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발전은 곧 축복의 땅에 내린 세계수 뿌리의 수명을 너무 앞당기게 됐어. 그리고 세계수 뿌리의 수명이 반 정도 남았음을 확인하면 세계수를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기 위해 움직이는 엘프들이, 이번에 예상보다 빨리 축복의 땅을 가져가겠다고 나온 거지.”
“한번 엘프들이 가져가 버리면 다시는 손댈 수 없게 돼. 만약 축복의 땅을 지금 뺏겨서 생산품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앞으로 경제에도 많은 타격이 생길 거야.”
“다른 세계수 뿌리는요?”
“있긴 합니다. 세계수는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요. 확인된 것도 몇 개 있습니다. 문제는 전부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죠.”
채이의 물음에 답한 오스카가 난처한 상황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레오나드가 거기에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바다 건너편에도 나라들이 있고 현재 확인된 뿌리들은 그들이 차지해서 사용하고 있어. 그쪽도 수명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제국에 빌려주진 않을 거야.”
“그렇구나.”
현존하는 뿌리는 모두 바다 건너편에 있는데 그곳에 있는 나라들이 자신들의 유한한 자원을 타국과 공유하지 않으려고 할 것임은 이해했다.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그럼, 기존에 쓰이던 뿌리가 수명을 다해서 사라지면 그 뿌리를 사용하던 나라들은 어떻게 돼? 수천 년쯤 되면 사례가 있을 거잖아.”
똑같은 자리에서 뿌리가 다시 생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장소에 생기는 걸까? 그런 의문에 대한 대답도 레오나드가 해주었다.
“응. 뿌리가 ‘생겼다 자라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일정한 주기가 있어서 문제만 없다면 수명이 반 정도 남았을 즈음 근처에 새 뿌리가 하나 더 생겨. 하지만 이번에는 예상보다 소모가 너무 빨랐지.”
“아직 이 근처에서 새 뿌리가 생겨났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예상하기로도 최소 5년은 지나야 생길 것 같다더군요.”
오스카가 말을 끝맺었다. 채이는 짧게 침음했다. 최소 5년…. 그러니까, 최소한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축복의 땅을 지켜야 한다 이거였다. 질문과 대화가 한차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델리온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축복의 땅을 이대로 넘겨줄 순 없는 상황이지. 그래서… 드워프 쪽에서 먼저 우리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러 온 거다. 엘프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와 달라고 말이다.”
“대화를 거부하고 있나 보군요.”
채이가 예리하게 짚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정도라면 드워프들의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뜻…. 그 말은 즉 온화한 대화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델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전적인 종족이라. 강한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이 걸어온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효과적이지.”
“안타깝게도 우리 드워프들이 전투에는 그리 능하지 않아서 말이야… 인간 발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거다. 지금도 우리 드워프들은 엘프들의 위협을 받고 있거든. 벌써 부상자도 열이 넘어서….”
쿠쿠프가 이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서 많이 위축된 모양새로 덧붙였다.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느껴졌다. 조금 의외였다. 아무래도 저 근육질의 육체는 오롯이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만 쓰이는 거였나 보다.
“문제는 하나가 더 남아 있다.”
그때 델리온이 말문을 열었다.
아직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무리 지어 행동하는 엘프들에게 맞서기 위해선 ‘단련된 우성 알파’들이 최대한 동원돼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 가문에 우성 알파라고는 단 둘뿐이라는 점이다. 나하고, 레오나드지.”
“아….”
“제국 차원에서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아스타리우스의 황후이면서 우성 알파인 마틸다 폐하가 있긴 하다만. 제국의 기둥 중 한 명이 장시간 자리를 비우는 건 꽤 위험한 도박이니까.”
그렇기는 했다.
전쟁이 점차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시대에 들어섰다지만 아직은 호시탐탐 뒤통수를 노리는 이들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방심한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섣불리 제국의 대표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성급하고 위험한 짓이었다.
더군다나 마틸다가 우성 알파로서 든든한 방패의 역할을 확고히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부탁한다고 해서 선뜻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을 듯하고. 제국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사안이니 지원은 가능한 만큼 하겠지만, 그거론 분명 한계에 부딪힐 터였다.
“제국의 다른 소속국은 어떻죠?”
