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가문에서 퇴출당한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에일런이 함께 살아서 돌아오자 저택은 한바탕 발칵 뒤집혔다. 랭커스터 가는 예부터 아주 엄격하고 냉혹하기로 유명하여 긴 역사를 돌아봐도 이런 자비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러한 변화가 역대 가주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우성 알파로 평가되며 차기 가주로서의 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레오나드에게서 나타났으니….
큰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랭커스터 가의 장로들이.
물론 언젠가 응당 바뀌어야 했을 변화라 생각하는 장로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누군가는 ‘실패자’를 가문으로 도로 거두어들이면 가문의 위용이 떨어질 거라며 가당찮은 헛소리도 지껄였다. 예전과 비교해 전쟁도 없고 평화로운 현재에 와서는 엄격한 경쟁과 부추김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그 사실은 외면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여 저택으로 귀환한 이후 내내 어수선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약 4일이 지난 날이었다.
오늘은 에일런의 가문 복귀를 알리고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가 열렸다. 그레이트 홀 대신, 메인 하우스의 살롱에서 소소하게 열리는 연회였다.
초대장을 받은 것은 컴베스트 공국 내 가신 귀족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웃 영지 귀족 몇 정도였다. 거기다 벤냑스의 건강 문제로 인해 코네러 가족들이 빠지면서 저번 연회와 다르게 조용하고 단란한 시간이 되었다.
‘…아니. 누구나 조용하고 단란한 시간인 것만은 아닌가.’
사실 채이는 이번에도 연회에 참가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그랬지만 델리온이 또 참가하라고 불러서 오게 됐는데….
“그래서 이 자의 이름은 ‘채이’입니다, 필렌더 공. 저번 연회에서도 얼굴을 비추었지요.”
“아! 저도 그때 봤습니다. 귀공의 이름이 채이라고 하는군요. 인사를 나누게 돼서 반갑습니다, 채이 공. 저는 필렌더 백작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델리온이 채이를 이곳저곳 함께 데리고 다니며 귀족들에게 직접 인사까지 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덕분에 채이에겐 조용하고 단란한 시간이 아니라 영문도 모르겠고 피곤한 시간이었다.
“반갑습니다. 필렌더 백작님.”
그렇다 해서 기본적인 예의를 빼먹을 순 없는 노릇. 채이는 제법 정중한 태도로 필렌더 백작에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 뒤로도 채이와 델리온의 인사 뺑뺑이는 계속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과 안면을 튼 것 같다. 그리하여 겨우 채이를 풀어준 델리온은 만족스러운 눈치로 자리를 떠나갔다.
“수고하셨어요. 채이 님.”
채이가 지쳐서 앉아 있자 에녹이 나지막이 웃으며 다가와 음료 한 잔을 건넸다. 달달한 음료를 마시니 그나마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채이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에녹 너도 컴베스트 가신인 귀족가의 아들이라고 했었지?”
“네. 올리븐 가문이요. 그리고 제 아버지가 바로 저기에 계신 분이세요. 저랑 똑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지신.”
채이 옆에 앉은 에녹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긴 녹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중년 사내가 있었다. 마침 아까 인사할 때 본 얼굴이었다.
“그럼 옆에 계신 분들은….”
“어머니랑 누님이세요.”
역시 그렇구나. 채이가 납득하여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에녹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반반씩 적절하게 닮아 있었다.
“가족이랑 인사 안 해도 되니?”
“아까 인사하고 왔는걸요.”
“그래도 오랜만에 봤을 텐데….”
좀 더 오래 있어도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채이.”
마침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채이가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줄곧 다른 형제들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레오나드가 이리 오고 있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 이후 두 사람의 어색하던 분위기가 많이 사그라진 참이라 레오나드는 채이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채이도 레오나드와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먼저 자리 비울게.”
“네! 느긋하게 다녀오세요.”
에녹이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채이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채이와 레오나드 두 사람은 사람이 없어 한적한 테라스로 나갔다. 어느새 해가 다 져서 바깥은 많이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밤하늘 예쁘다.”
“그러게.”
하늘을 보며 조곤조곤 읊는 레오나드의 말에 채이가 평소처럼 맞장구를 쳐주었다. 레오나드는 괜찮은 분위기에 조금 용기를 얻은 듯 채이를 돌아보았다.
“있잖아.”
