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모두가 잠들어 이름 모를 새만이 부우부우 우는 새벽. 깜빡 잠이 들어버린 뒤로 단잠에 푹 빠져 있던 채이는 문득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껌벅껌벅 눈을 떴다. 그 앞에는 새벽녘을 등진 에일런이 있었다.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아직 해도 안 떴는데….”
채이가 하품을 쩍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느긋함에 썩 황당한 기색으로 쳐다보던 에일런이 말을 덧붙였다. 그건 잠도 싹 날려 보낼 만한 소식이었다.
“레오나드가 근처까지 와 있어.”
“…뭐? 벌써?”
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레오나드가 벌써 자신을 찾아내 와 주었다는 사실은 기뻤다. 그거랑은 별개로 어떻게 이토록 빠른 행동이 가능했던 건지 그 사실이 놀라웠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드가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위치를 알려 주고 왔었거든.”
에일런이 스스로 알려 준 것이었다. 아주 자기를 죽이러 와 달라, 그리 애원하는 꼴이지 않나. 심경이 복잡해진 채이가 에일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채이의 시선을 일부러 회피한 에일런이 돌연 밧줄을 꺼내 들었다. 등장이 늦어도 너무 늦은 그 도구였다.
“잠깐 묶여 있어.”
“싫다면?”
“…또 기절하고 싶어?”
그렇다고 하니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멀쩡히 눈 뜨고 있는 게 낫지, 기절하면 기절해 있는 동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달갑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대충 묶어둔 것 정도는 단번에 풀어버릴 수 있기도 하니까.
“참.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네가 기절하라는 말만 듣고 기절했잖아. 그거, 네가 가진 이능향의 힘이었어?”
“그래.”
“아. 역시 그런가. 이능향을 가질 수 있는 발현자는 우성 형질뿐이라고 들었으니까 너도 우성 형질이라는 소리네?”
그리고 우성 알파는 아닐 테니 에일런은 우성 오메가일 터였다.
“말하는 대로 따르게 하는 게 가능하다니 대단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냥 내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재능이기도 하단 거지.”
“…됐고. 따라 나와.”
에일런이 더 듣지 않으려는 듯이 돌아섰다. 픽 웃은 채이는 뒤로 손이 묶인 채 앞장서는 에일런을 따라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목수들에게 애먼 피해가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에일런이 일찍이 이능향을 사용해 그들을 다른 장소로 보내둔 뒤였기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에일런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안 채이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자박.
흙을 밟는 발소리만 들려온다. 이윽고 집촌 입구까지 도달한 두 사람을 반기는 건 에일런이 도망가지 못하게끔 막아선 랭커스터 가의 기사들이었다.
“채이 님!”
반가운 에녹의 목소리가 그 사이로 들려왔다. ‘죽이지는 않았다’고 했기에 사실 크게 다친 건 아닐까, 하고 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에녹은 어디 다친 곳도 없이 멀쩡해 보였다.
곧 기사들 사이로 레오나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일런은 거의 5년 만에 다시 만나는 제 친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사이 많이 컸구나 싶었다. 이젠 더 이상 또래의 다른 애들에 비해 작고 여리던 레오나드가 아님을 새삼 느꼈다.
“오랜만이구나. 레오나드.”
살갑지도 않은 인사였지만 그 인사를 레오나드가 받아주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는 것으로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에일런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살려 보내지 않는 거였다고 후회하진 않았어? 괜히 살려 두었던 게 화근이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채이는 그가 일부러 레오나드의 깊은 곳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끝내지 못한 이 관계를 매듭짓게 해주겠다는 양 들리기도 했다. 하여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채이 본인이 직접 나서려던 찰나였다.
채이 쪽을 흘깃 쳐다본 레오나드가 돌연 미간을 구기더니 초조하게 일렁이는 눈을 내리떴다. 그 모습이 꼭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보여 처량하다. 레오나드가 곧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뭐든 할게.”
순간 에일런은 당황했다.
“그러니까 채이를 놔줘.”
‘평소처럼’ 매섭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 냉혈한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했건만.
그는 자신의 것을 건드렸다는 점에 분노하기보다 소중한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는 듯 보였다. 정은 눈곱만큼도 없고 고압적이며 상대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듯 차가운 모습만 알았던 에일런은 고작 베타 하나에 저리도 휘둘리는 레오나드가 낯설었다.
