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뭐?”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은근슬쩍 지나가 버린 저질스러운 발언에는 울분을 담은 감정이 실린 것 같기도 하여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레… 레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 아니 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가 새하얗게 타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채이는 고장 난 기계인 양 버벅거리면서 일단 말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 찾아오는 침묵은 그 무엇보다 끔찍할 것 같았다. 채이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레오나드는 단단히 감정이 상하여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농담이냐면서 회피하려고 하는 채이의 태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 탓이었다. 그 때문일까. 레오나드는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마저 완전히 놓아 버렸다.
“정말 농담인지, 확인시켜줄게.”
레오나드가 채이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서자 채이는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그, 일단 진정하고 대화 좀….”
레오나드가 평소보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까닭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느끼기엔 채이가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피하는 것만 같았다. 늘 이런 순간을 상상하곤 했으나 오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건만. 레오나드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와 동시에 강한 오기가 생겼다.
채이가 물러선 만큼 다시 다가간 레오나드가 더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채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눈을 쉴 새 없이 굴리며 당황하던 채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레….”
채이의 뒤통수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감싼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한순간 찾아온 고요함. 기다란 레오나드의 눈썹이 너푼하게 내려앉는 것을 채이가 멍하니 바라볼 즈음 낯설지만은 않은 감촉이 쪽 소리를 내며 입술 위에 닿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인지하는 순간, 채이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이지 실제로 떨어진 것은 아닐 터. 그럼에도 통증이 느껴지고 숨이 차오르고 전신이 열로 달아올랐다.
“읏….”
채이가 질끈 눈을 감았다. 밀어내 보려고 했으나 레오나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이전에 레오나드와 술을 마시다가 키스해 버렸던 꿈이 떠올랐다. 아니… 꿈이 아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맨정신으로 겪어 보니 그때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왜….’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던 제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레오에게 실수한 건 아닌지 고민하고 걱정했던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자 형용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마구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쳐문 채 굳어버린 입술을 핥아서 눅진하게 만든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낀 채이가 저도 모르게 레오나드의 가슴께를 있는 힘껏 밀어내 약간의 틈을 벌렸다. 직후,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레오나드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채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감정이 실린 주먹이었다.
“…헉.”
“…….”
자기가 때리고 놀란 채이가 헛숨을 삼켰다. 두 사람 사이에 지독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베타인 채이의 힘으로 레오나드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 레오나드에게 이 정도로 진심이 담긴 폭력을 쓰는 건 생전 처음이었기에 채이 본인도 놀라고 레오나드도 놀랐다. 더군다나 주먹을 맞은 뺨은 발갛게 번져 있기까지 했다. 얼마나 강하게 때렸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어….”
하얀 뺨에 번진 붉은 흔적을 보고 치솟았던 감정이 단번에 가라앉은 채이가 어쩔 줄 몰라 입만 뻐끔거릴 때였다. 레오나드가 천천히 맞은 뺨을 감싸더니,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크게 충격받은 듯 넋이 다 빠져버린 얼굴은 채이와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향해 있었다.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채이는 마음이 약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였는데 지금은 그냥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 레오. 때려서 미안하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뺨에 대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군 레오나드가 체념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는 한 대 맞고 정신이 맑아진 게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해. 채이.”
“…….”
“잠시 머리 식히고 올게.”
레오나드는 채이를 지나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채이가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난감해하지 않도록 배려한 셈이었다. 홀로 남은 채이는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감추었다.
‘…레오가 날….’
좋아한다고. 그것도 그렇고 그런 의미로? 조금도 예상을 못 한 일이라서 당혹스럽고 심경은 복잡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체 왜.’
왜 하필이면, 뜬금없이, 나인가.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가족처럼 지내기만 하다 발현 후 헤어지고 몇 년 뒤 다시 만나게 됐을 뿐인데. 대체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단 말인지. 채이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득 가까워지던 레오나드의 짙은 시선과 뜨겁고 달던 숨결이 떠올랐다. 섬뜩할 만큼 기분 좋게 입 안을 유영하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채이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미쳤어. 이건 미친 거야.’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정말 아들자식처럼 느꼈고 줄곧 그렇게 대했던 녀석인데…. 한순간 레오나드와의 키스가 기분 좋았다고 생각해버린 자신에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조금 전의 분위기와 기억들이 떠올라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온몸이 후끈거리고 얼굴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나… 어떡해야 하지.’
채이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했다. 이토록 누군가의 조언과 도움이 절실했던 적은 이제껏 살면서 처음이었다.
***
다행인 점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자연스레 진정되어 마음도 차분해졌다는 것이다. 레오나드가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 채이도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레오나드가 먼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채이. 잘 잤어?”
“어? 응.”
“일어났으면 이만 가자.”
그러고 레오나드가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현실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채이는 어제의 일이 진짜 있었던 게 맞나… 의심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탈 즈음 레오나드가 어제 일을 언급하면서 확실하게 못 박았다.
“어제 내가 한 말, 농담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야. 채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거 흐지부지한 상태로는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
채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보다 훨씬 진정된 상태였기에 우선은 대화를 통해 그를 설득해보려고 했다.
“나는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날 왜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꼭 나여야 해? 나보다 젊고, 너랑 더 잘 맞는 사람이 이 세상에 분명 많이 있을 텐데.”
물론 레오나드도 얌전히 설득당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데에 그런 이해득실이 있어야 해? 나는 ‘채이니까’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게 된 계기를 굳이 꼽으라면 말할 순 있지만, 그냥 그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좋아해 버린 거라고.”
“우리는… 줄곧 가족이었잖아.”
“줄곧? 아니. 채이만 그런 거지.”
언뜻 듣기에 무정하기까지 한 말이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만 생각해온 것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게 할 만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설득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대답할 말을 잃은 채이는 잠시간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사코 부정하고 그를 설득하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조금 더 레오나드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졌다.
“포기하라고 해도 안 할 거니?”
“포기할 거였으면 진즉 했어.”
“나 같은 아저씨가 뭐 좋다고….”
“나는 그냥 채이가 좋은 거야. 거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채이.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가벼운 감정에 휘둘려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
“나도 현실적인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 많이 고민했고 부정도 했었지. 지금 내 감정은, 그 모든 방황 끝에 스스로 정의 내린 감정이야.”
“…그랬구나.”
처음 들어보게 된 레오나드의 진심이었다.
복잡미묘한 기분…. 그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자기 마음을 마주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채이는 그런 레오나드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넌 어리니까’란 변명 뒤에 숨는 건 불가능했다.
단순히 상황을 부정하는 걸론 해결되지 않는 문제. 이젠 채이 자신이 레오나드와의 관계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걸 알아야 했다. 레오나드가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니 자신도 진지한 태도로 마주하고 싶었다.
‘나는… 레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역시 아들 같은 존재일 뿐인가? 아니면.’
하지만 아직 스스로의 진심이 뭔지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채이는 남자를 상대로 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섣불리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매번 놀라긴 했어도 그와의 짙은 스킨십이 기분 나빴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귄다는 것을 전제해본 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그렇다고 여자를 사귀어본 적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렵네.’
솔로 인생만 십여 년 차인 채이에게 있어선, 인생 최대의 난제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