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그렇게 채이의 고뇌가 깊어질 즈음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말문을 열었다.
“당장 대답해주진 않아도 돼. 그냥 지금까지처럼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으니까.”
마치 채이를 배려해주는 듯한 말이다. 그러나 사실 레오나드는 채이가 거절하고 싶은데 망설이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발 물러선 것뿐이었다. 그는 채이가 혹여 제 곁을 벗어나려고 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
물론 그런 의도까지 알 리가 없는 채이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의 마음에 답해주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는 건 채이에게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고 그것을 증명하듯 두 사람은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랭커스터 저택 대문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입구에 다다라 마차에서 내리자 미리 소식을 들었던 건지 페르난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랭커스터의 일원도 아닌 그가 귀환을 맞이해 주다니. 태클을 걸고 싶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채이는 지금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기에 구태여 그 점을 언급하진 않았다.
“왔냐. 생각보단 일찍 왔네.”
“응.”
“그 말라깽이는 어떻든?”
“다행히 괜찮아 보이더라.”
채이가 잠시 멈춰 서서 페르난데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레오나드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피했고 채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자 둘을 번갈아 보던 페르난데가 눈썹을 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눈치챈 것이다.
“뭐야?”
“뭐가.”
“저 녀석이랑 너.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시선을 떨군 채이가 애매하게 대답을 회피하자 유심히 지켜보던 페르난데가 침음하며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어떻게 봐도 싸운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별일이군.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지만 페르난데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왜 싸운 건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그뿐. 그가 일일이 신경 써야 할 일까진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후 레오나드와 채이 두 사람의 사이가 혹여 틀어진다 해도 페르난데 입장에서는 딱히 나쁠 것이 없었다. 기운이 없는 채이를 보는 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했는데, 말하고 갈 수 있게 돼서 다행이네.”
“아. 가는구나. 오늘 가?”
“그러려고.”
조금 아쉽긴 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페르난데가 예상보다 훨씬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난 가볼게.”
오닉스 저택 쪽으로 함께 걸어가던 도중 멈춰 선 페르난데가 채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끄러미 채이를 바라보더니 돌연 채이의 머리를 도담도담 쓰다듬었다. 평소답지 않게 다정하고 섬세한 행동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뭐 조만간 또 올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잘 지내고.”
그 서투른 행동이 꼭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아서, 채이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마냥 갑갑하게 느껴지던 마음도 아까보다는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오닉스 저택으로 돌아가 방문 앞까지 도착하니 다시 기분은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탓에 시중들기 위해 방을 찾은 에녹도 금방 돌려보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하아.”
침대 위로 발라당 드러누운 채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있었던 일과 레오나드가 했던 말들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자꾸만 생각났다.
연인으로서 좋아해 주길 바란다느니 뭐니….
떠올릴 때마다 낯이 뜨겁기도 하고 심장이 후덜덜 떨리기도 하는데 이게 참 아리송했다. 좋아서 나오는 반응인지 너무 충격적이라 나오는 반응인지.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싫거나 징그럽게 느껴지는 건 분명 아닌데.’
그렇다면 레오를 그와 똑같은 의미로 좋아하는가? 혹은,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건 역시 모르겠다. 음. 아직까지는 레오나드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결론 내리기를 회피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럼 상상을 한번 해보자.’
레오나드의 마음을 받아 주었을 때의 경우.
그런데 이 전제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 상황’을 상상해야 하는데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였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경험에 의지하지도 못하거니와, 소설 읽는 재미에 빠진 것도 최근 들어서인지라 상상력의 토대가 되어줄 기반 지식도 마땅히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그럼 레오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을 경우는?’
조금 상상을 해본 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쪽은 아무래도 상황이 심각해질 가능성이 다분한 탓이었다.
‘레오의 마음을 거절했는데도 가족으로 남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처럼?’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처럼은 안 될 터다. 계속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 조심스러워질 테니까. 최악의 경우 이도 저도 안 되는 관계로 끝나겠지. 그렇다고 같은 의미로 좋아할 생각도 없는데 마음을 받아주기만 하는 것은… 스스로도 고통받고 레오에게도 너무하지 않은가.
‘결국 해피 엔딩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구나.’
자신도 레오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난 정말 레오와 똑같은 의미로 레오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지독한 도돌이표다. 더군다나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한들 미래에 방해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둘 중 한 명이 오메가인 것도 아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베타 여성도 아니니까. 후사 문제에 또 부딪히겠지.’
사실상 사귀게 됐다 해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관계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거다. 어느 쪽이어도 절망의 늪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 후천적으로 오메가가 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채이는 아직 모르고 있었기에 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으음.’
급기야 미간을 구긴 채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무언가를 골몰해본 일이 없었던 채이는 이렇게 고민하는 일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당장 노심초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 같고.’
아직 스스로의 마음이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니, 그걸 알게 되기 전까지 조금 더 두고 보도록 하자.
‘…그래.’
레오도 바로 답하진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않는 거다.
‘좋아.’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채이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
그로부터 5일 뒤.
채이와 레오나드 두 사람이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면서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은,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주 앉아 최근 유명해졌다는 관광지에 대해 열심히 떠들던 에녹이 별안간 채이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저희도 놀러 가지 않을래요?”
“…응?”
“방금 제가 말한 곳이요!”
“…아. 어디라고 했었지?”
딴생각에 빠져 있다 나온 채이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음을 눈치챈 에녹이 입을 빼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미안해진 채이가 어색하게 웃자 결국 한숨을 한 번 내쉰 에녹이 재차 설명을 해주었다.
“일레브리움들의 무덤이요. 일레브리움이란 이름의 마물은 죽을 때가 찾아오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데 이게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엄청나게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거든요!”
언제 뾰로통해져 있었냐는 듯 다시 열정적으로 설명을 잇는 에녹은 눈이 초롱초롱했다.
“작년에는 특히 평균보다 일레브리움의 개수가 많이 늘어서 역대 최고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을 거래요! 기대되지 않으세요?”
일레브리움인가. 분명 가장 안전한 단계인 6등급이면서, 성체가 되면 일곱 가지 색 중 하나를 띠게 된다는 마물이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설명만 들어서는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응. 어떨지 궁금하네.”
“그렇죠?! 최근 채이 님, 계속 딴생각에 빠져 있고 기분도 저조해 보여서요. 기분 전환도 할 겸 같이 가자고 제안한 건데….”
그걸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으니 시무룩해질 법도 하다. 갸륵한 에녹의 마음씨에 꽤나 감동해버린 채이는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좋아. 같이 가보자.”
고개를 들어 채이와 시선을 마주한 에녹의 표정이 평소처럼 해맑아졌다. 다만 영지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레오나드의 허락 여부가 중요했는데… 다행히 레오나드는 채이의 영지 바깥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 에녹과 필히 함께 행동하고 기사들과 마부를 대동해서 가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물론 가만히 마차에 앉아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데려다주고, 안전도 어느 정돈 보장되니 채이로서도 싫을 건 없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의 준비 기간이 지나고… ‘일레브리움들의 무덤’이 있다는 모나크 영지. 그곳으로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채이.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응. 걱정하지 마.”
바쁠 시간인데도 배웅하러 나와준 레오나드의 모습에 채이도 방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언뜻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레오나드가 물끄러미 채이를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뻗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