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그렇게 식사를 무사히 끝낸 셋은 대화를 나누며 채이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또 일찍부터 일어나서 일해야 할 텐데도, 레오나드는 밤늦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혹여 그가 피곤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 채이는 실비에트를 대신 상대해 주고 있는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 너 안 쉬러 가도 되니?”
그 물음에 한다는 소리가 당돌하다.
“응. 난 채이랑 있는 게 쉬는 거야.”
기가 찼지만, 한편으로는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감동이었다.
“또 입에 발린 소리한다.”
“난 언제나 진심이야.”
게슴츠레 눈을 뜨고 쳐다보는 채이를 본 레오나드가 슬며시 눈꺼풀을 내리뜬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채이는 나랑 같이 있기 싫어?”
“그런 건 아닌데. 괜히 나 때문에 너 무리해서 내일 피곤할까 봐 그러지.”
“걱정하지 마. 간단한 일이야. 채이가 나 가기 전에 피곤하지 말라고 주문만 한 번 걸어 주면 괜찮을 거거든.”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한숨처럼 웃은 채이는 이내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워하는 실비에트를 바라보았다.
“실비의 부모 드래곤들도 실비를 찾고 있겠지? 얼른 좋은 소식이 들려야 할 텐데.”
그때 채이를 돌아본 실비에트가 두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말했다.
“나는 채이가 좋은데! 채이가 내 아빠. 난 아빠랑 계속 있을 건데.”
“실비….”
채이는 순간 감동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채이가 아빠’라니. ‘아빠가 좋다’니. 레오나드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기에 더욱 예상치 못한 감동이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도 느껴졌다. 실비에트가 아직 채이를 진짜 부모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채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실비에트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떠나야 하는 아이니까. 진실을 숨기고 진짜 부모인 척해서 좋을 건 없을 터였다.
“있지. 사실 난 네 부모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다.
“알아! 나 다 아는 똑똑한 드래곤이야! 그래도 채이가 좋아. 내 아빠는 채이뿐이야.”
실비에트가 벌떡 몸을 세우고 당당한 모습으로 말하는데 채이는 그만 주책맞게 눈물을 쏟을 뻔했다.
“실비,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웅!”
“오구구. 어쩜 이리 기특하니.”
갑작스레 감동의 재회라도 한 듯이 실비에트와 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를 피웠다.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레오나드의 표정은 굉장히 떨떠름해 보였다. 현재 그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실비 떠나면 엄청 그립겠다….”
“‘아빠’라는 말이 그렇게 좋아?”
채이가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리자 뚱하니 눈을 내리뜬 레오나드가 묻는다. 그에 채이는 픽 웃고 실비에트를 침대 위에 다시금 놓아주면서 말했다.
“그럼. 늘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말이거든. 네가 날 아빠라고 불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자 레오나드가 듣지 못한 척하며 외면했다. 질책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으므로, 채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도 이렇게 기쁜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낳은 아이가 아빠라고 불러 주면 얼마나 귀엽고 예쁠까. 가끔 생각해.”
“…….”
“레오. 넌 그렇지 않아?”
그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레오나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채이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그래.”
아래로 떨어진 얼굴이 채이의 목덜미에 와 닿았다. 쪽, 붙었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에 심장이 쿠웅 내려앉았다. 흠칫 놀라버린 채이가 몸을 뒤로 물렸다.
“어….”
심장이 크게 뛰어대니 몸에서 열기도 오르는 것 같다. 얼굴이 화르륵 불타는 걸 느낀 채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또다. 또 시작되었다. 쿵쿵쿵, 시끄럽게 뛰어대는 심장 소리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그즈음 레오나드가 말문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어? 나? 갑자기?”
“응.”
“아니… 아직은 딱히….”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기에 답해 주었건만 정작 레오나드에게서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쉬이 그럴 수 없어, 채이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외면한 채로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아야 했다.
돌연 레오나드가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채이를 불렀다.
“그런데 채이.”
“…어?”
“내 눈은 왜 피하는 거야?”