슬쩍 뻗어온 레오나드의 손이 채이의 손가락을 건드린다. 그 접촉을 채이가 불편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반응을 살핀 레오나드가 괜찮은 것 같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엮어 잡았다.
“…….”
레오나드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사선으로 시선을 떨군 채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다. 꼬물꼬물 엮여 오는 손가락의 단단함, 그러면서도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 손가락 관절들이 천천히 안쪽으로 꺾이며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움직임.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던 채이는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평소라면 별거 아닌 행동으로 넘겼을 일이건만. 이런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건 분명 이전까지 몰랐던 레오나드의 속내를 알게 되고, 스스로도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은 탓이리라.
“잡고 있어도 돼?”
“…안될 건 없지.”
그렇게 대답했다가 조금 다른 생각이 든 채이가 레오나드의 손을 맞잡았다. 이미 레오나드는 반쯤 깍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깍지 낀 모양으로 손이 꽉 맞물렸다. 채이가 슬쩍 돌아보니 맞잡은 손을 빤히 내려다보는 레오나드가 보였다. 그 모습은 꼭 이 행동의 의미는 뭘까, 하고 생각하는 듯도 했다.
“큼.”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채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머쓱해지는 분위기에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채이.”
레오나드가 깊어진 눈을 너풀 내리뜨더니 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리고는 깍지 낀 손을 끌어다가 입을 맞췄다. 채이가 거기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레오나드가 올곧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채이는 이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 것 같았다.
“좋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은 채이의 심장을 평소보다 열심히 뛰게 했다.
다만 숨이 가빠질 만큼 버거운 뜀박질이 아니라 따뜻하고 기분 좋은 고동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해’라는 말을 들으면 심장이 귀엽게 콩닥콩닥 뛴다던데 그게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저번에는 너무 급작스럽고 감정적이었잖아. 그래서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레오나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채이는 이내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서 말문을 열었다.
“그날 이후로 많이 생각해봤어.”
“…….”
“내 마음이 어떤지. 네 마음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근데 깨닫고 보니까, 나도… 너랑 이미 같았던 것 같더라.”
순간 담담하게 듣고 있던 레오나드의 안면에 균열이 일었다. 여기서 대답을… 그것도 긍정의 대답을 들으리라곤 꿈에도 바라지 않았던 레오나드였기에 그는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채이는 많이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한차례 문지르고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나도야. 널 좋아해. 음. 내가 매번 말하는 거랑은 좀 많이 다른 의미로 말이야.”
“…키스해도 된다는 뜻인 거지?”
“어? 어, 응. 그… 그런 의미지?”
노골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리자 그런 데에 아직 면역이 없던 채이는 얼굴이 금방 화끈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자세하게 지켜보던 레오나드는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실수를 할 것만 같다. 이게 현실이 맞는지 긴가민가해질 정도로 벅차올랐다.
채이에게 좀 더 닿고 싶다.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싶었다.
성급하게 굴고 싶지 않은데 지금까지 줄곧 참아왔던 마음이 넘쳐흘러 참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지금 키스해도 돼?”
레오나드가 허둥거리며 부끄러워하는 채이에게 조심히 손을 뻗었고, 발그스름해진 뺨에 손가락 끝이 닿기 전이었다. 무언가 생각난 듯 채이가 고개를 조금 뒤로 내빼더니 레오나드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 그 전에, 아직 해둘 말이 더 있는데.”
그 순간 레오나드는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러한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음. 우리가 사귀는 것까지는 상관없어. 근데 너는 장차 가문을 잇게 될 우성 알파고 나는 베타잖아.”
“…….”
“너도 이미 알 거야. 언젠가 후사를 봐야 하는데 나랑은 그럴 수 없다는 거.”
그러니까 한마디로… 레오나드가 결혼해야 할 때가 오면 헤어지겠다는 말이었다. 레오나드는 죽을 때까지 그를 제 곁에 둘 생각이었는데 채이는 벌써 도망갈 생각인 거다. 물론 채이는 곤란할 레오나드의 입장을 나름대로 생각해준 것뿐이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 레오나드는 배신감과 닮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
손을 떨군 레오나드가 비틀린 냉소를 뱉었다.
기분 좋게 한껏 벅차올랐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곤두박질쳤다.
“왜. 채이랑은 그럴 수 없는데?”
“…응?”
“오메가는 채이가 되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