“우성 알파를 보유한 소속국이 몇 있지. 당연히 연락을 넣어볼 거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가담해준다 해도 어찌 될지…. 애초에 우성 알파는 그 수가 원체 적으니. 엘프들이 진심으로 나오면 어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라는 뜻일 터… 역시 고등 이종족은 남다르구나 싶었다.
“그래서 차라리 외부자의 도움을 얻어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하여, 자네를 함께 불러낸 것이다.”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어져 드디어 채이를 오스카와 함께 불러낸 이유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길래?’
힘깨나 쓴다 한들 우성 알파들과 엘프 그리고 드래곤들에 비하면 그저 나약한 베타일 뿐인데 말이다.
‘…아.’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왜 자신을 불렸는지도 자연스레 눈치챘다. 채이가 알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니 델리온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 레무엘이 네게는 둥지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고 들었다. 염치없지만 그들에게 대신 부탁해줄 수 있겠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랭커스터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의 델리온은 정말 과거에 비하여 상당히 유해져 있었다.
“이렇게 꼭 부탁하지.”
쿠쿠프도 간절하게 덧붙였다.
채이는 웃어 보이고 답했다.
“좋습니다. 한번 찾아가 볼게요.”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지만 물어보는 것 정돈 괜찮을 테니까.
이후 드워프를 도와 축복의 땅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채이는 실비에트와 안면이 있는 레오나드와 에녹만 데리고 실비에트가 지내고 있을 드래곤의 둥지로 속속히 떠나게 되었다.
***
실비에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예상대로 험난했다. 드래곤들처럼 날개가 있지 않은 인간이 지나가기에는 힘든 곳이 많아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헤매진 않았다. 원래부터 자주 다녔던 길인 것처럼 그린 듯한 상세한 길이 떠오른 덕분이었다. 레무엘이 직접 뇌에 새겨준 길은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만 넘으면 되는 건가요?”
“응.”
채이의 안내를 따라서 어느 절벽 앞까지 도착한 일행들이 고개를 들었다. 에녹은 벅찬 숨을 몰아쉬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숨쉬기가 힘들어서 평소보다 체력이 달리는 것 같았다. 채이도 긴 숨을 후 뱉어내고 에녹의 어깨를 도닥였다.
“힘내. 이제 코앞이니까.”
“네….”
“채이는 괜찮은 거야?”
채이 곁으로 다가와 선 레오나드가 채이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물었다. 확실히 두 사람에 비해서 체력도 신체 능력도 훨씬 뛰어난 레오나드는 헐떡이기는커녕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다.
“응. 괜찮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러면서 채이의 이마에 쪽 입술 도장을 찍는 레오나드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틈만 나면 이렇게 뽀뽀를 해댔다. 숨을 고르다 말고 레오나드의 애정 행각을 목격해버린 에녹이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 이젠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좋기는 하지만 에녹도 있다 보니 민망해서 채이가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슬슬 다시 움직이자. 정말 다 왔으니까 도착만 하면 이제 푹 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에녹을 다독여 다시 이동을 시작한 채이가 절벽의 둘레길을 따라서 천천히 올랐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둔 둘레길이 아닌 탓에 폭이 좁은 곳도 있고 위험했다.
어느새 일행들은 낮게 내려온 구름에 가려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거기를 넘자 구름이 걷히고 절벽 너머의 정경이 보였다. 드래곤들이 모여서 지내는 곳인지 반대편 절벽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드래곤들의 둥지 ‘레어’가 여러 개 보였다.
“진짜 도착했다… 설마 드래곤들의 레어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날이 오다니.”
헐떡이다 말고 고개를 든 에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반대편, 드래곤 레어의 입구들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레오나드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인지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엘프들만큼이나 은둔적인 성향이 강한 드래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은닉처인 레어를 발견하고 또 그곳에 접근까지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채이도 낮은 구름에 조금씩 가려지며 어딘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정경을 잠시 구경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던 것도 잠시.
“……?”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찰나의 일이었다.
순간 허공을 가르며 퍼덕이는 무거운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그 정체를 채이가 알아채기 전에 줄곧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던 발현자들이 조금 더 빠르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채이!”
레오나드가 채이를 제 품으로 끌어와 다급히 몸을 낮췄다. 직후 거대한 그림자와 함께 날카로운 바람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
당황한 채이가 시선만 슬쩍 들어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가는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하늘을 빙글 돌아서 다시 이쪽을 노려보는 건, 붉은 몸체를 가진 거대한 성체 드래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