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레오나드의 손가락 끝이 채이 뺨에 닿았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너무 긴장한 채이가 고개를 떨구어 접촉을 피했다. 심장 부근이 뜨거워서 아플 지경이었다. 사실상 피한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기에 레오나드도 흠칫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나… 왜 피했지.’
닿는 게 싫은 건 아닌데, 왜인지 몸이 반응해버렸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생체 반응에 채이는 아찔함을 느꼈다. 레오나드에게 너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레오. 그….”
“재미있게 놀다 와.”
설령 ‘변명’처럼 들릴지라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전에 말을 자른 레오나드가 대화를 끝내버렸다. 결국 레오나드와의 마지막은 그걸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채이는 마차에 올라타야 했기에 찝찝한 기분을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하.”
채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미묘한 분위기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던 에녹은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채이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레오나드도 채이도 좀처럼 숨기고 있는 것을 먼저 말해주지 않으니, 에녹으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슬쩍 물어볼 생각이다. 모나크 영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도중에 들르는 마을 숙박업소에서 쉬었다가 가야 하니까.
단둘이 남는다면 좀 더 깊은 이야기가 가능할 터였다.
에녹은 우선 채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생각의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이야기를 냉큼 꺼냈다.
“채이 님!”
“…으응?”
“그러고 보니 채이 님은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게, 이번으로 두 번째라 하셨죠?”
“아. 그랬지.”
“모나크 영지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알고 계신가요? 백작령이라 대공작령에 비해 조금 작긴 하지만 볼거리는 생각보다 많다더라고요.”
“그래?”
다행스럽게도 영 효과가 없는 짓은 아니었는지 채이는 혼자만의 상념에서 빠져나와 에녹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채이의 얼굴은 평소처럼 평온해 보였다. 실제로 채이는 에녹이 마음 써준 덕분에 조금 찝찝하던 기분을 떨쳐냈다. 레오나드와는, 나중에 돌아가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컴베스트 영지를 한참 달린 마차 행렬이 모나크 영지와 맞닿아 있는 마을의 초입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해가 이미 져서 어둑어둑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행은 예정했던 대로 마을의 숙박업소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대동해 온 기사들도 모두 묵어야 했기 때문에 주인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서 큰돈을 쥐여 주고 숙박업소를 통째로 빌렸다. 다행히 빈방이 많았고 그날 묵기로 한 손님도 몇 없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채이와 에녹은 3층의 가장 넓은 방을 함께 쓰기로 결정하고 올라갔다. 달리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었던 채이는 이르게 잘 준비를 하고 누웠는데, 마침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에녹이 슬쩍 운을 뗐다.
“저기. 채이 님.”
채이가 고개를 돌리자 에녹은 진지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여 채이도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다. 곧 채이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던 에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레오나드 공자님하고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최근에, 두 분의 사이가 어색해진 것 같아서요.”
그에 채이는 바로 대답해주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두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에녹이라면, 언젠가는 의문을 가질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채이는 에녹의 질문이 달갑게까지 느껴졌다. 혼자 고민하기엔 너무 버거워서 줄곧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하여 채이는 천천히 말을 고르며 레오나드와 있었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여 들어주던 에녹은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고백했단 사실을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백을 받으셨다고요?!”
그러고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언뜻 보면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에녹은 누구보다 감격하고 있었다.
‘드디어!’
채이가 스스로 눈치채지만 못하고 있을 뿐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녹은 금방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분위기가 왜 이런 거지?’
두 사람의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진 거라면 분위기가 이토록 우중충할 리가 없었다. 불안함을 느낀 에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이 님은 무어라 답하셨나요?”
“아직… 제대로 답하지 못했어.”
“예?! 왜요?”
“어? 그거야… 나도 내가 레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에녹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딱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서 바라보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런 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피만 섞이지 않았지 정말 가족처럼 생각해왔는데 그런 아이에게 가족이 아닌 의미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어버리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레오나드를 향한 두근거림’을 심장병 취급하며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부정하던 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
분명 가만히 두어도 언젠가는 제 마음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닫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 순간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조금 단축시켜 주는 것 정도의 참견은 해도 좋으리라. 조용히 웃어 보인 에녹이 상심하고 있는 채이를 바라보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이 님. 싫은 건 아닌 거죠?”
그 물음은 채이가 유일하게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응.”
싫거나 징그럽다고 느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에녹은 단호한 채이의 대답에,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럼 레오나드 공자님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대답하길 망설이는 거네요.”
“…맞아.”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녹을 바라보았다. 꼭 제 속마음을 기똥차게 읽어내는 도사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채이와 레오나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지만, 채이의 눈에 에녹은 마냥 연애 상담 고수처럼 보였다. 에녹을 향한 신뢰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였다. 픽 웃은 에녹이 제 가슴께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머리는 쉽게 속일 수 있어도 마음은 그럴 수 없죠. 그러니 마음이 주는 신호를 스스로 외면하고 속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요?”
“…….”
“정말 채이 님이 레오나드 공자님의 마음을 진지하게 마주할 생각이 있다면요. 그게 긍정이 됐든 부정이 됐든.”
마음이 주는 신호….
채이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에녹의 몸짓과 이야기를 듣는 중 자연스레 떠오른 건 유독 레오나드와 함께 있을 때마다 제 심장이 반응했던 일이었다. 제이든이 심장에 따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라고 했었으니… 만약 그 심장의 떨림이 정말 두근거림이었던 것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돌부리에 걸린 듯,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채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가능성을 열어두어야만 깨닫게 되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응. 고마워, 에녹.”
다시 레오나드를 만난다면, 그땐 이토록 제 가슴이 불안정하게 떨리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 알 수 있으리라. 그걸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는 에녹은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잘 되실 거예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았다.
이른 시간부터 떠날 채비를 끝낸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최종 목적지인 일레브리움의 무덤까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아마 별일 없으면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네요. 다행히 일레브리움들이 생을 끝내는 날은 이틀 뒤부터라니까… 충분히 쉬고 구경하러 가면 되겠어요.”
마차 행렬이 컴베스트 영지를 완전히 빠져나갈 즈음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정을 정리했다. 꼼꼼한 에녹이 다 해주니까 채이는 손 놓고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채이가 창밖을 내다볼 때였다.
“도련님들! 산을 타야 해서 좀 많이 흔들릴 겁니다. 길이 좁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떨어지지 않게끔 손잡이를 잡아주십시오.”
마부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덜그럭거리기 시작하길래 에녹이 창밖을 보니, 마차는 이미 오르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
채이와 에녹은 손잡이를 잡고 상황을 살폈다. 무성한 숲을 금방 지난 마차는 어느덧 절벽의 둘레길로 들어섰다.
마차 안이 워낙 덜컹거려서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전복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완만하게 내려가는 넓고 평평한 길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컴베스트 문장을 달고 있지 않은 병사들이 깃발을 꽂아둔 채 서 있었다. 바로 모나크의 병사들이었다.
“멈추십시오!”
모나크 병사들이 단번에 길을 막고 서서 마차 쪽을 훑으며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에녹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모나크는 아직 타영지민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요. 제국이 건설되기 전에는 침범을 많이 당했거든요. 특히 요즘 들어선 오고 가는 관광객이 많다 보니까, 더 예민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