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입구 안으로 무사히 진입한 드래곤들은 다시 폴리모프했다. 순간 그들의 옷이 누더기가 되어 있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돌아오니까 옷이 빠르게 본래의 형상을 되찾더니 찢어진 부분도 스스로 수복되는 것이다.
옷이 저절로 재생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 점에 대해 질문하자 실비에트가 레어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걷던 중 설명했다.
“세계수 뿌리의 활력을 추출해 만든 드래곤 전용 특수 제복이라서 그런 거야.”
“드래곤 전용 특수 제복?”
“응. 과거에 비해 우리 드래곤들도 폴리모프를 하고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는데… 우린 모습을 바꿀 때마다 크기가 달라지니까 난감하잖아? 그래서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특수 제작하는 거지. 이 옷도 그걸 위해 만들어진 거고.”
“그렇구나. 신기하다.”
무려 자가 재생력을 가진 옷이라니. 확실히 유용한 기술이다. 잘 사용한다면 인간들의 삶에도 아주 유용하겠고.
‘세계수 뿌리인가.’
평민으로 살면서는 이런 고급 정보를 접할 일이 적었지. 이 세계도 알고 보니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구나. 새삼 세상은 넓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 다 왔어!”
문득 고개를 든 실비에트가 앞을 가리켰다. 마침 앞장서서 걷고 있던 레무엘과 라무드가 통로 끝에 도착해서, 거기에 딱 하나 있는 문을 열고 있었다. 채이 일행도 그들을 뒤따라 들어갔는데….
“우와!”
감탄을 뱉어내는 에녹을 따라 채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분을 느꼈다.
통로 끝에 달랑 하나 달려 있던 문이 너무도 소박해서 안쪽도 그리 넓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입이 벌어질 만큼 드넓은 로비는 거실인 듯했고 양쪽으론 계단이 있었으며 군데군데 방의 입구로 보이는 구멍이 존재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밝은 동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는데 여기저기가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어서 이색 호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채이가 열심히 구경하는 동안 레무엘과 라무드는 손님맞이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실비에트가 일행들을 이끌어 거실의 소파에 앉혔다.
“엄마랑 아빠가 간단한 주전부리랑 마실 것 좀 가지고 온다니까 편하게 앉아서 쉬고 있어.”
“고마워.”
채이의 감사에 히히 웃은 실비에트가 맞은편에 앉았다. 곧 레오나드와 에녹이 채이의 양옆에 착석하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실비에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건 뭐야?”
채이는 깜짝 놀랐다. 아직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거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실비에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비에트가 작게 웃곤 등받이에 기대었다.
“채이 마중 나가다가 들었어.”
“…그게 들렸어?”
붉은 드래곤과 대화를 시도할 때 부탁이 있어서 온 거라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그걸 떠올린 채이가 되묻자 실비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들의 청각 수준이란.
역시 드래곤은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럼 성깔이 어쩌고저쩌고하던 이야기도 라무드는 전부 들었겠군.’
하지만 그놈이 어찌 되는 건 지금 상황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드워프들의 영역에 있는 세계수 뿌리의 수명이 예상보다 빨리 절반에 달했다.”
본론이 나온 김에 레오나드가 채이 대신 서두를 열었다. 그러자 실비에트가 더 말해보라는 듯 레오나드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변을 감지한 엘프들이 움직이고 있지… 뿌리의 노후를 관리하기 위해.”
“뭐. 그게 걔네의 사명이라니까.”
실비에트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엘프들이 가진 ‘다름’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에게 관심이 깊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잖아?”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건 그 자체가 아니야. 활력 소모가 예상보다 빨라서 아직 다음 세대 뿌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지.”
“아.”
이어지는 설명에 바로 상황을 이해한 듯 실비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엘프들이랑 협상을 좀 하고 싶으니까 힘을 보태달라는 거구나?”
레오나드도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던 채이는 대화가 끝난 틈에 실비에트를 바라보았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실비에트는 이내 채이와 눈을 마주했다. 잠깐 사이 고민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좋아. 이유 없이 싸워 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대신에 나도 부탁 하나 할 거야.”
그 발언에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실비에트에게로 쏠릴 때였다. 때마침 돌아온 라무드와 레무엘이 주전부리와 음료를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실비에트는 음료에 빨대 같은 걸 꽂아 쪽 빨아 마신 다음 끊겼던 말을 재차 이었다.
“채이가 들어줘야 하는 거야.”
“…음. 무슨 부탁인데?”