“…이 베타가 그렇게 소중해?”
원래는, 레오나드와 그런 사적인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던 에일런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순수한 궁금증이 피어올라 자신도 모르게 질문하고 말았다.
“소중해.”
레오나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채이는 슬며시 입술을 감쳐물었다. 심장이 버겁게 뛰어대고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차마 레오나드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
더 이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게 된 채이는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짙은… 레오나드와 같은 색의 감정을 줄곧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채이는 새삼스레 밀려드는 배덕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어딘가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진심을 알게 돼서 다행이긴 한데, 아니. 이걸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마음이 복잡하다.
그와 별개로 아직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채이는 소란스러운 심중을 다스리며 한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에일런.”
찰나 상념에 잠긴 듯하던 에일런이 채이를 돌아볼 때였다. 그사이 풀려 버린 밧줄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지자 당황한 에일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란 듯 손바닥을 편 채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아직 안 늦었다고 했지?”
“……!”
다음 순간 에일런의 손목을 잡고 돌려 꺾은 채이가 방심하여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무릎으로 관절을 누르자 순식간에 옴짝달싹못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에일런이 만일 알파라고 해도 인간의 약점 부위는 똑같다. 때문에 힘 차이가 두드러지는 우성 알파가 아닌 이상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윽…! 무슨.”
에일런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고통으로 인해 찡그려진 얼굴로 채이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채이가 지켜줘야만 하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매번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채이는 에일런을 내려다본 채 말을 이었다.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네가 정말 후회한다면 기껏 생긴 기회를 죽어서 포기하려고 하지 마. 아깝잖아. 내가 화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니까? 그리고 나는 레오가 이런 일로 자기 손 더럽히는 거, 솔직히 달갑지 않거든.”
물론 도와준다 한들 채이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건 결국 레오와 에일런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니까. 그래도, 채이는 에일런이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제 인생을 끝내진 않길 바랐다. 레오나드가 자신을 좀먹기만 할 과거에 더 이상 빠져 있지 않길 바랐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침묵을 이어가던 에일런이 이내 포기한 눈치로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잘 생각했어. 우선 대화부터.”
“채이.”
그때 레오나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잔뜩 굳은 채 이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인질로 잡혔던 채이가 풀려난 지금 그의 눈엔 당장이라도 에일런을 죽이려는 듯한 섬뜩함이 돌아온 상태였다.
“이리 와. 그놈은 내가 처리….”
“레오.”
그리고 채이는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 저지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도 심장이 떨리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어쨌든 지금은,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의연한 척 굴었다.
“네 형. 한 번만 더 살려 주는 건 어때? 나는 기회를 줘도 좋겠다 싶어. 그리고 하나 더 제안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
“…….”
“네 형을 가문의 일원으로서 다시 받아 주는 건 어떨까.”
“…뭐?”
레오나드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눈썹을 휘었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쳐다보고 있는 건 에일런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런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기에 감정의 골을 해결할 생각만 했지, 가문으로 복귀하는 것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랭커스터 가문에서 후계 싸움 뒤에 살아남는 실패자도 거의 없었지만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한다는 일은, 생전 처음 들었다. 에일런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 짓는 동안 채이의 말은 이어졌다.
“단순히 동정심에 휩쓸려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우성 형질은 귀하잖아. 더군다나, 이능향을 가진 우성 발현자는 그 자체로 국력이나 마찬가지니까, 분명 네 사람으로 남겨 두었을 때 도움이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거든.”
실제로 에일런이 가진 이능향은 레귤러 타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정신력이 웬만큼 강해도 그의 언령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고 복잡한 조종이 가능하며 세뇌의 지속 시간도 아주 길었다.
잘만 쓴다면 상당히 위협적일 존재. 에일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면, 그 점을 분명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채이가 거기까지 읽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레오나드는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에 잠겼다. 순간 채이가 혹시 세뇌된 상태라서 저러나 싶었지만 저 정도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슬쩍 레오나드의 반응을 보던 채이가 말했다.
“결정은 네가 하도록 해.”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둘 간에 생긴 감정의 골을 해결할 건지 외면할 건지를 정하는 주체는 채이도 에일런도 아닌 레오나드여야 했다.
“…….”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레오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은 건 아냐. 가문으로 다시 들이는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