안 되는 놈팡이의 목을 당장 달아버릴까요? 드래곤이 도와준다면 우성 알파 한 명쯤 없어도 전혀 문제없을 거 같은데.”
“셀리언. 그냥 네가 내 목을 달아버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죽어.”
“너무행.”
클레망이 전혀 굴하지 않고 깝죽대자 셀리언이 작고 아담한 체구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페로몬을 풍겨댔다. 그 페로몬에서 당장이라도 저 목을 따버리고 싶다는 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채이는 익숙한 듯, 싱거운 웃음을 뱉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엊그제 랭커스터 저택에 도착한 이후 계속 이런 느낌이었다. 매일 싸우는 것 같은데 질리지도 않은가 보다.
레오나드가 피곤한 건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꾹꾹 누를 때였다. 기사단을 이끄는 로렌스가 출발 신호를 알린 다음 행렬의 제일 앞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정말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가자. 채이.”
채이도 레오나드와 함께 미리 지정된 마차에 올라탔다. 가장 큰 마차로 행렬의 중간에 위치한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에 함께 올라타는 이는 델리온, 쿠쿠프, 레오나드, 채이, 에녹. 거기에 클레망과 셀리언. 이렇게였다.
가면서도 작전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트드드드드….
마차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그 가운데, 웬일로 진지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클레망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엘프들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
“얼마나 예쁠까? 궁금하다.”
“…….”
“셀리언. 너도 궁금하지 않아?”
결국 그 진지한 헛소리를 듣다가 참지 못한 셀리언이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나한테 한 번만 더 그딴 헛소리하면 진짜 죽여버린다고 했지. 그 머리 뚜껑을 열어서 직접 입력시켜줘야 하는 건가?”
“아쿠. 클레망은 너무 무서워요.”
급기야 셀리언이 검을 빼 들자 에녹이 이런 좁은 곳에선 참으시라며 말렸다. 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쿠쿠프는 홍홍 웃으며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며 기름을 끼얹었다. 클레망은 그러든가 말든가, 히죽 웃고 있다. 이제 보니 셀리온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저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두 사람이 다시 다투니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긴 했다.
그렇게 저택을 빠져나간 뒤 안정적으로 달리던 마차가 영지 경계선을 한참 넘어서 우둘투둘한 대지를 가로지를 즈음….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바깥 상황을 확인한 쿠쿠프는 마차에 준비된 협탁에 지도를 펼쳤다.
“그럼 마물들의 협곡으로 진입하기 전에 다시 한번 주의 사항을 말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