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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62화 (62/105)

062화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오후.

외부 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델리온의 집무실에는 한산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기계처럼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델리온은 별안간 손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들어와도 좋다.”

델리온의 허락이 있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이후 나타난 이는 몇 년 만에 제대로 독대하게 된 에일런이었다.

바로 어제 있던 연회에서도 얼굴을 보고 그 전에 짧은 대화도 나누긴 했었지만 연회는 베넷이 주관했기에 에일런은 지금까지 델리온보다 베넷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델리온은 에일런이 온 이후 줄곧 장로들에게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둘만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가주. 부르셔서 왔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델리온은 복잡한 감정이 묻은 눈으로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그를 살아서 만나게 될 줄 언제 상상이나 했던가. 랭커스터의 긴 역사에서 이 정도로 평화로웠던 승계 싸움은 분명히 처음일 터였다. 유독 자신의 자식들이 가문을 잇는 데에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첫째는 우성 형질이기만 하면 강제로 승계 싸움에 참가해야만 했는데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었다. 가문의 장남이었던 델리온도 형제들을 모두 꺾고 죽여, 이 자리를 지켜냄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랭커스터에 있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역사를 등에 지고서도 보란 듯 살아남은 첫째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 기분이 된 건 에일런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피곤해 보이고 잔뜩 날이 서 있던 아버지가 그 몇 년 사이 놀라울 만큼 온화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가만 보고 있자니 참 이상했다. 한때 시체로 산을 쌓았다던 천하의 델리온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만큼 말이다.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서 마주 보고 있던 것도 잠시.

델리온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네가 복귀하여 다시금 가문의 일원이 되기는 했지만 너를 아직까지 못마땅해하는 장로들이 많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여 네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어서 가문에 봉사하도록 할 것이다.”

델리온은 가까이 오라 손짓한 후 어떤 서류 뭉치를 꺼내 에일런에게 건넸다. 에일런은 내용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눈으로 델리온을 바라보았다.

“외교 문제를 저한테 맡기는 건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이런 일을 처음부터…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요.”

델리온이 건넨 서류는 고등 이종족들과의 외교에 있어 모든 권한을 에일런에게 위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에일런과 같은 레귤러 타입의 이능향을 가진 우성 오메가들은 그 이능향으로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거나 상황을 유리하게 조절할 수 있어서 외교에 관여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때문에 에일런이 맡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외교 머리가 있기도 했으니 더더욱.

다만 에일런의 이능향은 워낙 강력한 만큼 상대가 월등한 정신력을 가진 고등 이종족이라고 해도 일시적이나마 세뇌를 시키는 게 가능했다. 앙심을 품고 외교 관계를 망치거나 고등 이종족을 이용한 물질적인 피해까지도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위험성을 생각하지 못할 사람도 아니고 장로들이 더욱 반발하고 나설 것임을 알 텐데. 대담한 선택이었다.

델리온이 한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면서 콧숨을 뱉어내었는데, 어쩐지 그 속에서 웃음기가 비치는 듯도 했다.

“그랬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목이 잘릴 게 뻔한데, 네가 그런 과감한 짓을 할 리 없지 않나.”

여기서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은 무일푼으로 귀족 신분도 잃고 쫓겨났던 에일런이 5년간 악착같이 살아남았다는 거다. 레오나드와는 다르다. 레오나드에겐 채이라는 보호자가 붙어 있었지만 에일런의 곁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여 무력감을 느끼고 죽음을 바라기는 했으나, 스스로 죽는 건 또 무서워서 누군가가 강제로 죽여 주기를 바라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그러한 녀석이 어떻게 다시 얻은 삶의 희망을 걷어찰까. 삶에 애착이 강하고 자신의 목숨에 매달리는 점은 델리온과도 닮아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기회는 확실히 줬다. 다신 네 이야기로 찍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네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 보이도록 해라.”

델리온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가보라 명령했다. 굉장히 사무적이고 서툴렀으나 그건 델리온 나름의 격려였다.

“…….”

에일런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여 인사하였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목표와 동기를 부여받은 에일런은 스스로 한 걸음 나아갈 의지를 얻었다. 모두 채이 덕분이었다. 문득 생각이 난 에일런은 집무실을 나가려던 찰나 가볍게 한마디를 꺼냈다.

“참. 그리고… 아버지.”

“…….”

“채이는 저한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의 상황이 생기면 저는 레오나드랑 채이 편에 설 거예요.”

