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레오나드와 저녁을 함께 보낸 채이는 일찍 잠들기 위해 다시 누웠다.
귀찮게 하지 말라던 충고 때문인진 몰라도 실비에트는 평소보다 더 의젓하게 굴었다. 이제 생후 5일 된 녀석이 “자기는 벌써 다 큰 드래곤”이라며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데, 그게 못내 귀여웠다.
물론 실비에트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성장한 건 맞았다. 드래곤들은 어릴 때 폭풍 성장하고 해츨링을 벗어나 폴리모프가 가능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성장이 둔화된다고 하니까.
그리고 폴리모프가 가능한 시점은 ‘새끼와 성체의 중간 단계’인 아성체부터다. 먼지 쌓인 옛 전문 고서들 중 고등 이종족들을 연구한 서적을 찾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실비에트도 채이의 예상이 맞다면 아성체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그때가 오면 정말 ‘다 큰 드래곤’이 되는 거겠지.
‘그 전에 실비가 진짜 가족을 다시 만나면 좋겠네…. 드래곤으로서도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할 게 많을 테니까.’
채이는 그런 바람을 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
벤냑스와 페르난데가 아침 이른 시간부터 채이를 찾아왔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채이의 방으로 곧장 찾아온 두 사람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니지. 정확하게는 페르난데만 그랬다.
“어제도 찾아왔었는데 그냥 냅다 돌려보내졌어. 사정이 생겨서 들여보낼 수 없단 말만 하고 입구를 막아버리잖아! 저 녀석이 말이야. 젠장. 무슨 병균 취급이냐고.”
페르난데가 에녹을 흘겨보며 앞담했다. 에녹은 못 들은 척하고 있고. 왜 그리 씩씩대고 있나 해서 이유를 들어보았는데 그냥 가벼운 해프닝이었다. 채이는 따뜻한 차를 들이켜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너랑 같이 있으면 안 받을 스트레스도 받는 편이지.”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
페르난데가 채이의 말에 눈을 쭉 찢으면서 분개했다. 채이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본디 타격감 좋은 사람은 놀림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다. 실비에트도 그리 생각하는 듯 꺄르르 웃어대니 페르난데의 눈이 더욱 사나워졌다.
“장난이야. 어제 일은 나 푹 쉬라고 에녹이 신경 써 준 거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흥.”
토라진 페르난데가 턱을 괴곤 옆으로 눈을 흘겼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던 벤냑스가 그제야 하려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저. 채이 님.”
“음? 왜요?”
“사실 어제 이야기하려던 거였는데. 저,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당분간은 다시 못 뵐 것 같아요.”
“엇. 가시는군요.”
“네. 부모님이 걱정되니 얼른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내오셔서…. 더 있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벤냑스가 많이 아쉬운 듯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르난데는 얄미운 얼굴로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잘됐네. 얼른 가라, 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조용히 눈을 흘긴 채이가 페르난데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아야, 하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채이는 벤냑스를 돌아보았다.
“벤. 그러고 보니 레오랑은 좀 어때요? 대화 많이 했어요?”
“네? 아뇨.”
벤냑스는 이게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너무 심상한 태도였기에, 찔려서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채이가 크게 당황했다.
“레오랑 친해지지 못했어요?”
“으음. 제가 그분과 꼭 친해져야 하나요? 가문끼리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도 친해져야 할 의무는 없는데.”
슬쩍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벤냑스의 모습에 채이는 기어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의무’까지 들먹이고 있으니 벤냑스가 레오나드에게 느끼는 거리감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벤이 레오한테 관심이 없어?’
분명 둘이 서로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이 세계는 친구가 쓴 BL 소설을 근간으로 하는 세계다. 물론 종이 속의 글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운명은 얼마든지 바뀌기도 하지만 어쨌든 설계되어 있는 큰 줄기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여느 로맨스 소설들이 그렇듯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을 이루고 행복해지는 건 정해진 엔딩이자 필연이었다.
한마디로 어지간한 방해가 있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은 운명과 다름이 없었다. 한데 나름 평화로웠던 기간 동안 그 둘 사이에 어떠한 관계 진전도 없었다니 충격적이었다.
