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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48화 (48/105)

048화

실비에트가 떠난 후 약 사흘이 지났다. 채이는 그간 많은 고민에 빠졌다. 그중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벤냑스와 레오나드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느냐’였으며… 또 하나는 ‘최근 들어 레오나드와의 접촉이 유난히 불편해진 자신의 변화가 무엇 때문인가’였다. 심장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고 했으니, 도출해낼 수 있는 건 심리적인 요인. 그렇다면 어떤 심리적 요인 때문이냐는 문제로 넘어오는데 이게 마땅히 짚이는 구석이 없어서 큰일이었다.

‘벤이랑 레오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법도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으로선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이대론 아무것도 못 한 채, 시간만 흘러갈 텐데….

“하아.”

고민의 도돌이표에 채이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런 깊은 고민에 잠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손 놓고 있기에는 채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듯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쇠줄 같은 멘탈과 둔한 눈치를 가지고 있는 채이라지만 그 말이 곧 무책임하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 두 가지 문제가 최근 채이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이봐.”

그때 채이 앞으로 페르난데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에 놀란 채이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뒤로 뺐다. 골몰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몇 분 전에 페르난데가 찾아와서 함께 티 타임을 즐기고 있던 상태였다. 의도치 않게 방치한 꼴이라 미안해진 채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페르난데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채이를 쳐다보았다.

“흠. 뭐가 문제지?”

“…뭐가.”

“어디 정신을 빼놓고 온 사람처럼 넋은 나가 있지, 말은 없지. 그런 심각한 얼굴로 한숨까지 쉬고. 너답지 않잖아.”

페르난데가 팔짱을 꼈다. 예리한 눈썰미였다. 하지만 그에게 상담을 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티 테이블 위로 뺨을 기댄 채이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넌 언제 돌아갈 거야.”

“뭐야. 가버렸으면 좋겠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생각보다 오래 머물긴 했으니까. 벤냑스의 부모님들처럼 페르난데의 부모님들도 그를 걱정하고 있지 않겠는가.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부모님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듯한 페르난데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애매한 채이의 대꾸에 히죽 웃은 페르난데가 한쪽 다리를 꼬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너도 내가 있어서 덜 심심한 거잖아. 말동무해 주고, 산책도 같이 해 주고. 얼마나 좋아? 그러니 내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하는 모양새가 썩 얄미워 보였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채이는 맥빠지게 웃었다.

“그렇긴 하네. 고마워.”

그리고 여기서 고맙단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 못 한 페르난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른한 채이의 미소를 낯설게 느낀 페르난데가 본의 아니게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동그랗게 눈을 뜬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참. 벤은 언제쯤 다시 올까? 돌아간 지 얼마 안 돼서 만나려면 역시 좀 더 기다려야겠지?”

그러자 페르난데는 금방 식은 얼굴로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네. 날 앞에 두고 그 녀석을 찾다니. 그 말라깽이가 그리 좋나? 취향 독특해.”

저번에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는데 그보다 페르난데가 말을 잇는 것이 더 빨랐다.

“근데 걔 한동안은 못 만날 거야. 네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는데 상태가 안 좋아 보였거든. 한번 몸이 안 좋아지면 몇 달은 골골댄다 했으니까 아마….”

“뭐? 그랬었다고?”

채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몰랐는데….

하지만 금방 납득했다.

늘 밝아 보여서 잊고 있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항상 ‘병약하다’는 말이었으니까. 걱정할까 봐 최대한 숨겨 왔던 모양이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이가 안타까워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채이.”

그때 마침 반가운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페르난데와 채이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다가온 레오나드는 힐끔 눈을 굴려 페르난데를 내립떠보았다.

“넌 대체 언제 돌아갈 거지? 코네러 영식도 돌아간 마당에… 뻔뻔하군.”

레오나드는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아까 전 채이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물론 그 속내는 채이의 속내와는 전혀 달랐지만, 언뜻 쿵짝이 잘 맞는 모습이었기에 그 사실이 무엇보다 불쾌했던 페르난데가 미간을 구겼다.

“너 때문에라도 절대 안 가.”

“…….”

“기왕 있는 김에 1년 채울까?”

페르난데가 킥킥대면서 약올리자 레오나드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저러다 또 싸움 나지 싶어서 채이가 끼어들었다.

“레오. 일은 벌써 다 끝난 거야?”

“응. 어제부터 해서 밀린 거 전부 끝내고 왔어. 당분간은 여유 있을 것 같아. 요즘 채이랑 시간 많이 못 보낸 거 같아서… 힘냈는데.”

