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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44화 (44/105)

044화

더군다나 방 청소를 돕던 하인들도 하나같이 창백해진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기에 더욱 머쓱한 기분이었다.

“채이…. 아픈 거야?”

그때 잠에서 막 깨어난 실비에트가 눈을 끔벅거리며 채이의 다리 위로 몸을 걸쳐 누웠다. 채이는 실비에트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말했다.

“음. 좀 이상한 느낌이 있긴 한데 잘 모르겠네. 아마 진찰을 받아 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거야.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훙… 아프지 마.”

“고마워. 너무 걱정하지 말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든과 함께 에녹이 방으로 돌아왔다. 제이든에게 에녹이 얼마나 호들갑을 떤 건지 제이든은 상당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랬는데 별일 아니면 어쩌나 싶다. 다시 한번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증세가 정확히 어떻게 되시죠?”

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침대 옆으로 다가온 제이든이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채이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대답했다.

“최근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크게 뛸 때마다 식은땀이 나거나 어지럽고 열감도 간혹 느낍니다. 부정맥인가 싶기도 하고요.”

“최근에 무리를 하신 탓일까….”

에녹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렸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군요. 흠,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제이든이 채이의 팔을 자기 앞으로 끌어와서 소매를 걷었다. 손목의 맥박을 짚는 손놀림이 상당히 능숙해 보인다. 이곳저곳 맥을 여러 번 잡아보던 제이든은 마지막으로 피 검사를 해보겠다며, 혈액 몇 방울을 뽑아 갔다. 잠시 후 결과지 내용을 확인하는 제이든이 뭔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에녹과 채이가 혹시 큰 문제인가 싶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흠.”

짧게 침음한 제이든이 이윽고 두 사람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에 제이든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한 에녹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채이 님은 이상이 없다 못해 아주 건강하다 이 말입니다. 빈맥이나 서맥도 없고 다른 소리지만 고혈압과 저혈압도 없으십니다.”

그 확실한 대답을 듣고서야 에녹은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채이는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상쾌하지 않은 기분이 되었다. 결국 원인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이든이 조금 다른 질문을 몇 가지 하기 시작했다.

“채이 님. 혹시 어떤 상황에서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던가요? 정확하지 않아도 되니까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라…. 채이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도 그랬고 일전에는 평소처럼 그냥 식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적도 있고요. 음, 확실하진 않지만… 연회가 열렸던 날에도 조금 이상했습니다.”

“운동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는데 운동하실 땐 아무런 이상도 없으셨습니까?”

“아, 예. 괜찮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운동 자주 한다는 사실을 제이든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내 채이는 대수롭잖게 넘겼다. 유명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는 공공연한 상태였으니까. 그러할진대, 제 일거수일투족이 가문 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정도로 이상하다 느낄 순 없었다.

“흐음. 대체 뭐가 원인인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진실에 제이든이 턱을 짚고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 해당 증세가 나타났던 당시 뭔가 공통점은 없었습니까?”

“딱히 없긴 한데… 아. 항상 레오가 곁에 있었긴 합니다. 그런 걸 공통점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이상하긴 하지만요.”

“…….”

돌연 제이든이 상당히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순간 무언가를 눈치챈 에녹도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럼 채이 님. 몇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예.”

“아까 식사하던 당시에도 갑자기 그런 적이 있다고 그랬죠. 그때 공자님과 따로 한 무언가가 있으십니까? 대화를 했다거나, 어떤 행동을 했다거나 하는.”

어딘가 모르게 다소 뜬금없다 느껴지는 질문이긴 했지만 채이는 묻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예. 대화를 좀 했었습니다. 별거 아니고 돈독한 우애를 다지는 대충 그런 거요.”

“…그렇다면 어제 증세가 있었던 당시에는 공자님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어제는 레오가 저한테 장난을 좀 쳤어요.”

“장난?”

“목에다 갑자기 뽀뽀를 하길래.”

채이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생각해 보면 어제는 레오나드의 갑작스러운 장난에 놀라서 그랬던 것도 같았다. 그런데 에녹이 돌연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붉히더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점점 썩어들어 가는 제이든의 표정과 상당히 대비되는 모양새였다.

