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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56화 (56/105)

056화

그는 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래도 자더군.”

“네가 재웠잖아.”

“그렇다고, 무려 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잔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벌써 3시간이나 지난 건가. 충격적인 이야기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 위기감 없이 단잠을 잔 것도 사실이었기에, 찔린 채이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내 일행들은 어떻게 됐지?”

“글쎄.”

“…….”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았으니.”

이내 돌 더미 위에서 훌쩍 내려온 사내가 그늘 밖으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채이는 기분이 묘해졌다. 역시 레오나드와 상당히 닮은 얼굴이었다.

“…너. 정체가 뭐야.”

채이의 물음에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뜬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달싹였다.

“에일런.”

다시 눈을 뜬 사내는 얼핏 비소를 담은 채로 채이를 내려다보았다.

“에일런 디 랭커스터다. 이젠 랭커스터라고 말할 수 없는 몸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채이는 일전 오스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레오나드와의 승계 싸움에서 진 에일런 오라버니도, 레오나드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가문에서 쫓아내기만 했었죠.

에일런 디 랭커스터.

‘그 사람이구나.’

그는 레오나드와의 승계 싸움에서 지고 가문에서 쫓겨난… 원래라면, 진즉 목이 달아났어야 하는 인물이자 랭커스터 가의 지워진 첫째였다.

***

한편, 그로부터 약 2시간 전.

채이가 에일런과 함께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일찍이 정신을 차렸던 에녹은 자신의 머릿속에 채이와 에일런이 향한 장소가 떠오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에일런의 손이 닿은 이후 머리에 입력된 낯선 장소. 언어를 통해 강제되던 행동.

그것 모두 정신에 간섭하고 조작하는 우성 오메가의 ‘레귤러 이능향’ 능력이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사내는 정말 에일런 디 랭커스터가 맞았던 거였다.

‘에일런 님이 대체 왜….’

몇 년 만에 재회한 존재에 에녹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동요는 빠르게 떨쳐내었다. 어쨌든 지금은 채이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에녹은 바로 자신의 이능향을 사용했다.

그의 이능향은 타인의 체취를 기억한 후, 기억한 체취가 지나간 흔적을 쫓을 수 있는 능력이다. 페로몬이 아닌 체취로 흔적을 찾아내기에 베타인 채이도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다. 또한 레오나드가 항상 에녹만큼은 채이 곁에 두었던 이유도 그 이능향 때문이었다.

에일런이 위치를 알려 주고 갔으나 에녹이 자신의 이능향을 재차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호의’가 연막이거나 함정일 수도 있어서였다. 에일런은 예전부터 잔머리가 좋았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이내 채이의 체취가 빛의 흔적이 되어 에녹의 머릿속에 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쪽 방향. 에일런 님이 알려 주고 간 장소와 채이 님의 체취가 머물고 있는 위치는 현재까지 동일한 상태야.’

이로써 함정이 아니란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에일런의 의도는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일단은 다행이었다. 죽은 자에게서는 체취가 나지 않으므로 채이는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그걸 알아냈으면 이제 행동할 뿐이다.

에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기사들을 깨운 다음 다행히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비비눈이를 이용해 서신을 보냈다. 서신은 금방 로렌스의 손에 도달했고 내용을 읽자마자 비상사태임을 깨달은 로렌스는 당장 레오나드를 찾아갔다.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일전 채이와 관련하여 벌어졌던 해프닝을 재차 떠올린 레오나드가 눈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올리븐 공이 보낸 서신입니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레오나드는 다급하게 내밀어진 서신을 말없이 펼쳐 읽었다. 서신을 읽어 내릴수록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살기가 드리웠다.

“에일런….”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자신이 변덕으로 살려준 놈에 의해 채이가 납치되었다는 말을 보자마자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신을 내려놓은 레오나드가 이마를 짚자 로렌스가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그에 잠시 동안 침묵하던 레오나드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행거에 걸어두었던 제복을 걸쳤다. 내립뜬 시선에 냉혹한 그의 성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쪽으로 직접 간다. 준비해.”

주인 앞에서는 제 본성을 숨기는 짐승처럼 채이 앞에서는 꼭꼭 감추었던 레오나드의 이면이었다.

***

그리하여, 다시 현재.

레오나드가 움직이고 있을 무렵 에일런과 대치하고 있던 채이는 낯설지 않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고 있었다.