에일런이 작게 웃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대뜸 채이 이야기를 꺼내며 레오나드를 묶어서 말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둘의 관계를 대강 눈치챘군.’

그리고 장로들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설 것이며, 현 가문 일원들에게도 동조를 구하여 두 사람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할 것까지 말이다. 양쪽에서 시달리게 될 것이 예정된 델리온은 퍽퍽한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을 지었다.

뭐. 일단 ‘실력 있는 베타라서 기사 지망으로 왔다’고 양념을 친 덕에, 아직 장로들이 깊이 따지고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실제로 베타지만 그 실력을 인정받아서 기사로 발탁된 드문 케이스가 존재하니까. 실력이 걸출한 자를 슬하에 두어 나쁠 것도 없으니. 과거 경험을 중시하는 그들이 그 부분에 대해 물고 늘어지긴 힘들었으리라. 언제까지 변명이 통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러고 보니….’

둘 사이엔 진전이 좀 생긴 건가.

에일런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델리온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걸 원하기도 했다. 가능하면 장로들에게 레오나드와 채이의 오묘한 관계를 들키기 전에 잘 이루어져서 오메가가 되는 것까지 원만하게 진행된다면 최고의 상황일 터이니 말이다.

‘일전에는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식사 자리를 제대로 가지지 못했었지. 어제도 뭔가 타이밍이 안 맞았고….’

델리온이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이내 그는 집사장을 호출했다.

***

연회가 끝난 이후 이틀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 이틀간 채이는 레오나드와의 스킨십 빈도가 급격히 늘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널 가족처럼 생각해 왔는데 이러는 게 아직 어색하다고, 좀 더 적응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걱정 마.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리 대답한 레오나드는 잊을 만하면 뒤에서 끌어안아 목에 입술을 비비고, 입술에 뽀뽀하고. 분위기가 좀 농밀해지면 언제든지 키스로 이어가는 것이었다. 익숙해질 거라는 게 자주 겪어서 강제로 익숙해지게끔 만들어주겠다는 의미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물론 채이도 생전 처음 휘몰아치는 자극들이 싫지는 않았지만… 아니.

솔직해지자면 ‘좋았다’.

채이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극에 예민한 편이었으며 욕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연애라곤 생각하기 힘든 퍽퍽한 환경에서 살았던 탓에 원초적인 본능이 억눌려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음….”

맞닿은 입술 사이로 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드럽게 채이의 뒤통수를 받친 채 키스하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거리를 두자 채이가 흐리게 눈을 떴다. 레오나드가 흘려대는 매혹적이고 달콤한 향이 내면의 원초적인 감정을 더욱 고취시키는 듯했다.

그 페로몬에 너무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눈을 내리뜬 채이가 이마를 손등으로 짚었다.

“…잠깐 온 거라며? 이만 가 봐.”

“으음.”

하지만 레오나드는 영 아쉬운 듯 채이를 끌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채이도 아쉽긴 마찬가지였지만 이 나이를 먹고 어린애처럼 굴 수는 없었기에 레오나드를 다독였다.

“그러다 서류 지옥에 빠진다.”

“그래도 가기 싫은데 어떡하지.”

“빨리 끝내고 오면 놀아줄게.”

“어른들의 놀이라도 해줄 거야?”

“어… 어?”

결국 ‘가기 싫어, 가기 싫어’ 하면서 기어이 채이가 해주는 입맞춤을 얻어낸 레오나드가 그제야 썩 만족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아주 여우가 따로 없었다.

“후우.”

채이는 잠시 그늘에서 쉬기 위해 언제나 티 타임을 즐기던 테이블에 앉아 늘어졌다. 날이 그렇게 더운 것도 아니건만 몸이 막 후끈거렸다.

‘익숙해질 수 있긴 한 걸까.’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은데. 채이가 그런 불신을 가지며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다. 문득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렸다.

달려오는 건 에녹이었다.

“채이 님!”

무슨 일인가 싶었던 채이가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에녹은 숨부터 고르고서 다음 말을 이었다.

“집사장이 알리라 해서… 가주님이, 채이 님을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 한대요.”

“…뭐? 갑자기 왜?”

채이가 눈썹을 휘었다. 연회에 갑자기 초대받았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러다 문득 짚이는 구석이 떠오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레오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걸 눈치챈 건가. 오메가도 아닌 것이 아들에게 꼬리 치지 말고 떨어지라며 돈뭉치를 내밀려는…! 채이는 전생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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