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레오나드의 가족들과 첫 식사 시간을 가졌던 날 이후….
제어라도 풀어놓은 듯 랭커스터 형제들은 시도 때도 없이 채이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불러 같이 티 타임을 가진다든가, 함께 식사를 한다든가. 바이올렛은 곧잘 검술 대련하자며 불렀고 할러드는 대부분 같이 놀고 싶어서 채이를 불렀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제법 곤혹스럽던 채이지만….
그것도 이제 일주일쯤 지나니까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페르난데가 가버리면서 심심하지 않을까 싶었던 차에 대화 상대가 생긴 데다 늘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와 주니 채이도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하여 오늘도 채이는 오스카와 바이올렛 그리고 특별히 할러드가 포함된 멤버와 티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어제 검술 수업이 있었겠구나. 필론스 공이 온 것을 봤다. 그분의 수업에는 잘 따라가고 있니?”
오스카가 문득 생각난 듯 할러드를 돌아보았다.
귀족 사회에서 9살은 교육을 시작할 나이라 할러드도 귀족 알파로서의 기본 소양과 기초적인 무기술들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대 기사단장 필론스 디 델피나리아는 로렌스의 아버지이며 ‘델피나리아 가문’은 대대로 랭커스터의 검으로서 봉사해온 가신 가문이랬다. 아직 나이에 비해 정정함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아들에게 일찍이 자리를 물려준 필론스는 이제 할러드의 담당 선생으로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같은 열성 알파인 오스카 또한 과거에는 필론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과 자주 만나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나둘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으음. 너무 엄하셔서 무서워….”
할러드가 과일로 만든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표정이 시무룩한 것을 보니, 수업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반면 맞은편에 앉아 집사장이 준비해준 과자를 쏙쏙 집어넣고 있던 바이올렛은 할러드의 말을 듣고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래. 필론스 공은 나같이 재능 있는 이를 좋아하지만 그만큼 노력하는 이도 좋아하거든. 네가 나 정도만 노력해도 앞으로 잔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걸?”
차기 기사단장이 되는 게 목표이자 꿈이라던 아이답다. 참고로, 바이올렛은 현 기사단장 로렌스가 검술 부문의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대신에 너는 두와르덴 마담에게 매번 혼나잖니. 교양이 부족하다고 말이야. 네가 진정으로 기사단장을 꿈꾼다면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말괄량이가 아니라 교양을 갖춘 통솔자의 재목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나, 나도 알아…!”
조곤조곤 아픈 곳을 찌르는 오스카의 질책에 바이올렛이 단숨에 보로통해졌다. 오스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반씩 섞이면 얼마나 좋아.”
그에 공감한 채이가 웃음을 삼킬 때였다.
구시렁대던 바이올렛이 마침 다른 주제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다. 딴 얘기지만 채이 공은 한때 사냥꾼이었다면서요? 그럼 마물이랑 직접 싸워 봤다는 거죠? 어땠어요?”
자기가 평소 좋아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표정에서 그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할러드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오스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더 이상 잔소리를 이어가진 않았다.
“음… 4등급 마물까진 잡아본 적이 있는데, 아마 지금은 못 잡을 겁니다. 4등급은 잡기 힘들어서. 특히 아수라하임이 만나본 것들 중 가장 까다로웠어요.”
그 마물은 이름 없는 숲 가까이에 있던, 또 다른 위험 지역으로 건너갔다가 만났었다. 레오나드가 발현하고 떠난 이후 이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다가 가게 됐던 장소였다. 잡기 힘들었던 만큼 부속물을 팔아서 짭짤하게 챙겼지만 말이다.
“4등급 마물이요? 감탄스러운 이야기네요. 저도 아직 4등급 마물은 못 잡는데….”
바이올렛이 채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채이가 강한 사람인 건 로렌스에게 전해 들어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올렛이다. 하지만, 역시 4등급 마물까지 잡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놀라웠다.
‘사냥꾼’이라 칭해지는 이들은 모두 베타이기 때문에 신체를 극한까지지 단련해야만 4등급 이상 마물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채이는 수십 년간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죽이기’ 교육을 받아 온 기억이 있었던지라 엄밀히 말하면 일반 사냥꾼들과는 사정이 달랐지만 말이다.
“아수라하임이 어떤 마물이야?”