“에일런….”

잔잔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에일런이 별안간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

“누가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해줬나 봐. 한낱 베타 평민일 뿐인 너한테 말이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가시가 느껴진다. 짙어지는 에일런의 페로몬이 숨통을 옥죄듯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채이는 그가 정말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떤 격한 감정으로 인해 위협적인 페로몬을 방출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거기서 살기가 느껴지진 않는 까닭이었다.

경험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만한 상대는 아니다.

채이는 그의 속내를 좀 더 심도 있게 알아내기 위해서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날 데리고 온 목적이 뭐야?”

“네 역할이 뭔지 알고 싶어?”

채이의 질문에 반문한 에일런이 어둡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보통 여기서 생각해낼 수 있는 건 아마 이거겠지.

“날 이용해서 후계자 자리를 다시 뺏는 거?”

레오나드를 협박해 제 입으로 승계를 포기하겠다 말하게끔 하고 본인이 작위 승계권을 가지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 건 아니야. 애초에 난 딱히 공작위를 잇지 못해도 상관없었거든.”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그걸 또 진지하게 생각하던 채이는 나름의 대답을 도출해내곤 손뼉을 쳤다.

“아! 알았다. 레오랑 화해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긴. 형제 싸움 해봤자 얼마나 간다고.”

엉뚱한 대답에 기가 찬 에일런이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채이는 꿋꿋했다.

“서로 입장이 애매하니까 레오랑 친한 나더러 중간 다리 역할을 해달라는 거잖아. 아니야?”

애초에 승계 싸움으로 목숨을 잃고 가문에서 이름까지 지워지는 걸…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은 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던 채이였다. 심지어 본인이 욕심도 그다지 없었다고 했다. 더더욱,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화합한다면 불필요한 악감정도 사그라질 테고 얼마나 좋은가. 레오나드의 의견도 들어볼 필요는 있겠지만.

“…화해? 그럴 리가 없잖아.”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채이뿐이었는지 에일런은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을 했다. 무엇보다 채이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그로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세 부리지 마.”

“허세?”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

채이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던 에일런이 부리부리하게 날이 선 시선을 보냈다. 그는 채이가 안 무서운 척, 강한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한 페로몬이 채이를 압박하며 숨통을 옥죄어 온다. 별안간 몸을 구부리며 고개를 수그린 채이가 침묵했다.

‘그럼 그렇지.’

에일런은 겁에 질린 것이라 단정 지으며 비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살려달라 처량하게 굴게 될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모습을 레오나드가 보게 된다면 제대로 엿을 먹이는 꼴일 거다.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치고, 에일런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꼬르륵.

갑자기 어디선가 배꼽시계의 알람이 들려오기에 에일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 알람 소리는 채이의 배 속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생리적인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정말 ‘태평한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채이 본인도 멋쩍었는지 슬쩍 웃으면서 배를 문질렀다.

“음. 배가 좀 고픈데 대화는 식사부터 하면서 마저 하면 안 될까? 내가 굶어 죽으면 너도 곤란하지? 아. 기왕이면 고기가 있는 식단으로 부탁해.”

식사까지 대접하라는 그 뻔뻔한 부탁에 에일런은 기어이 이마를 짚었다. 분명 납치당한 건 저쪽이니 에일런이 상황을 주도해야 하는데, 어째 위치가 뒤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굶어 죽으면 곤란하지 않냐던 채이의 주장과는 별개로… 배곯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에일런은 잘 알았다. 그리고 채이를 굶기면서까지 고통스럽게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는 조용히 문을 빠져나갔다.

도망가버려도 상관없다는 무의식이 반영된 듯, 문조차 걸어 잠그지 않았다. 입구 옆에 걸린 열쇠를 보면서 잠깐 고민하다가 나갔으니 실수는 아닐 터다.

“…….”

채이는 에일런이 닫지 않고 나가버린 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자신을 통해 화해하는 게 목적은 아니라고 말했었지만 그가 숨기고 있는 진심은 과연 어떨지.

…끼익.

채이는 한참 기다리다 말고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이 마을 목수들의 일터이자 기숙사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 근처를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노동자들이 대거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어디 외진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왜 이런 곳이람.’

대담한 건지, 애초에 묶어둘 생각이 없었던 건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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