어쩐지 뜸을 들이는 것 같아 채이가 물었다. 그에,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레오나드가 실비에트를 흘긴다. 레오나드의 반응을 보고서 오히려 악동처럼 씨익 웃은 실비에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채이의 하루를 내게 줘.”
“응?”
“오늘만큼은 온전히 나한테만 집중해달라는 거야. 한마디로 머물렀다 가란 거지. 나 오늘은 채이랑 단둘이만 있을래.”
대답은 옆에서 튀어나왔다.
“안 돼.”
베일 것처럼 단호하고 냉정한 레오나드의 반대였다.
그러자 실비에트가 입을 삐죽이더니 버럭 소리쳤다.
“왜 안 돼?! 그리고 그걸 왜 레오나드, 네가 정해? 난 채이한테 물어본 거야!”
“어린애처럼 억지 부리지 마.”
“억지 부리는 건 레오나드겠지.”
“하나도 크질 않았어.”
“채이는 나 많이 컸다고 했어!”
채이가 보기엔 둘 다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모르는 눈치다. 에녹은 완전한 제삼자로서 끼어들기 어려운 입장이었고, 레무엘과 라무드는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서 오순도순 과자나 씹으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채이가 나섰다.
애초에 못 할 부탁을 한 게 아닌데 왜 이런 말다툼이 이어지는지 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겠어, 실비. 오늘 하루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할게. 레오, 너도 괜히 싸우지 말고.”
하여 다소 실비에트 쪽으로 기울어진 대답이 됐고, 둘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실비에트는 좋다며 ‘아싸’를 외쳤고 레오나드는 이제 채이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채이. 난 싫어.”
“왜?”
“질투 나니까.”
아주 솔직한 투정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채로 얻어맞은 심장이 마구 뛰어서 채이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레오나드와 마주하고 있기가 어려워진 채이는 눈을 얌전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렸다.
“나, 난 또 뭐라고… 실비는 그런 거 아니잖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대답은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귀가 밝은 드래곤들은 선명하게 캐치해 냈다. 당연히 레오나드와 채이의 관계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기에 실비에트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내가 같이 있을 때만 해도 레오나드의 일방통행이었을 텐데. 언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담?’
실비에트도 질투가 났다. 하지만 그 질투는 레오나드의 질투와 결이 달랐다. 그는 채이를 가족이나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런 놈이 채이를 데려가다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었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 실비에트는 둘의 사이를 알게 되었음에도, 모르는 척 좀 더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나랑 같이 방으로 가자, 채이.”
실비에트가 벌떡 일어나 아직 레오나드에게 잡혀 있는 채이를 재촉했다. 레오나드의 매서운 눈초리가 실비에트에게 무언의 경고를 날렸지만 실비에트는 그걸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실비.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해?”
“그건 식당에서 같이 할 거야.”
“그래. 그럼 저녁때 다시 보자.”
채이가 제 손을 잡은 채 놓지 않고 있는 레오나드의 손을 다독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이는 생각을 이미 굳힌 것 같았기에 결국 레오나드도 채이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두 분께도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저희 집에서 푹 쉬고 가십시오.”
채이가 먼저 실비에트를 따라 그의 방으로 올라간 후, 라무드와 레무엘 또한 레오나드와 에녹에게 그리 권하며 일어났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안내를 받는 동안 실비에트의 방에 도착한 채이는 깔끔한 환경에 감탄하면서 구경했다.
“정리 정돈 잘하나 보네.”
“어지럽히면 엄마한테 혼나서.”
“응, 좋은 습관이야. 그런데 보통 집에선 폴리모프한 채로 지내는 거야?”
“응! 본체는 너무 덩치가 커서 평소에 활동하기가 불편하거든. 그래서 침대도 그냥 이 몸에 맞는 사이즈로 제작해놓은 거야.”
어쩐지 침대 크기가 드래곤이 눕기에는 한참 작은 사이즈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였다. 채이가 푹신한 침대에 앉아 편안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방문 커튼을 내린 실비에트가 빙글 돌아섰다. 이어 허공에서 채이와 눈이 마주친 실비에트는 잔뜩 들뜬 기분으로 채이의 품에 와락 안겼다.
“채이다! 진짜 채이!”
“진짜지 그럼 가짜겠니.”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라 그만 픽 웃어버린 채이가 복슬복슬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줄 때였다. 갑자기 실비에트가 고개를 벌떡 들어 비장하게 눈을 빛내기에 채이가 의아해하던 중 목소리를 내리깐 실비에트가 말했다.
“이제 그만 말해줘야겠어. 채이.”
“뭘?”
“언제부터 레오나드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거야? 분명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