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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46화 (46/105)

046화

그렇게 채이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늦은 오후가 되어 씻고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던 실비에트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방문 쪽을 빤히 쳐다본다. 채이도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아니…, …된다고 허락….”

“하지만 지금은….”

방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채이의 방을 지키고 있는 병사와 누군가가 약간의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그르르. 실비에트가 낯선 기척을 경계하는 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바짝 힘이 들어간 꼬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실비에트는 오로지 문 바깥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방을 찾아온 것이 에녹이나 레오나드처럼 실비에트와 자주 보는 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채이는 실비에트를 힐끔 돌아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 가까이 다가가자 대화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린다. 방문을 열자 쩔쩔매고 있는 병사와 꼬마 한 명이 보였다. 그런데 꼬마의 얼굴이 상당히 낯익었다. 그 얼굴을 본 채이가 놀라서 눈을 둥글게 떴다. 깜짝 등장한 꼬마는 다름 아닌 할러드였다.

“할러드?”

채이가 이름을 부르자 병사와 할러드의 시선이 채이 쪽으로 동시에 쏟아졌다. 미간을 팍 구기고 있던 할러드는 채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막상 채이와 시선이 마주치니 어색함을 느꼈는지 연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놀러 왔어요?”

씩 웃은 채이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할러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힐끔힐끔 채이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와도 된다고 해서… 그, 그리고 드래곤이 있다길래 한번 보고 싶어서 왔어. 괜찮아?”

“그랬구나. 네, 안 될 거 없죠.”

실비에트가 할러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과연 좋아할지 싫어할진 모르겠지만 조심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채이의 허락에 할러드가 금방 의기양양해진 태도로 병사를 노려보았다. 병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일도 없던 척 그 시선을 회피했다.

물론 훼방을 놓은 그 병사에게도 죄는 없었다.

채이가 쉴 수 있게 당분간 방 앞을 조용히 지키라던 에녹의 부탁이 있었기에, 할러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뿐이니까. 사전에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들어오세요.”

돌아선 채이가 문 안쪽으로 손짓했다. 채이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할러드가 곧장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생명체를 발견하고는 둥글게 눈을 떴다.

“…진짜 드래곤이다.”

발그스름히 상기된 얼굴. 총명하게 반짝이는 시선. 할러드는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하면서도 흥분한 듯 보였다. 책으로만 보던 생명체를 직접 보게 되어 상당히 들뜬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구나 싶었다.

“실비.”

채이의 부름에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다시 이쪽을 돌아본 실비에트가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며 할러드를 주시했다. 할러드는 모르는 눈치였으나 실비에트는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하여 채이가 대신 실비에트와 할러드를 번갈아 보며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자, 둘이 인사해요. 이쪽은 할러드. 이쪽은 실비에트. 실비, 할러드 공자님은 너랑 만나고 싶어서 놀러 온 거래.”

“아. 안녕….”

할러드가 수줍어하며 손을 흔들었다. 귀족처럼 고상한 척 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여느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비에트는…. 그런 할러드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스윽 고개를 돌려버렸다. 채이에게 늘상 애교부리던 것과 비교하면 꽤나 매정한 태도였다. 자칫 둘 사이에 트러블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 하지만 채이는 그와 반대로 생각했다.

‘싫지는 않은가 보네.’

실비에트가 할러드를 정말 거부할 생각이었다면 훨씬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을 테니까. 시무룩해 있던 할러드가 슬쩍 채이를 돌아보았다.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눈치였다. 그에 채이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용기를 얻은 할러드도 천천히 실비에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실비에트는 할러드가 제 옆에 앉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하품을 쩍 내뱉었다.

“채이. 나 심심해.”

그러더니 지루했는지 몸을 뒤집어 누우며 침대에 등을 비비적거렸다. 할러드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또 한 번 눈을 둥글게 뜨곤 채이를 돌아보았다.

“대단해. 사람 말도 해!”

그게 못내 귀여워서 채이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전음을 사용하는 거예요.”

“우와….”

“내가 좀 대단한 드래곤이지.”

실비에트가 잘난 체를 하자 할러드는 순수하게 빛나는 시선을 보냈다. 기분이 좋아진 실비에트는 두 발로 서서 어깨를 쭉 펴고 으쓱거렸다.

“난 어려운 제국어도 다 읽어.”

