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어쨌든 레오. 나 먼저 씻는다.”
“…응. 다녀와.”
침대에 털썩 앉는 레오나드를 확인한 채이가 픽 웃음을 흘리곤, 욕실로 향했다. 시원하게 싹 씻고 머리까지 말리고 나오니 뒤이어 레오나드가 욕실로 들어갔다.
채이는 잠시 후 이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노곤한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고 있다 보니 그대로 선잠이 들었는데… 얕은 수면에 잠겨 있던 정신 사이로 딸깍,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레오나드가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채이. 그냥 잘 거야?”
“으응?”
살짝 잠든 덕분에 아까보다 훨씬 개운해진 기분으로 채이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말했다.
“오랜만에 술 마시고 잘래?”
“…어?”
순간 채이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술을 마시다가 레오랑 키스했던….
‘안 돼! 생각, 생각하지 말자.’
채이가 달아오른 얼굴을 숨긴 채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다른 생각으로 덮으려 애썼다. 꿈이었다 하긴 했어도 아직 채이는 그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따금 이렇게 떠올라 버리면 당혹스러웠다.
“채이?”
레오나드가 의아해할 즈음 채이는 그를 등지는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뇌까지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별로…. 그냥 자자.”
“별로야? 진짜?”
“내일 또 이동해야 하잖아.”
“마부가 있는데 상관없지.”
“…아무튼. 난 잘 거야.”
채이는 억지로 눈을 꾹 감았다. 분명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텐데. 이런 꼴로 그를 보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수치스럽기도 했다.
아쉬워서인지 꼼지락대는 레오나드의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채이의 의지가 단호해 보이자 결국 포기하고 누운 건지 부스럭대는 소음이 잠깐 들렸다. 곧 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던 초롱불이 꺼졌다. 채이는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고는 말했다.
“잘자.”
그에 레오나드도 화답했다.
“응. 채이도.”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채이는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부지런히 일어난 채이와 레오나드는 간단한 식사를 끝낸 후 이미 갈 준비가 끝나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는 말 관리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이.”
푸흥 콧김을 뿜은 말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솔라 도시를 빠져나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다리 너머의 또 다른 도시로 건너갔다. 그때가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시 입구로 진입하자 창밖을 한 번 내다본 레오나드가 다시 채이를 돌아보았다.
“저 도시가 클랭커스의 중심지인 슬리위벤이야. 코네러 가문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고.”
“그래? 그럼 벌써 다 온 거네.”
“응. 몇 분 안 걸릴 거 같아.”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채이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체적으로 흰색과 파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라 화사하고 깔끔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컴베스트의 중심 도시인 블렌츠와는 또 다른 미경이었다. 그 새로운 아름다움에 빠져 구경하고 있는데 레오나드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채이. 시간은 넉넉할 거 같은데 온 김에 광장에도 잠시 들렀다 가는 건 어때?”
순간 채이의 귀가 솔깃해졌다. 분명 슬리위벤 광장도 블렌츠 광장만큼 크고 번화한 곳이겠지? 영지 밖으로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잠시만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채이가 생기 넘치는 눈으로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좋아. 잠시 내리자.”
그에 레오나드가 즐거운 듯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엔 평소보다 더 의욕적인 채이가 귀엽게 보였다.
마부는 잠시 말머리를 돌려 광장 쪽으로 향했다. 말을 묶어두고 마차에서 내린 채이와 레오나드는 해가 지기 전까지 다시 마차가 있는 곳으로 모이기로 하고 마부와 헤어졌다. 슬리위벤 광장은 관광 온 사람들로 한창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람 되게 많다.”
“그러네. 채이, 손잡아도 돼?”
“응? 응. 마음대로 해.”
따뜻하고 큰 레오나드의 손이 먼저 다가와서 상대적으로 작은 채이의 손을 잡는다. 그러고 보면 레오나드가 아직 어렸을 적에도 길을 잃을까 봐 손을 잡아주고는 했었지…. 과거의 한때를 떠올린 채이는 향수를 느끼며 작게 웃었다. 어느새 훌쩍 커서 자신의 손보다 커지고 굵어진 레오나드의 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 웃긴 일이라도 떠올랐어?”
“아니. 그냥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길 잃을까 봐 자주 잡고 다녔잖아.”
“아.”
레오나드도 비슷한 기억이 떠오른 듯 탄성을 뱉었다. 추억에 잠겨 있던 레오나드의 짙은 눈동자가 이내 채이를 담았다.
“그땐 채이가 나보다 컸는데. 이제는 내가 더 커졌네.”
웃음기가 담긴 눈이었는데, 채이는 어쩐지 가슴이 간지러워져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어, 근데 좀 출출하지 않아?”