“그랬구나. 오구, 수고 많았네.”

칭찬을 바라는 눈치라 채이는 그에 부응하기 위해 레오나드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채이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짓는 레오나드의 눈이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하다. 페르난데를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너무할 정도로. 물론 페르난데도 갑자기 레오나드가 자신에게 상냥해진들 소름 돋을 것이었기에 딱히 연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우엑. 여우가 따로 없네.”

“뭐.”

“아주 깨가 쏟아진다? 어?”

“어쩌라고.”

이어지는 페르난데의 시비에, 결국 채이가 끼어들었던 게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 채이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깐. 지금쯤 벤은 집에 있는 거겠지? 몸 상태가 안 좋았다고 했으니까 쉬고 있을 거야.’

마침 레오도 당분간 여유가 있을 것 같다고 했고… 지금부터 마차를 타고 가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코네러 공작의 저택이 있는 클랭커스 대공국은 바로 이웃 영지이기도 하였으므로. 진지한 얼굴로 턱을 짚은 채이는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 모른다고.

“가자.”

그리 결정을 내렸다면 행동만 남았다. 채이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레오나드와 페르난데가 말다툼을 하다 말고 돌아보았다. 채이는 레오나드를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벤 병문안 가자, 레오.”

“…응? 오늘?”

“아. 그 전에 코네러 가문에 서신 하나 보내 줄래? 너랑 나랑 병문안 가겠다고. 무턱대고 찾아가면 당황할 테니까.”

물론 가문끼리 친한 사이인 만큼 레오나드의 방문 자체는 반기겠지만 말이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꽤 당황한 레오나드가 의아한 기색을 비쳤지만, 그럼에도 채이 말이니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혼자 가라고 했다면 레오나드는 절대로 수락하지 않았으리라.

그건 채이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레오나드 혼자 보내고 싶었지만 일단은 같이 가는 걸로 말한 거였다. 둘만의 자리는 나중에 만들어 주면 되는 일이다.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채이가 씩 웃었다.

“그럼 나는 준비하고 올게. 페르, 며칠 뒤에 보자. 일찍 보내게 돼서 미안.”

먼저 저택으로 돌아간 채이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서신을 보내기 위해 이동했고 페르난데도 영문을 모른 채 돌아갔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클랭커스 행이 결정되었다.

***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랭커스터 저택을 빠져나와 평소와 다른 길로 들어선 마차가 영지 경계 부근의 평야를 달리고 있다.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채이와 레오나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레오나드는 끌려 나온 거나 다름없지만 오랜만에 채이와 단둘이 지내게 된 것은 물론, 함께 여행을 가는 기분이라 즐거웠고, 채이는 컴베스트 영지 밖으로 나가보는 게 처음이라서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병문안 목적으로 나온 거긴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다른 이유로 들떠 있었다.

“채이. 좋아?”

마차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 채이를 돌아본 레오나드가 물었다. 채이도 레오나드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영지 밖으로 나와 보는 건 처음이니까. 클랭커스도 대공국이니 엄청 크겠지?”

“응. 문화는 조금 다르겠지만, 발전된 수준은 컴베스트랑 비슷할 거야.”

채이는 기대되는 눈치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야를 열심히 달리던 마차는 곧 영지 경계선을 지나 클랭커스로 진입했다. 숲을 하나 지나고 나니 한적한 도시가 나타났는데 그즈음 이미 밤이 찾아온 상태였다.

“머물다 가시겠습니까요? 여기가 클랭커스 북쪽에 위치한 솔라 도시인데 치안도 나쁘지 않아요.”

마부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한차례 시선을 주고받은 채이와 레오나드는 머물다 가기로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와 말도 수고했으니 여기서 한번 쉬어 가는 편이 더 좋으리라.

“오늘 수고하셨어요.”

“아휴, 천만에요.”

근처 숙박업소에 들러서 말을 묶어 두고 마부에게도 방 하나를 잡아준 채이와 레오나드는 그 위층인 프리미엄실을 빌렸다. 침대는 두 개고 욕실은 크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하기도 해서 만족스러웠다.

“침대가 두 개라니….”

우리 레오 공자님은 뭔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말이다.

“침대가 두 개면 좋지 않아?”

“…….”

레오나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채이랑 한 침대를 쓰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미 잡은 방이기도 하고, 이게 가장 좋은 방이라 했으니 다시 바꾸는 건 어려웠다. 그리고 레오나드의 실망스러움을 알아채지 못한 채이는 고개만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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