“젠장….”

머리를 푹 떨구고 중얼거리던 제이든이 크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몸에는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제가 더 이상 개입할 문제도 아닌 듯하니까…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원인은 알 수 없나요?”

“원인은 제가 말씀드려도 납득하지 못하실 것 같네요. 그리고 원인은 스스로도 충분히 알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는요.”

그는 컨디션 회복제라며 작은 물약을 한 개 건네주고 그렇게 방을 떠나버렸다. 말해 줘도 납득하지 못할 이유라니. 그 말만 들으면 꼭 불치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다. 하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고 건강하다니까 당황스러웠다.

‘대체 원인이 뭐길래 그러지.’

아니면 그냥 한 소리인가. 채이가 그런 의문에 빠져 있을 즈음 복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드니 때마침 문으로 들어오는 인영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레오나드였다.

“제이든을 불렀다며. 괜찮아?”

바쁘게 달려온 건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쓸데없는 일로 그를 오게끔 만든 것과 마찬가지라 미안해진 채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응, 괜찮아. 아무 이상도 없대.”

“정말이야?”

채이가 대답을 했지만 레오나드의 질문은 에녹을 향해 뱉어졌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한숨을 삼킨 채이는 에녹이 대답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질문을 받은 에녹은 레오나드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황상 채이가 말하는 심장의 이상 반응은 일반적인 부정맥이 아니라 레오나드에게 마음이 생겨 반응하는 것이었으므로. 분명 이 사실을 레오나드가 알게 된다면 기뻐할 것이다. “채이 님께서 레오나드 공자님과 함께 있을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신대요. 근데 건강상 문제는 없대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레오나드는 알아들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채이 님은 자신이 왜 그러는 건지… 스스로의 진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아.’

이런 상황인데 섣불리 변화를 언질 주어도 되는 걸까. 제이든이 말했던 것처럼 분명 채이는 지금 당장 남이 이렇다저렇다 말해준다고 한들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가족’ 같은 인연이 있는 이상 더더욱. 괜히 섣부르게 끼어들었다간 도리어 모든 게 틀어질 수도 있을 터였다.

‘역시, 알게 된 걸 말하진 말자.’

언질을 주든 주지 않든 어차피 레오나드는 지금까지처럼 계속 행동할 것이며 채이도 언젠가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달을 것이다. 지금은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네. 정말 괜찮다고 하셨어요.”

에녹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오나드는 여전히 걱정인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아까보단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채이…. 아프면 안 돼.”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채이의 손등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채이는 제 손등 위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는 피부의 감촉을 생경하게 느꼈다. 그리 은근하게 와 닿는 감촉 때문일까. 새삼스럽게도 레오나드의 손바닥이 주는 따뜻한 온기에 신경이 온통 쏠렸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슬쩍 손을 빼낸 채이가 레오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

레오나드는 얌전하게 쓰다듬을 받으며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채이.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오늘 하루는 어디 가지 말고, 누구 만나지도 말고 푹 쉬어야 해. 알겠지?”

그 말엔 채이에게서 벤냑스와 페르난데를 떼어 놓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지만 그걸 채이가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그럴게.”

확답을 받아낸 레오나드가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고는 실비에트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너. 채이 너무 귀찮게 하지 마.”

“흥! 채이 귀찮게 하지 않아. 실비는 알아서도 척척 잘하는 드래곤이야.”

실비에트가 짧은 꼬리로 침대 시트를 탁탁 내리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든 말든 반쯤 무시하고 일어난 레오나드는 다시 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봄날처럼 따뜻한 눈. 실비에트를 볼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럼 다시 가볼게. 급하게 온 거라 업무를 다 못 끝냈어. 저녁에 식사 같이 하자.”

“알겠어. 얼른 다시 가 봐.”

채이는 힘내라는 의미로 어제와 같이 레오나드의 허벅지를 도닥여 주고 그를 떠나보냈다. 에녹이 줄곧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을 데리고 나가며 방을 비워주자 방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후우.”

채이가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워버리니 실비에트도 그 옆자리에서 뒹굴었다. 오늘은 레오 말대로 책이나 읽고 실비랑 놀아주며 저녁까지 마음껏 뒹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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