“조금? 아침 먹은 지 좀 됐지.”
“뭐라도 먹을까?”
“좋아. 그럼 돌아다녀 보자.”
그렇게 화제를 돌리는 데에 성공한 채이는 레오나드와 함께 붐비는 중심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구경했다. 그 아래에는 블렌츠 광장처럼 큰 분수가 있었는데 거기서 악기 공연이 한창인지 음악과 사람들의 떠드는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채이.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때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고개를 바짝 숙여 물었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들리지 않을까 봐 그런 것 같았다. 문제는 그의 온기와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지자 채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며 또 소란을 피워댄다는 거였다. 머리가 어지럽다. 눈도 팽글팽글 도는 것 같았다. 채이는 현재의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일단 아무 데나 가리키며 말을 내뱉었다.
“저, 저거 맛있겠다!”
“…저거?”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저쪽에서 분명 음식 냄새가 났었는데…? 이상해서 그쪽을 돌아보았던 채이는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뭐야. 저게.’
거기에서는 확실히 음식을 팔고 있긴 했다. 고기와 채소를 꼬치에 끼운 것을 즉석에서 구운 음식이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꼬치 가게이건만. 눈을 의심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고기의 정체였다. 초록빛을 띠는 고기는 어떻게 봐도 일반적이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희귀한 마물 고기 가게?”
그게 가게 이름이다.
즉, 저 초록색 고기의 정체가 ‘마물이었던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고기에서 이상한 맛이나 악취가 날 것만 같은데. 생각보다 사 먹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그래. 한번 먹어 보자.”
“어? 정말 먹게?”
“응. 궁금하기는 하잖아.”
“…….”
하긴. 그건 그렇지.
결국 채이는 도전장을 받은 기분으로 가게 앞에 섰다. 안내 사항으로는 ‘식용 가능한 탕구의 고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란 말이 적혀 있었다.
“오호, 두 분! 어서 오십쇼!”
“꼬치 두 개 주세요.”
“예이. 잠시만 기다리시길!”
직화로 구워지고 있는 고기의 냄새는 상당히 훌륭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겉면을 보니 초록색에서 오는 거부감이 조금 줄어드는 듯했다.
“여기! 나왔습니다!”
잠시 후 꼬치 두 개가 채이와 레오나드의 손에 하나씩 들렸다. 그걸 먹기 전까지만 해도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물고 나선 두 사람 다 생각이 바뀌었다.
“맛있다. 그치, 레오.”
“응. 고기가 탱글탱글하네.”
육즙이 가득한 고기는 풍미가 향긋하며 고소했고, 식감은 촉촉하면서 부드럽고 또 레오나드의 말처럼 탱글탱글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호불호가 갈릴 만한 냄새나 맛이 나지 않아 이곳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즐기고 있었던 이유도 납득되었다.
“채이. 다른 것도 먹어 볼까?”
“좋지. 다음은 디저트 먹자.”
그렇게 성공적인 도전 이후 고취된 채이와 레오나드의 먹방 투어가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어. 레오! 저거.”
길을 내려가던 도중 무언가를 발견한 채이가 레오나드의 팔을 붙들었다. 채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기온이 크게 바뀌지 않아 날씨가 1년 내내 시원하고 화창한 편인 컴베스트에선 꽤나 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와. 여긴 아이스크림을 파네.”
“채이. 아이스크림을 알아?”
“당연하지. 나 저거 좋아하거든.”
채이가 레오나드와 자신의 몫을 주문하고 기다리니 오래 지나지 않아 컵에 아이스크림이 담겨서 나왔다. 우유와 크림으로 만들어 얼린 아이스크림 위에는 과일과 꿀을 얹어 놓았다. 지구에서 먹던 것과 비교하면 솔직히 모자란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이었던지라, 채이는 마냥 행복했다.
꽃이 떠다니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레오나드가 중얼거렸다.
“…아이스크림 좋아했었구나.”
“응.”
“처음 알았어.”
“컴베스트에선 먹기 힘드니까.”
컴베스트도 최근에는 날씨가 조금 따뜻해진 편이라 랭커스터 주방장이 가끔 만들어 주긴 하지만 정말 가끔이다. 이것도 사정이 나아진 것으로 민가에서 살았을 때는 아예 아이스크림을 보지도 못했었다.
물론 수요가 없으니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도 적고 만들어 파는 사람도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 세계엔 아이스크림 메이커 같은 기계가 없으니, 만드는 것도 까다로운 듯했고 말이다.
“그랬구나.”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자주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응? 그래.”
하지만 채이는 ‘주방장에게 말해서 자주 먹을 수 있게 해보겠다’ 정도의 의미로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