“진짜?”

“웅! 나랑 글자 카드 놀이할래?”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할러드를 반쯤 무시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실비에트의 적극적인 행동을 지켜본 채이는 군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글자 카드를 가져다주었다. 잔뜩 들뜬 실비에트는 글자 카드를 마구 섞은 다음 하나로 모아 한 장씩 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글자 공부나 다름없는 놀이라서 할러드가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 터였다. 하지만 드래곤과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좋은지 할러드는 생각보다 귀찮아하지 않았다.

채이는 조용히 문밖 병사에게 다가가 에녹을 불러 달라 부탁하였고 찾아온 에녹에게는 애들이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좀 준비해달라고 했다. 이후 방 안쪽의 상황을 대강 확인한 에녹은 실비에트와 할러드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준비하여 돌아왔다. 할러드와 실비에트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서 놀이를 이으며 간식을 즐겼다. 분명 오늘 만났는데 그새 가까워진 듯한 둘의 모습에, 에녹이 놀라는 기색을 비쳤다.

“두 분 생각보다 잘 맞나 봐요.”

“그러게.”

에녹의 작은 속삭임에 채이가 공감하며 웃었다.

마침 할러드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실비에트가 먼저 할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러드. 너는 몇 살이야?”

“나는 아홉 살이야. 실비는?”

“뭐…?”

실비에트가 간식도 먹다 말고 입을 짝 벌렸다. 경악한 것 같다. 왜 그러나 싶을 즈음, 실비에트가 슬쩍 할러드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나… 나도 아홉 살이거든.”

아무래도 할러드가 자기보다 형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물론 성장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정신 연령으로 본다면 비슷한 것 같지만 말이다.

“아홉 살? 우와! 벌써 그 정도 나이구나. 혹시 폴리모프도 가능해?”

“웅? 그게….”

섣부른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대답할 수 없게 된 실비에트가 곤혹스러워할 때였다. 어쩔 수 없이 채이가 끼어들었다.

“실비는 아직 생후 한 달도 안 됐어요.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됐던가?”

“이잉! 채이!”

실비에트가 앞발로 테이블을 탁 짚고서 벌떡 일어났다. 실비에트는 잔뜩 토라진 얼굴로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잘못된 거짓말을 감싸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폴리모프는 어린이가 아니게 될 때부터 가능한데 보통 한 살이면 해요. 드래곤은 성장 속도가 남다르거든요.”

“한 살?! 그렇구나. 부럽다. 실비는 몇 살만 먹어도 금방 어른이 되겠네.”

부럽다는 말에 토라져 있던 실비에트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언제 그러고 있었냐는 듯 회복한 실비에트는 다시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내가 좀 멋있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삼킨 채이는 이내 할러드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공자님. 이제 밤이 늦었는데 이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으세요?”

할러드가 왔던 시간이 늦은 저녁이었고 지금은 해가 다 져서 까만 밤이 된 상태다. 어차피 이곳이나 저곳이나 저택 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돌아가 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시계를 확인한 할러드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채이에게 자신이 너무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면 델리온과 베넷이 걱정을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역시 그 두 사람도 부모이긴 한가 보다. 괜히 레오나드의 과거가 떠오르면서 양가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어 주었다.

“다음에 또 놀러 와.”

“응! 다음에 봐, 실비.”

실비에트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할러드가 들뜬 얼굴로 총총 사라졌다. 채이는 앞으로도 실비에트와 할러드가 친구로서 잘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할러드와 실비에트의 우애가 오래가지 못하게 될 일이 생겼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채이 님! 채이 님! 바깥에!”

이른 아침부터 다급하게 들려오는 에녹의 외침.

막 씻고 나온 채이와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뱉고 있던 실비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실비 님의 친모가 찾아왔어요!”

“……!”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실비에트와 채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실비의 부모가….’

언젠가 실비에트의 친부모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헤어짐의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가주님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실비 님과 함께 나오시라 하셨어요.”

에녹이 숨을 고르며 말하던 도중 실비에트가 채이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그도 헤어져야 한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런 실비에트를 꼭 안아준 채이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겉으론 티 내지 않았다. 혹여 실비에트가 불안해할 수도 있으니까.

“실비. 같이 나가볼까?”

“…웅.”

채이는 그렇게 실비에트를 달랜 후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갔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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