그 순간 채이는 심장이 한 번 더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혹여 레오나드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계속 불안했다. 결국 시선을 마주하는 데에 실패한 채이는 아예 정면으로 몸을 돌리고 앉아버렸다.
“아무것도. 약간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옆에서 주춤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레오나드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모양새로 채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혹시 열 있는 거야?”
“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혹시 모르니까 이제 그만 자.”
이내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간이 늦었기도 하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이만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꼭 내쫓는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안 좋다. 그 까닭인진 몰라도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채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드는 일어나 있었다. 앉은 상태로는 등까지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채이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도닥였다.
“가서 너도 푹 쉬어. 내일 보자.”
“응.”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살포시 접어 웃은 레오나드가 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심장이 다시 반응했지만 다행히 아까보다는 조금 덜 떨렸다. 차츰 심장 고동이 잦아들 즈음 레오나드는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그때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실비에트가 채이의 팔을 꾹꾹 찔렀다.
“아빠. 아빠.”
“응?”
“레오나드랑 아빠랑 좋아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뽀뽀했잖아.”
“뭐….”
채이는 한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심장이 부풀어 올라서 목구멍을 뚫고 올라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 호흡 느리게 반응한 채이가 실비에트의 말에 반박했다.
“실비. 그건 그냥 인사였어.”
“훙.”
“나한테 있어서 레오는 실비처럼 마음으로 낳은 아들 같은, 그런 사람이야. 알겠니?”
채이의 조곤조곤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비에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계속 채이를 쳐다보았다. 마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이었다.
“진짜라니까. 왜 그렇게 쳐다봐.”
“실비에트는 알 거 다 아는 드래곤이지만 채이 곤란해하니까 내가 모르는 척해줄게.”
기가 막혔다. 생후 1주도 안 되는 녀석이 마치 채이보다 어른인 척하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다.
“…됐고 잠이나 자자. 늦었어.”
“아빠아, 쓰담쓰담해줘.”
“알겠어. 여기 누워.”
포닥포닥 날아서 항상 눕는 채이의 옆자리에 안착한 실비에트가 배를 까고 뒤집었다. 강아지 같은 행동에 웃음을 지어버린 채이가 배를 문지르며 쓰다듬어주니, 실비에트는 금세 새근새근 잠들었다. 조용한 방 안에 실비에트의 잔잔한 숨소리만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채이는 곧 심각한 얼굴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은데. 뭔가 빈도가 잦아진 기분도 들고.’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순 없으리라. 큰 문제 없는 부정맥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문득 랭커스터 가의 주치의인 제이든의 얼굴과 함께, 그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랭커스터 가의 일원도 아닌 자신이 가문의 주치의를 멋대로 불러내는 것이 염치없긴 하지만… 불러도 된다 했으니까.
‘한 번만 더 도움을 받도록 하자.’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채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즈음 여느 날과 같은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하인들이 청소를 하고 에녹은 채이에게 아침 물 한 잔을 준비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다. 하지만 문득 채이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챈 에녹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채이 님, 오늘 표정이 안 좋으신데… 피곤하셔서 그러나요?”
그 걱정에 한차례 고개를 내저은 채이는 평소보다 차분한 얼굴로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 제이든 좀 불러와 줄래?”
“네? 제이든 주치의요?”
“응. 저번에 제이든이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또 불러도 된다고 했었거든.”
순간 깜짝 놀란 에녹이 그만 쟁반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텅그렁! 하는 소음과 함께 방 청소를 하던 하인들의 이목도 쏠린다. 쟁반 위에 있던 물컵을 채이가 이미 건네받은 상태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녹….”
덩달아 놀란 채이는 에녹을 조심히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경악 어린 얼굴로 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직후의 일이다. 에녹은 아주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허둥지둥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채, 채이 님!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아. 그게 뭐랄까. 심장이….”
“자, 자, 자, 잠시만 기다려요!”
‘심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저러다 튀어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눈망울이 커다래진다.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던 에녹은 부리나케 달려 나가 버렸다. 괜스레 머쓱해진 채이는 입을 다물었다.
누가 보면 채이가 당장 죽겠다고 말한 줄 알겠다.