배운 적이 있는지 없는지 기억을 더듬는 것 같던 할러드가 궁금증을 표했다. 아수라하임에 대한 설명은 오스카가 대신 해주었다.
“낮과 밤이 될 때마다 모습을 바꾸는 독특한 마물이야. ‘낮 형태 아수라하임’은 둔한 대신 제 몸을 단단하게 굳히기 때문에 쉽사리 급소를 찌를 수 없지. 반면 ‘밤 형태 아수라하임’은 무척 광폭하고 빨라서 위험해.”
“그렇구나.”
“다음에 두와르덴 마담이 마물과 관련된 기초 상식을 테스트 시험으로 낼 수도 있으니까 이참에 잘 외워두도록 하렴.”
“응!”
바이올렛이 더 빠른 성장에 대한 욕구로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 동안 할러드의 상식은 소폭 상승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문이 열리더니 집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티 타임을 위한 간식을 가져다주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스카 아가씨. 그리고 채이 님. 가주님께서 부르시니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순간 채이와 오스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갑자기 오스카를 이리 급하게 불러들이는 것까진 그렇다 치지만 채이까지 부르는 이유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급한 일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는요? 안 가도 되나요?”
바이올렛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에 집사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이올렛 아가씨와 할러드 도련님은 제외하고 데려오라 하셨으니 두 분께서는 동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채이는 자신만 함께 불러내는 이유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급한 일이라 하고, 오라는 걸 안 갈 수도 없었기에 일단은 오스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 타임은 아쉽지만 여기서 끝이었다.
“이쪽입니다.”
집사장이 곧바로 앞장서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서 도착한 곳은 회의실이었다.
딸깍.
회의실 문이 열리고 집사장이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보인 건 레오나드였다. 맞은편 자리에는 에일런이 있었고 정면 방향에는 델리온이 앉아 있었다. 거기서 의외였던 건 델리온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드워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쿠쿠프가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쪽을 돌아본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고 심각한 분위기가 여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채이도 덩달아 긴장했다.
“왔군. 우선 앉도록 해라.”
채이와 잠시 눈이 마주친 델리온이 말했다.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제 옆자리로 오라는 제스처를 했기에 채이는 레오나드의 옆에 앉았고, 오스카는 그 맞은편인 에일런의 옆에 앉게 되었다.
“급한 일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오스카가 먼저 운을 떼자 델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본론부터 꺼냈다.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쿠쿠프가 덧붙였다.
“우리가 자재를 공급해오는 축복의 땅에 ‘세계수 뿌리’가 있는데 그걸 명목으로 땅을 가져가겠다며 다짜고짜 선전포고하더군.”
오스카는 단편적인 설명만으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했다.
“음. 확실히…. 언젠가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였군요. 자재로 많이 사용하다 보니까 뿌리의 활력 소모가 과하게 빨라져서 그런 걸까요.”
“내가 예상하기로도 그렇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채이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다행히 처음부터 상황에 대한 설명은 차근차근 해줄 생각이었는지 오스카와 쿠쿠프의 대화가 멈추자 델리온이 채이를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고등 이종족인 엘프는 세계수를 지키는 걸 삶의 과업으로 삼는 존재들이다.”
채이도 호기심이 당겼던 탓에 귀를 쫑긋하게 열고서 그들이 해주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세계수는 이 세상에 잔뿌리를 내리고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하면서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 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지.”
“세계수 뿌리로 만든 건 엄청 튼튼해서 예전부터 자재로 많이 사용했어. 최근에는 세계수 뿌리에서 뽑아낸 활력을 천연 에너지로도 조금씩 사용하고 있고.”
에일런이 덧붙인 설명에 채이가 작게 감탄했다. 세계수 뿌리가 어떻다 하는 이야기를 가끔 책에서 보았지만, 채이로서는 평소 잘 알 수 없었던 분야의 일이었다. 델리온이 다시금 설명을 이었다.
“특히 드워프와의 교류가 갈수록 많아지는 현재, 드워프들이 세계수 뿌리를 써서 만든 생산품도 많아졌고 제국의 나라들이 그걸 수입해서 사용하는 비중도 늘었다. 컴베스트도 예외가 아니지.”
한차례 눈을 감았다 뜬 델리온이 이내 본론으로 들어가는 서두를 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