‘음. 레오가 너무 바빠서 벤과 따로 만날 시간이 없었던 건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바빠서라기엔, 레오나드는 지금도 매일같이 시간을 쪼개서 채이를 찾아오니까. 마음만 먹으면 벤냑스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터다. 채이에게 쓰는 시간을 조금 줄이기만 해도, 시간 쪼개 가며 잘 활용하는 레오나드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아니면 아직 때가 아니었나?’
두 사람이 이루어지기 위해 준비된 몇 가지 장치들이 분명 있을 텐데… 서로에게 반하게 되는 계기라든가.
-레오나드랑 이루어지는 그 오메가는 랭커스터 가가 주관하는 연회장에서 처음 만나게 돼.
-거기서 한눈에 홀딱 반한 그 오메가는 끈질긴 공세를 펼쳐서 결국 레오나드와 이루어지게 되지.
문득 친구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벤냑스와 관련해서 언급된 부분은 그게 전부였지만 힌트를 얻어 보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채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연회장에서 일어났던 일. 벤냑스가 암살당할 뻔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거기서 한눈에 홀딱 반한 그 오메가는….
‘설마.’
큰 이벤트라고 하면 그때의 사건뿐인데. 원래는 레오나드가 구해주었어야 했다거나?
“…….”
이내 채이는 심각해진 얼굴을 제 손안으로 숨겼다. 소름이 오소소소 돋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때문인가?’
본의는 아니었으나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채이가 망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진짜 그런 거면 어떡하지.’
또 한 번 다른 의미로 충격에 빠진 채이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이 다른 이도 아니고 레오나드의 활약상을 뺏고 방해한 꼴이었다니. 그걸 이제야 눈치챈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상황이 급박했음을 떠올리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벤냑스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게 채이였고 살기에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거니까.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 해도 채이는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었다.
한편 페르난데와 벤냑스는 평소와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진 채이를 보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는 중이었다. 채이가 심각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벤냑스였다.
“채이 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도 해야 하거든요.”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벤냑스를 보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안함이 샘솟았다.
“벤. 다음에 또 오실 거지요?”
“그럼요. 채이 님만 괜찮다면.”
슬쩍 채이를 바라본 벤냑스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채이는 어떻게 하면 둘의 관계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을 거야. 차근차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벤냑스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난데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오늘은 이만 간다.”
“응? 너도? 일찍 가네.”
“어. 나랑 있으면 안 받을 스트레스도 받는다는 누구누구 씨를 위해서 일찍 가 주려고.”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사과를 한 번 더 하려고 하니 페르난데는 아까 전의 장난에 대한 복수를 했으니 됐다며 얄밉게 웃었다.
“푹 쉬어라.”
“그래. 나중에 보자, 페르.”
채이도 뒤늦게 깨달은 진실로 인해 심란한 상태였기 때문에 구태여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이런 때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채이 님. 뭔가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으신가요?”
벤냑스와 페르난데 두 사람 모두 나가고 나자 방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에녹이 다가왔다. 돌아보니 그는 먹다 남은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채이는 그가 너무 걱정하지 않게끔 평소처럼 웃었다.
“응. 조금만 쉬면 돼.”
“아, 그럼 저도 자리 비워 드릴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밖에 있는 병사에게 말해서 언제든지 절 불러 주세요. 참… 실비 님도 데리고 갈까요?”
“아냐, 괜찮아. 고마워.”
데리고 간다는 말에 냉큼 자신의 허리에 매달리는 실비에트를 본 채이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실비에트는 하루가 다르게 의젓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버겁게 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었다.
“하아.”
에녹까지 방을 나가고 찾아온 고요함에, 채이는 털썩 침대 위에 누웠다. 실비에트도 기다렸다는 듯이 뽈뽈 다가와서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웬만한 대형견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상태라 붙어 있으니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 왜 그래?”
채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실비에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물었다.
“음. 내가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
채이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무슨 실수?”
실비에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이는 그에 답하는 대신 실비에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실비에트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 골골송을 불렀다.
‘어쩐다.’
채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